에세이 생로병사(271호)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이었으니 17살 때였다. 크리스마스 때 대학에 다니는 선배로부터 〈톨스토이 인생독본〉이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톨스토이가 34살부터 39살까지 〈전쟁과 평화〉를 썼는데 그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자 독자로부터 날아오는 펜 레터를 두 사람이 정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펜 레터 속에는,

‘당신은 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극도의 찬사가 섞여 있었다. 그러자 톨스토이는,

‘글을 쓰는 것은 사람을 속이는 사기 행위다’

라는 생각을 하고 글쓰기를 멈추고 대신 남의 글을 읽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때 톨스토이가 읽은 책이 10만 권이라고 하는 데, 톨스토이는 자신이 읽은 책 중에서 명언 명구를 뽑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곁들여 1월 1일부터 12월 31일 까지 사색의 장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출간한 책이 〈인생독본〉이다.

나는 선물 받은 책을 펴드는 순간부터 완전히 그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완전히 그 책을 읽는데 바쳤다. 빨간 색연필로 줄을 그으며 읽고 또 읽다보니 책이 너덜너덜 떨어져서 제본한 실이 다 밖으로 튀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책을 만드는 기술이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거의 다 외우고 나니,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면 죽을 때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갇히고 말았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풀지 않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명예를 얻는 것도… 평범한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런 걸 얻어서 뭘 어쩌겠다는 건데?’

하는 생각이 뒤따르면, 모든 것이 빛바랜 휴지 조각처럼 아무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런 나날이 이어지다보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영어공부를 하고 수학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한심하게 보였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답답함 속에서 대학을 갔지만 대학생활도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밤을 새워 생각하고, 밤을 새워 책을 읽고, 답을 줄만한 교수를 찾아 질문하고 또 질문했지만 어디에서도 내가 찾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32살이 되었을 때 다미키 고시로가 쓴 〈화엄경의 세계〉 안에서 ‘보살십지품’을 읽다가 마침내 그 해답을 얻었다. ‘십지품’을 읽고 있을 때 갑자기 집이 없어지고 내가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환각과 함께 천지에 향내가 꽉 차는 경험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찾고 있던 답이 보살의 삶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스스로 불자라고 생각했고, 주위 사람들한테도 불자임을 밝히며 살아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42살 때 나는 KBS에서 〈고교생 일기〉라는 청소년 드라마를 썼다. 드라마 안에서 여교사가 첫 사랑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첫 사랑의 대상으로 나온 배우가 주현 씨였다. 촬영이 끝나고 쫑파티를 할 때 주현 씨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했느냐에 따라 연기의 농도가 달라지지요. 인생을 모르면 진국의 연기가 우러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을 알려면 아래의 네 가지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한 네 가지는,

‘먹을 게 없어서 며칠을 굶어보고 빚을 갚지 못해서 길바닥으로 쫓겨나는 경험을 해봐야 가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가장 가까운 사람 특히 자식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만이 이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밑바닥까지 추락해서 멸시와 조롱을 받아 봐야 비참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봐야 살아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는 것이다. 너무 끔찍해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말들이지만 그런 처절함에 떨어져 보지 않고는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에는 공감이 갔다. 주현 씨가 자신의 생각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 들은 말을 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40여 년 전에 들은 그 말을 가끔씩 떠올려보곤 한다. 인생이라는 학교에 와서 나는 무엇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 때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 방황하던 시점에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보살의 삶이 내가 찾는 답임을 알았지만 답을 알았다고 해서 매일 매일의 일상이 바로 보살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처절한 몸부림이 따라야 하는데 주현 씨는 그걸 가난, 이별, 참담함, 죽음의 직시 등이라고 표현했다.

 

주현 씨가 말한 네 유형의 과정을 그대로 겪지는 않았지만 나도 인생이라는 협곡열차를 타고 달려오는 동안 그와 비슷한 유형의 터널을 꽤 오랜 시간동안 지나왔던 것 같다. 돌이켜 보니 그런 유형의 경험을 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향해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머리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씁쓸함과 외로움, 참담함과 비참함 속에서.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미미하나마 남을 이해하는 마음을 키웠고, 겸손한 마음을 키웠으니, 어찌 고맙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추구하는 보살의 삶도 그런 과정을 겪고 났을 때 비로소 진한 맛을 낼 수 있음을 알았다. 뼛속까지 우러나야 제대로 맛을 내는 사골 국물처럼 말이다.

이제 종착역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내가 탄 협곡열차가 종착역에 닿으면 나는 차에서 내려야 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그러면 삶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고, 망자인 나는 산 자와 작별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망자는 말을 하지 못한다. 망자도 말을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산 자는 망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작별의 순간엔 산 자의 말만 남게 된다.

“참으로 한심하군. 어떻게 세상에 와서 이렇게 밖에 못살고 간담. 쯧 쯧”

“이렇게 살다 갈 걸, 뭘 그렇게까지 아등바등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네. 어리석기는… ”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떠나다니, 빈자리가 참으로 크게 느껴지는군.”

“기대고 싶은 유일한 언덕이었는데… 이제 어디서 위안을 받을 수 있을까? 좀 더 우리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전한 마음이 동굴처럼 패이네.”

“지혜와 인품을 갖춘 유일한 스승이었는데. 이제 누구한테 가서 길을 물어야 하나?”

“늘 대의를 위해 사셨는데. 세상을 밝히던 등불이 꺼진 것 같군. 이 상실감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당신을 보면서 비로소 성인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제 어디서 진리의 일깨움을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망자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산자의 평가와 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시왕(十王)들의 평가는 같을까? 다를까? 모르긴 해도 산 자의 평가와 염라대앙을 위시한 시왕들의 평가는 같으리라고 본다. 그리고 망자는 위에 열거한 평가 중 하나가 자신을 평가하는 말임을 알게 되리라고 본다.

아! 그때,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나를 평가하는 말임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알고 떠나야 한다면, 제발 그런 일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는 것은 엄숙하다. 그래서 잘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면 후회하지 않고 죽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죽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삶을 통해 축적해 가는 세계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나의 몫이고, 그것에 대한 평가는 내가 죽은 후 살아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사는 거, 그게 죽음을 바로 이해한 사람이 가는 길일 것이다. 사후의 세계가 펼쳐진다 해도, 윤회를 통해 환생한다 해도, 기본 틀은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평가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으로.

남지심

소설가.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장편소설 〈솔바람 물결소리〉가 당선돼 문단에 나온 이후, 특유의 섬세하고 종교적인 시선으로 글을 써 오고 있다. 〈우담바라〉(전4권), 〈연꽃을 피운 돌〉, 〈한암〉, 〈담무갈〉(전4권), 〈청화 큰스님〉(전2권) 등이 있다. 대표작 〈우담바라〉는 총 600만 권이 팔린 밀리언셀러로,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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