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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형제의 우애겨레의 산, 그 옛 이야기(271호)
  • 글·우봉규 / 삽화·전병준
  • 승인 2018.03.28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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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冠岳山)의 높이는 불과 629m이나 북한산·남한산 등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자연의 방벽이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5악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에 이른다.

관악산은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고 했다. 관악산은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 된 나무와 온갖 숲이 바위와 어울려서 철따라 변하는 산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하였다.

한남정맥(漢南正脈)의 중추를 이루는 경기도 안성시 칠장산(七長山)에서 달기봉, 광교산 등을 걸쳐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이 서울한강 남쪽에 이르러 솟구친 산이다. 동봉으로 관악, 서봉으로 삼성산, 북봉으로 장군봉과 호암산을 아우르면서, 곳곳에 드러난 암봉들은 깊은 골짜기와 어울려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본래 화산(火山)의 기운이 있어서,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를 끄기 위해 경복궁 앞에 해태를 만들어 세우고, 이 산의 중턱에 물동이를 묻었다고 한다. 산정에는 세조가 기우제를 지내던 영주대(靈珠臺)가 있다. 산중에는 연주암, 삼성암, 용마암, 자왕암, 자운암, 불성사 등의 수많은 암자가 곳곳에 자리한다. 우리와 너무도 가깝기에 잘 모르는 산, 기실 관악산은 불산(佛山), 그 자체다.

 

조선 왕조가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긴지 불과 30년.

왕이 되기 위해 형제까지 무자비하게 죽인 태종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 왕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많은 신하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그는 점점 쇠약해져만 가는 자신의 몸을 돌아보며 왕좌를 물려줄 자식들을 살펴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일찌감치 세자로 책봉된 큰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방탕한 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순리로 따지면 마땅히 세자인 양녕이 다음 번 왕위를 물려받아야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했다. 칼로 정권을 잡은 그였기에, 그리고 아버지 이성계마저도 밀어낸 자신이었기에, 왕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불나비 같은 자들에 대한 의심은 너무 컸다.

자신의 처가, 그러니까 양녕대군의 외가 민 씨들이 걱정스러웠다. 양녕은 어릴 때부터 외가에서 자랐고, 또한 그가 왕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민 씨들이 세자 양녕을 등에 업고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어린 양녕은 아버지 태종의 말도 듣지 않고, 외가인 민 씨들을 두둔하였다. 그래서 태종은 점점 양녕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사실 양녕의 방탕한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 이후로 양녕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궁궐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강제로 해야 하는 글 읽기에 신물이 난 것은 물론, 궁중생활 자체도 싫었던 것이다.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태종의 마음은 서서히 양녕에게서 떠나갔다.

세상 누가 왕위를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단 왕이 되면 그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양녕을 괴롭혔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세종대왕으로 알고 있는 셋째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이 되었다.

그래서 양녕은 서울 근교 곳곳을 돌면서 방랑하고 있었고, 둘째인 효령(孝寧)은 관악산 관악사, 그러니까 지금의 연주암 조금 아래에서 북을 치고 있었다. 효령은 처음에는 불경 귀절에 맞추어 북을 쳤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북을 잡은 그의 손은 빨라졌다. 형인 양녕대군이 궁에서 쫓겨난다면 당연히 자신이 세자가 될 줄 알고 품었던 마음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는 더욱 세차게 북을 두드렸다.

“둥둥둥둥!”

어찌나 북을 세게 쳤던지 나중에는 가죽이 늘어났다.

다른 스님이 이상스러워 뒷방 북소리 나는 데로 나가 보았다.

효령은 그를 보지 못하고 여전히 북을 치고 있었다.

“대군, 북이 늘어났소이다. 북소리가 아니라 가죽 치는 소리밖에 안 들리오이다. 자신이 치는 북소리는 자신밖에 들을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달아야겠소.”

그제야 효령은 지긋이 그 늙은 스님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이라는 것,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는 비로소 환한 웃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효령과 달리 양녕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였는데도 여전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불심 깊은 효령이 양녕에게 관악사 동행을 권했다. 양녕은 아무 곳이나 좋았다. 술 그리고 그가 취미로 삼고 있는 사냥만 할 수 있다면. 관악산 관악사는 서울의 궁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양녕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임금이 있는 궁성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왕이 된 아우 충녕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태종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것이 그를 견딜 수 없게 하였다.

그는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었던…… 궁궐을 마음껏 바라볼 수 없는 슬픔이 그의 가슴을 메웠다. 양녕은 관악사에 도착해서는 마지못해 효령과 같이 법당에 나가 부처님께 공손히 예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불심 깊은 효령은 정성껏 부처님 앞에서 예를 갖췄지만, 불교에 뜻이 없고 세상사가 모두 허황하게만 느껴지는 양녕에게는 절이라고 해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없었다.

불당 안에는 부처님상이 장엄하게 앉아 있으나 한 겹을 뜯어본다면 나무나 금동으로 만든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웃었다. 이렇게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절을 하다니. 그는 즉시로 사냥놀이에 나섰다.

“형님, 오늘은 안 됩니다. 오늘은 재를 올리는 날이니 사냥과 술, 고기는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효령이 양녕의 뒤꼭지에 대고 한 말이었다. 양녕은 웃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지지리 복도 많다. 살아서는 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부처님의 형이 되겠구나. 흐흐!”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심정을 내뱉어도 마음 한 구석에 뭉쳐있는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처음 효령과의 관악산에 오른 지 2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왕에 대한 미련은 궁궐을 떠난 시간이 오래일수록 더욱 끓어올랐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궁성이 보이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몸은 마음같이 따라주지 않았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연기가 오르는 궁궐을 바라보았고, 저녁이면 하나 둘 등불이 껴지는 머언 궁궐을 그리워하였다. 양녕의 마음을 아는 효령은 양녕에게 간절히 불경을 읽도록 권했다. 그러나 양녕에게 부처님의 말씀이 가슴 깊이 와 닿을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 되어 달이 밝아올 때 그는 갑갑한 심정을 풀기 위해 뒷산에 올라갔다. 큰 법당에서는 재 올리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 이곳저곳을 거닐다가 문득 그는 작은 암자를 발견하였다. 무엇하는 곳인가 하고 기웃해 보니 늙은 스님이 홀로 달맞이를 하고 있었다.

“노승은 이곳에 어찌 홀로 계시오?”

백발의 노승이 대답했다.

“달을 보고 있소이다.”

“어째 저 아래 절에서 재 올리는데 아니 가셨소?”

“소승은 그런 중이 아니오.”

"그럼 무엇하시오?”

“암자에서 홀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오.”

“그래도 좀 가보시지요?”

“속된 중들은 염불보다 잿밥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벽만 보고 삽니다. 그래도 나의 마음은 언제나 평화스럽소.”

노승은 여전히 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양녕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궁성에서 일어나는 일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저 달빛 한줌보다 못한 세상의 일을 두고 자신은 스스로를 얼마나 학대했는가?

그는 자신이 겪어왔던 행로를 곰곰 되돌아보았다. 부끄러웠다. 그는 더 이상 노승의 얼굴을 대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는 총총히 다시 관악사로 내려왔다.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도 조금 전에 만난 그 노승이 잊혀지질 않았다.

그 때 효령이 양녕의 방으로 왔다.

“형님, 우리 막내가 형님 드시라고 술과 안주를 이곳 관악산까지 보냈습니다.”

“막내가?”

양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든 궁궐로 오시고 싶으면 오시랍니다.”

그토록 착한 막내 충녕, 즉 세종대왕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형이 되어, 그것도 큰 형이 되어 무엇을 하였던가? 양녕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님, 우리 막내가 임금 노릇을 잘 한다고 백성들 칭찬이 여간 아닙니다. 모두들 위대한 왕이 났다고 야단들입니다.”

“정말이냐?”

양녕은 효령을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둘은 한없이 웃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막내가 위대한 임금으로 길이길이 남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언제까지나 착한 우리 막내를 우리가 지켜주어야지.”

그 말에 효령도 머리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난 즉시로 양녕은 어제의 그 산꼭대기 암자로 결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엔 어제의 그 암자는 온 데 간 데 없고, 뜰 앞에는 다 쓰러져가는 탑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하, 양녕은 어젯밤 일을 생각하며 시를 읊었다.

 

산 노을로 아침밥을 지어 먹고

덩굴 어린 달로 등을 삼네

외로운 바위 아래 자고 나니

오직 탑 한 층이 남아 있을 뿐일세.

 

그 후로 양녕은 효령과 함께 그 암자가 있던 자리로 절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관악사는 관악산 최정상의 연주암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막내 세종대왕을 지켜보기 위해서. 훗날 사람들은 이 절을 가리켜 연주암(戀主庵, 서울 궁궐을 그리워하는 암자)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막내 동생을 아끼는 두 왕자의 애틋한 형제애가 오늘의 연주암을 만든 것이다. 물론 세종대왕인 충녕 또한 형들을 평생 그리워했다. 우리 역사 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왕족간의 형제애는 없었다.

삼막사와 한께 관악산에서 가장 유서 깊은 절, 연주암. 이 땅에 살았던 인물과 역사, 그리고 소박한 경관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형제애를 꽃 피운 천하절경의 도량. 그곳이 지금의 우리 서울에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우봉규

작가. 〈황금사과〉로 동양문학상을 받은 뒤 〈객사〉로 월간문학상을, 〈남태강곡〉으로 삼성문학상을, 〈갈매기야 훨훨 날아라〉로 계몽사 아동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희곡 〈눈꽃〉이 한국일보사 공모 광복 50주년 기념작에 당선되면서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2001년과 2002년 서울국제공연제 공식 초청작 〈바리공주〉, 〈행복한 집〉 발표 이후, 우리나라 희곡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글·우봉규 / 삽화·전병준  ggbn@ggbn.co.kr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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