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 세 분 모신 공덕으로 목숨 구해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제정코자 명나라 주원장의 재가를 받기 위해 사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는 원래 공민왕의 신하로 북벌에 공이 큰 장군이었으나, 고려의 기세가 쇠약한 틈을 타 공민왕을 폐위시키고 또 그 뒤 우왕, 창왕, 공양왕 등도 봉림하다가 결국, 그들을 모두 죽인 후 나라를 세우니 고려로 보아서는 역신 중의 역신이요, 조선으로 보아서는 건국 태조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나라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그 나라의 이름을 그대로 고려로 할 수는 없었지요. 일단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테니까요. 자기 고향인 함흥의 함(咸)자와 강령의 영(寧)자를 따서 함령국(咸寧國)이라 짓거나 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조선의 손이 계계승승해 오는 터이므로 조선이라 지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 이름을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이 그 때 우리나라의 실정이었으니, 우리나라는 고려 중엽 이후로 중국의 속국처럼 조공국이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함영국, 또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보내 재가를 얻어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으로 보낸 사신들은 하나같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성계가 역적이니 그의 신하도 마찬가지란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만, 이성계가 조정승을 중국으로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그를 낙점한 것은 조정승이 수차에 걸쳐 중국에 내왕하여 주원장과 친숙한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정승은 난처했지만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의 성품으로 보아 중국행을 거절하면 그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었으니까요. 집에 있어도 죽고 가도 죽을 바에야 주원장에게 가서 한번 사정이나 해 보고 죽자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조정승의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을 독실하게 믿었습니다. 그의 모든 가족들은 예로부터 다니던 절에 올라가 무사히 귀가할 것을 기도하였고, 조정승도 자신이 즐겨 읽는 〈법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을 독송하며 오직 무사귀환을 발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일행이 황해도 시흥 어느 주막집을 숙소로 정하고 초조하게 하룻밤을 새우는데 비몽사몽간에 고깔을 쓰고 가사 장삼을 입은 세 사람의 사미승이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대감,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굳게 잡수시고 신표(信標)를 청하십시오.”

“신표라니, 무슨 좋은 방도라도 있는가?”

“예, 방도가 있습니다. 이 집 뒷골짜기로 오리 쯤 올라가면 큰 절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한 길이 넘는 세 분의 돌부처가 풍우를 가리지 못하고 앉아 계십니다. 대감이 집을 지어 그 부처님께 공양하면 그 공덕으로 대사는 결코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어명을 받고 바쁜 길을 가는 길손인데 어느새 절을 짓고 부처님을 모실 겨를이 있겠는가?”

“그거야 간단합니다. 황해도 감사에게 부탁만 하면 될게 아닙니까?”

그러나 조정승은 ‘십중팔구는 중국에 도착하면 곧 죽을 터인데 절을 지어 무슨 공덕을 짓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다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미승은 두 번 세 번 나타나 똑같이 말했습니다. 조정승은 너무나도 분명한 꿈이라 정신을 가다듬고 집주인을 불렀습니다.

“이 곳으로부터 오리 쯤 떨어진 곳에 옛 절터가 있는가?“

“예, 거기에는 세 분의 돌부처가 반쯤 흙에 묻혀 크게 풍상을 겪고 있습니다.”

조정승은 그제야 자신의 무릎을 쳤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내 그분 들을 뵙고 가리라.”

조정승은 날이 밝기도 전에 이슬 맺힌 산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과연 쓰러진 절 터 위에 세 분의 부처님이 쓸쓸하게 서 있었지요. 마치 그것은 따뜻한 집을 등지고 죽음의 문을 향해 가는 자기 신세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였습니다.

“이토록 풍상에 마멸되어 성상이 훼손되는 것이나, 역적의 태를 쓰고 죽어갈 이 신세나 어쩌면 그리도 같습니까? 원하옵나니 부처님께서 저의 일을 도와주실 것을 믿는 까닭으로 신민의 노역을 아끼지 않고 여기 가람을 짓도록 명령하겠나이다. 제가 돌아오는 날에는 필시 부처님의 상호가 따뜻한 법당 안에 안온히 모셔져 있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황해도 감사를 불러 이 절을 새로 지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비록 꿈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의지하는 바가 있어 조정승의 마음은 한결 편안했습니다. 마침내 조정승이 주원장에게 이성계의 뜻을 전하고, 필히 국호를 결정해 내려줄 것을 간청하자 주원장은 벼락같이 소리쳤습니다.

“무도한 역적이 국토를 도둑질하고 다시 국호를 정해 허락해 달라니 어찌 하늘이 무심할 수 있느냐? 여봐라, 이 놈을 당장 참수하라!”

조정승은 그대로 형장에 끌려가 교수대에 올랐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물 한 그릇과 배석자리 하나만 갔다 주오.”

물이 상위에 올려지고 배석자리가 깔리자 조정승은 단정히 무릎을 끊고 먼저 국왕인 이성계에게 예를 갖췄습니다.

“대신 조공, 멀리서 사별하나이다. 대왕의 명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신하로서 면목이 없나이다. 용서하십시오.”

다음은 부모님을 향해 예를 갖췄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하해보다 깊고 태산보다 높다 하는데 그 은혜를 조금도 보답치 못하고 죽어가는 자식, 스스로 불효됨을 통탄할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황해도 시흥 산중의 세 부처님께 정례하였습니다.

“필히 대사를 성사하여 부처님의 가람이 이룩된 곳을 친히 뵙고 또 공양코자 하였으나 이제 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으니 오직 약속 이행치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모든 하직의 예가 끝나자 다시 형리가 물었습니다.

“더 할 말이 있는가?”

“없다.”

“그럼, 집행하라!”

형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망나니는 푸른 칼을 들고 미친 듯이 날뛰면서 동서로 설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망나니가 칼을 들고 조공을 내려쳤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놀랍게도 망나니의 칼날에 조정승의 목이 베어지는 게 아니라 망나니의 칼날이 두 동강이로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에도 마찬가지로 칼이 부러지자 형리는 곧바로 주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폐하, 망나니가 아무리 베어도 베어지지 않고 칼이 부러지니 이는 보통 사람이 아닌가 하나이다.”

“기이한 일이로고,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그를 데려오너라.”

조정승이 덤덤하게 예를 갖추자 주원장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자가 하늘의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벌을 주려해 미안하다. 이제 너에게 비단 500필과 황금 일 천량을 내리고 또 국호를 조선이라 재가 하노라.”

그야말로 감개무량. 조정승이 이제 자신의 고국 조선으로 돌아오는데, 황해도 시흥에 이르자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부처님이 계시던 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너무 기쁜 조정승은 그만 전의 일을 잊고 물었습니다.

“대감님께서 명령하신 절이 이제 막 완공이 되어 오늘이 그 낙성식입니다.”

“아차차, 어리석은 내가 그 세 분의 부처님을 잊고 있었구나. 어서 그곳으로 가자꾸나.”

절에 오르자 오색단청에 봉황이 수놓아진 법당에서 맑은 풍경소리가 울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조정승의 눈에 비친 세 분 부처님의 형상이 참혹했습니다.

“어찌하여 부처님 목에 칼자국이 나 있고, 또 빨갛게 핏자국이 맺혀 있느냐?”

“저희들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초사흘 오후에 부처님을 이곳으로 옮겨 모셨는데 이상스럽게도 칼 소리가 쨍그렁 나서 쳐다보니 이 부처님 목에 칼 자국이 나고 그 곳에서 저렇게 피가 주르르 흘렀습니다.”

“다른 분도 마찬가진가?”

“예, 다른 분도 마찬가집니다. 단지 시간의 차이만 있었을 뿐입니다.”

“아, 참으로 신통한 일이로다. 내가 바로 그 날 그 시간에 교수대에서 칼을 받던 순간이다.”

조정승은 그 길로 왕궁으로 돌아와 이성계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이성계 역시 감격하여 크게 상을 내리고 그 절 이름을 ‘속명사(讀命寺, 수명을 이은 절)’라 지어 현판까지 써주었습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황해도의 시흥 땅, 지금도 그 세 분의 부처님은 안녕하실까요? 하루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불교사찰자료집(佛敎寺刹史料集), 이조실록(李朝實錄)〉에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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