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한 교수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옛날 서쪽 나라에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를 찾기 위해 진력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깨달은 결과는 허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수십 년의 탐구를 마친 어느 날, 그는 사람들이 즐비한 광장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같은 시절 동쪽 나라에는 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천안통을 얻기 위해 수십 년 도를 닦았습니다. 마침내 득도(得道)를 선언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얘기는 옛날이건 지금이건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기대와 상식을 저버리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세상은 종교와 과학도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습니다.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도 너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현명하게 바라보고 냉정하게 현실을 짚어야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다문화(多文化)와 사고(思考)의 다양성으로 인해 적절한 조화와 배려가 존중돼야 하는 시점에선 무엇보다 세상과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소통이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통로이며 제각각의 문화와 생각을 어울리게 하는 수단이자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물을 가둬두면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공기를 환기시키지 않으면 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언로(言路)를 막고 문화의 교류를 차단하는 것은 마치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하는 식물인간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통(不通)의 사회는 곧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게 사회학자들의 충고입니다.

소통은 먼저 듣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먼저 주장하기에 앞서 상대가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경청하는 게 순서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소통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자기 말만 하고 상대의 말을 듣기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은 교류에 매번 실패합니다. 소통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서로가 즐거워야 하고 모두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소통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중국에 전해져 내려오는 다음 일화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중국의 옛 제국시절에 약소국의 사신이 똑같은 사람 모양의 금 조각상 3개를 황제에게 바쳤습니다. 황제는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정교하게 조각된 금제품을 선물 받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약소국의 사신은 중국인의 지혜를 알아보기 위해 문제를 냈습니다. “이 3개의 금 조각상 중에서 가장 가치가 큰 것은 어느 것일까요?” 황제와 대신들은 이 문제를 듣고 고심에 빠졌습니다.

보석공을 불러 무게도 재보고 가공의 완성도도 재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가치의 경중을 알아보려 했으나 아무런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답을 기다리는 사신 앞에서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을 즈음 은퇴를 앞둔 나이 든 신하가 앞으로 나와 자신이 답을 맞힐 테니 기회를 달라 말하였습니다.

황제는 기꺼이 그리하라 승낙했습니다. 나이 든 신하는 세 뿌리의 풀을 가져와 각각 3개의 금조각상 귀에 넣었습니다. 첫 번째 조각상의 귀에 풀을 넣자 다른 쪽 귓구멍으로 나왔고, 두 번째 조각상은 입으로 나왔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조각상 귀에 풀을 넣자 풀이 뱃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신하가 황제에게 말했습니다. “세 번째 조각상의 가치가 제일 큽니다. 그 이유는 경청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조각상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다른 귀로 흘려보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지 않으며, 귀 기울여 들은 내용을 천천히 소화하고 이해하므로 세 번째 조각상의 가치가 제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약소국의 사신 역시 크게 감탄하며 신하의 답이 정답이라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아난다는 다문제일(多聞第一)로 불립니다. 아난다는 부처님을 시봉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입니다. ‘아난다’는 인도말로 ‘환희’ 또는 ‘기쁨’을 뜻합니다. 실제로 아난다는 부처님의 입멸 이후에 분열될 수도 있었던 승가를 지키고 제자들의 화합을 도모했던 인물입니다. 실제로 부처님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아난다가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교단의 안정을 꾀하게 된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소통역을 자임한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제자들 사이에서 훌륭히 소통의 가교역을 한 아난다가 있었기 때문에 경전결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승가공동체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소통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지도자들 역시 소통의 리더십을 요구받고 있는데 그만큼 대중들이 소통을 매우 긴요한 요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터입니다. 천개의 손과 눈이 상징하는 천수천안관세음이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세상을 향해 온몸을 드러내고 있듯이 우리 불자님들도 모두 귀를 활짝 열고 소통보살의 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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