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국사 의천 스님 이야기(270호)

순천 선암사 소장 대각국사 의천 스님 진영. 보물 제1044호.

문종과 고려문화의 전성기

고려의 제11대 국왕 문종(文宗)은 조선시대의 세종에 견줄만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문종이 재위할 때의 대내외 정세는 대체로 안정적이었으며 그런 환경을 발판 삼아 고려의 학문과 제도, 문화 예술이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문종은 공훈(功勳)을 이룬 귀족에게 땅을 하사하여 자손에게 상속케 하는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 등 여러 가지 법률과 제도를 제정하거나 정비해 내치를 다졌다. 송나라와 요나라 등 주변국가의 정세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고려 전기의 왕들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고려의 문화 수준을 높이 끌어올렸다. 특히 문종은 대찰인 흥왕사를 창건했으며 넷째 왕자인 후(煦, 대각국사 의천)를 출가시켰는데 이 일은 훗날 한국불교사의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유학 분야에서는 명재상이었던 최충(崔沖)으로 하여금 유교적 정치제도와 교육제도를 정비해 유학을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했다. 문종의 이런 노력으로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도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국가로 성장했다.

문종은 다섯 왕비를 두었는데 그 중 셋은 이자연(李子淵)의 딸이었다. 그리고 왕비 중 인예태후(仁睿太后)와 인경현비(仁敬賢妃) 사이에서 13남 2녀를 얻었는데 의천 스님은 문종과 인예태후 사이에 태어난 넷째 왕자이다.

그때의 중국 대륙은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와 남쪽으로 쫓겨난 송나라로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 요나라는 10세기 초부터 12세기 초까지 약 200여 년간 지금의 만주 일대와 중국의 북쪽 대륙을 지배한 국가로, 고구려 유민이 세운 해동성국 발해를 926년에 멸망시켰다. 이 사건으로 고려는 큰 위협을 느꼈는데, 발해의 백성들 대부분이 같은 배달민족으로 구성된 고려의 형제국가였기 때문이다. 이때 나라를 잃은 수만 명의 발해인들이 고려로 들어와 정착했다.

요나라는 발해를 멸망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점점 세력을 키워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욕에 들떠 있었다. 이렇게 요나라가 한창 세력을 키우던 960년 무렵, 5대 10국의 혼란을 평정한 조광윤이 송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했다. 송나라 태조가 된 조광윤은 수도를 개봉(開封)으로 옮긴 후 문치(文治)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주희(朱熹) 등 뛰어난 학자와 문인들이 등용되어 송나라의 문화와 학문 수준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문치에만 주력하다 보니 국방력이 허약해졌고 그 틈을 노린 요나라에게 위협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치기에 앞서 고려를 제압하기로 했다.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송나라를 공격할 때 고려가 자신들의 배후를 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그리하여 993년(성종 12)부터 1018년(현종 9) 사이에 모두 세 차례나 고려를 침략했다. 하지만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두 차례나 고려의 완강한 수비에 막힌 요나라는 1018년 12월, 3차 침입을 했으나 이때는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귀주에서 요나라의 10만 대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

고려는 이때 역사에 남을 큰 승리를 거뒀지만 강화회담 때는 송나라 연호를 정지하는 대신 요나라 연호를 써야만 했다. 이는 고려와 송나라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었음을 뜻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요나라의 기세가 워낙 등등했기 때문이다. 요나라는 이미 송나라를 ‘형님 국가’로 부르면서도 오히려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조공을 받을 정도로 국력이 왕성했다. 따라서 고려는 귀주대첩 이후, 요나라가 요구했던 고려 국왕의 친조를 생략하고 오래 전 차지했던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게 된 것으로 만족하는 정도였다.

그 뒤 요나라가 멸망하던 1125년까지 고려와 송나라, 요나라의 관계는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송과 요는 고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고 고려는 그런 관계를 이용해 양국의 균형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때가 문종과 그의 여러 아들들이 재위했거나 의천 스님이 불교 학문을 발전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던 시기다. 그런가 하면 의천 스님이 불법(佛法)을 구할 목적으로 송나라로 건너가고자 했으나 여러 번 좌절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여기에 있었다.

불연 깊은 왕자의 출생

1055년 9월, 인예태후는 넷째아들인 후(煦)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으로 불리게 될 인물이다. 여느 위대한 인물처럼 의천 스님에게도 신비한 출생담이 있다. 인예태후가 스님을 잉태했을 때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든지 하는 이야긴 오히려 평범한 축에 속한다. 갓난아기 때 왼손을 좀체 펴지 않았으며 끝없이 울다가도 어디에선가 낭랑히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를 들으면 울음을 그치곤 했다. 그러다가 목탁소리가 끊어지면 다시 울어댔다는 것이다. 주변 신하들이 목탁소리의 진원지를 추적해 보니 멀리 송나라 항주(杭州)의 어느 사찰이었다. 그 절까지 찾아간 고려의 사신들이 주지스님에게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앞뒤 상황을 모두 알게 된 주지 스님이 말했다.

“그 분은 제 스승님이 틀림없소.”

“무슨 말씀이온지…….”

“직접 뵙고 증명해보이리다.”

얼마 후 사신들을 따라 고려 왕실에 도착한 항주의 주지 스님이 아직 돌도 되기 전인 의천 스님이 꼭 쥐고 있던 왼손을 펴보았다. 거기엔 ‘불무령(佛無靈)’이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제 필적인데 스승께서 열반하시기 직전 써둔 것이라오.”

“부처님께는 영험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무슨 내력이 있는지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사람들이 청하자 항주의 주지 스님이 답했다.

“제가 시봉하던 스승님은 자나 깨나 목어를 두드리며 염불을 하시어 신도들이 아예 ‘목어 스님’이라 부를 정도였소. 하지만 그리도 정성스레 기도를 했건만 말년에는 앉은뱅이에 장님까지 되고 말았소. 소승이 그때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선 무슨 기도든 다 들어 주신다더니 모두 헛소리인가 싶어 스승님이 열반하시기 직전 ‘불무령’이란 글자를 썼던 것인데 이처럼 고려의 왕자로 태어나셨으니 소승이 부처님을 원망한 게 한없이 부끄럽구려.”

주지 스님은 그 말을 마치고 어린 의천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의천 스님이 송나라 큰스님의 환생이라는 걸 믿게 되었다.

의천 스님과 관련한 이런 출생설화는 훗날 그가 보여준 여러 가지 업적들을 이해시키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의천 스님은 왕자라는 지위를 버리고 출가했으며, 어린 나이에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랐다. 속장경(續藏經)을 편찬해 한국 불교학의 지평을 넓힌 일과, 천태종을 개창한 일도 의천 스님이 남긴 중요한 업적이었다. 어려서 출가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긴 것은 아무래도 전생부터 맺은 깊은 불연과 타고난 지혜, 그리고 끈기 있는 학문 탐구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세상이 놀란 13세 승통

의천 스님은 태어난 뒤 후(煦)라는 속명으로 불렸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록에는 후라는 이름이 송나라 철종의 속명인 조후(趙煦)와 같아서 이를 피휘(避諱)하려고 의천이란 법명(法名)을 주로 썼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송나라 철종이 의천 스님보다 22년 뒤(서기 1077년)에 태어난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의천 스님이 22세가 되기 전이나 출가하기 전까지는 후라는 이름으로 불렸을 게 분명하다. 만약 피휘를 했다면 의천 스님이 열반한 뒤 비문을 썼던 제자들이나 후세 사가들이 그랬을 것이다.

의천 스님이 열한 살에 출가해 비구계를 받은 뒤로는 속명이 아닌 ‘의천’이란 법명을 썼을 것이고 2년 뒤 승통이 된 후로는 ‘우세(祐世)’라는 법호를 받았으니 의천 자신은 물론 당시 사람들은 ‘의천 스님’이나 ‘우세 승통’이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의천 스님이 출가를 한 것은 열한 살(만 10세)때의 일이다. 고려 왕조는 태조 이래 왕위를 이을 세자가 마땅치 않을 경우 세제(世弟, 아우)가 즉위하던 불문율이 있었다. 문종 역시 배다른 형인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따라서 문종의 넷째왕자 왕후도 비록 순서가 늦기는 했으나 형들에 이어 왕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왕후는 왕위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시문(詩文)에도 밝았으며 지혜로웠다. 무엇보다 그는 불교 신앙에 조예가 깊었다. 불교국가 고려의 왕자로서 자연스럽고 다행한 일이었다. 더구나 문종이나 인예태후의 불심은 실로 대단했다.

문종은 왕후가 두 살 되던 무렵 개경 덕적산(德積山)에 흥왕사(興王寺)라는 거대한 원찰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흥왕사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부처님의 가피로 왕실의 부귀와 영화를 기원하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흥왕사 설계도가 나왔을 때 대신들은 고개를 저었다. 사찰의 규모가 2,800여 칸에 이르며 은 427근의 안벽과 금 114근으로 도금한 금탑도 세울 계획이었으니 절이 아니라 또 다른 궁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짓는 절이니 신하들 입장에선 반가울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흥왕사 공사를 진행시켰다. 워낙 거대하고 장엄한 규모이다 보니 흥왕사가 완공되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렸다. 흥왕사가 창건되자 고려 각지의 사찰에서 수행하던 승려들이 이 절로 수행처를 옮기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문종은 그 중 계행(戒行)이 청정한 승려 1,000명을 가려 흥왕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흥왕사 창건 불사가 9년째 접어든 1065년(문종 19년)의 일이다. 하루는 문종이 여러 아들들을 앞세워 흥왕사 현장을 돌아본 후 궁궐로 들어가 자식들의 의중을 물었다. 문종은 먼저 고려 왕실의 불법 수호와 부처님의 가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뒤 여러 아들 중 하나를 출가시킬 계획이 있는데 누가 그 뜻을 따를 것인지 물었다. 훈(훗날의 순종), 운(선종), 옹(숙종) 등 세 형들은 침묵을 지켰지만 후는 기꺼이 답했다.

“폐하! 소자가 출가하고자 합니다.”

“후야, 네가 정말 출가해 스님이 되려느냐?”

“그러하옵니다. 소자는 오래 전부터 출가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장하구나. 짐이 허락하노라.”

어린 나이에 궁궐을 떠나 수행을 결심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후는 그 길을 택했다.

후는 자신의 다짐처럼 열한 살 나이로 개경 안정문(安定門) 밖에 있던 영통사(靈通寺)로 출가했다. 영통사는 본래 태조 왕건이 세운 승복원 자리에 지어진 사찰이었다. 그런 까닭에 태조 이후 고려 왕실과 깊은 인연이 있었고 규모도 컸다. 화엄종 종찰이던 영통사에는 당시 난원(爛圓) 왕사(王師)가 주석했었는데 그가 바로 후의 머리를 깎아준 스승이 되었다.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은 문종에겐 외삼촌이 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문종 입장에서는 후 왕자를 난원의 제자로 출가시키는 게 적잖이 안심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난원 왕사는 당시 화엄학의 대가로서 화엄종의 도승통(都僧統)이란 지위에 있었으니 왕자 출신의 의천 스님을 이끌어줄 자격이 충분한 고승이었다.

의천 스님은 출가자로서의 지혜와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다. 다문제일(多聞第一) 아난이 부처님의 법문과 일거일동을 세세히 기억하고 녹음기처럼 외웠던 것처럼, 의천 스님 또한 한번 읽거나 들었던 일은 좀체 잊지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뜻의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성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의 기억력과 지혜, 학문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열한 살에 비구계를 받은데 이어 2년 만에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라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에 따르면 “(의천이) 출가하여 계를 받았던 11세 때부터 학문을 잠시도 쉬지 않았는데, 장년이 될 무렵에는 더욱 부지런히 힘써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정진했다.”고 한다.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없었던 의천 스님은 훗날 자신의 끈질긴 정진을 돌아보며 시를 짓기도 했다. 〈대각국사 문집〉에 수록된 그 시는 이렇다.

鬢髮如何白
내 머리카락 어째서 이다지도 희었는가.

多因積學勞
학업의 수고로움 쌓이고 또 쌓인 탓이네.

이처럼 의천 스님의 수행정진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초인적이었다. 의천 스님이 13세 나이에 승통이 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생이지지의 지식에다 피나는 정진을 보태 이뤄진 게 분명하다. 물론 부왕과 난원 왕사를 비롯한 여러 고승들의 파격적인 지원과 지도를 받았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해도 그만한 자격이 안 된다면 제아무리 수행을 많이 하고 덕이 높아도 오를 수 없는 지위가 승통이었다.

승통이란 용어는 삼국시대 이래 왕조별로 각기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엔 교종(敎宗)의 승려 중 최고 법계에 오른 이를 승통이라 했다. 출가한 비구가 승과(僧科)에 응시해 교종선(敎宗選)에 합격한 뒤 대선(大選) – 대덕(大德) – 대사(大師) – 중대사(重大師) – 삼중대사(三重大師) – 수좌(首座)를 거친 뒤에야 승통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승통에게는 왕사(王師)나 국사(國師)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사실 의천 스님이 출가한지 2년 만에 승통이 된 것을 요즘 식으로 비유하면 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2년 만에 대학원 과정을 모두 마치고 관직을 얻어 총리의 자리에까지 오른 격이다. 상식적으로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의천 스님의 경우엔 이런 파격이 있었다. 하지만 의천 스님이 매우 지독한 학구파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통사로 출가한 의천 스님이 난원 왕사에게 화엄학에 관한 전반적인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의천 스님은 화엄학을 포함해 경률론 삼장과 선종과 교종 등 불교학의 모든 분야를 파고들어 무불통지의 지식을 갖췄다. 그런가 하면 의천 스님이 쓴 글이나 후학들이 남긴 다양한 기록에 따르면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를 했는지 알 수 있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우리 역사와 불교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저서로 〈서프라이즈 한국사〉, 〈어린이 삼국유사〉, 〈다큐동화로 만나는 한국 근현대사〉, 〈그대 마음이 부처라네〉, 〈시와 소설로 만나는 원감국사〉, 〈붓다가 된 엿장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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