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로병사(270호)

“얼굴 좋아 보이는데 어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친지들로부터 듣는 인사말이다. 친구의 인사말처럼 아픈 곳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처럼 즐거운 만남에서 곧이곧대로 내 병을 이실직고 하듯 일러바칠 이유는 없다. 말을 한데도 뾰족한 수가 없다. 기껏해야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듣는 것 말고는 피차간에 보탬이 없다. 그래서 하는 나만의 대답은 공식처럼 일정하다.

“뭐 늙는 게 병이지.”

이런 압축된 말을 건넨다. 긴 설명은 없어도 정직한 대답이다. 그래서 이런 유의 질문을 받으면 녹음기 틀어 놓듯 반복해서 대답해 준다.

“뭐 늙는 게 병이지.”

사람은 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다. 이 모두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치인 걸 보면 딱히 내가 집착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일생의 생업을 의사로서 지냈다. 남들의 병을 고치는 업종에 종사했다. 어떤 환자들은 나에게 이런 우문을 하기도 한다.

“의사도 병이 들고 죽나요?”

내가 치료한 환자는 모두 정신적 문제로 치료받는 환자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특별한 질문은 아니다. 병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본다. 쉽게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부터 보자.

‘생물체의 온몸 또는 일부분에 생리적으로 이상이 생겨 정상적 활동을 하지 못하거나 아픔을 느끼게 되는 현상’

이란 설명이다. 의학사전에 나와 있는 병의 정의는 어떨까.

‘신체의 부분 조직 장기의 정상적 기능 구조의 장애로 일어나는 일련의 특성적 증상을 가진 일정한 병적 과정 전신 또는 부분을 침범하며 그 병인학(病因學) 병리학 예후는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다.’

국어사전보단 좀 어렵다. 어쨌든 병이란 건강하지 않는 것과 정상이 아닌 것이다.

의사인 나는 동전의 양면처럼 병에 관한 한 두 모습으로 살았다. 병든 남을 치료해 주는 의사로서의 삶과, 내가 환자로서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두 모습이다. 크게 다른 삶이다.

영국의 작가인 그래함 그린(Graham Green, 1904~1991)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없다.”

나의 의사로서의 병을 생각하면 그렇다. 한 환자의 사정을 한 시간 동안 내가 들어줬는데도 “선생님은 내 마음 몰라요.”

라고 한다. 그땐 서운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환자의 말이 옳다. 환자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환자의 진정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과 의사가 된 초기에는 질병에 관심을 가졌었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질병과 환자가 호소하는 내용이 일치하면 흐뭇했다. 마치 명의라도 된 듯 흐뭇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경험이 쌓이면서 차츰 질병보단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병을 앓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적으로 같은 이름의 질병을 앓고 있지만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사뭇 다르다.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각기 다른 성품을 이해하지 못하고, 질병 그 자체만을 이해한다면 반쪽 이해다. 각기 다른 ‘바로 그 사람이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일까?’가 궁금했다. 지금은 사람과 병이 일심동체란 생각이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누구나 다 아는 이런 것조차 경험을 오래 쌓은 지금에 와서야 알았다는 것이 좀 지진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병에 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병도 나에게 온 이상 내 식구다. 망나니 같은 식구다.”

그런 생각으로 병을 대립적으로 내치기보다는 안고 가면서 관리해야 할 존재로 생각했다. 병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치료했던 많은 만성적 정신질환의 경험일 뿐이다. 신체적인 질환에서도 만성적인 경과를 가진 질병은 이에 준할 것이다.

이제 내가 환자로서의 경험을 기억해 본다. 내가 경험했던 질병부터 나열해 본다. 5살 때 장티푸스에 걸렸다. 치료약도 없었던 시절인데 어머니의 철저한 관리 덕분에 살아났다. 초등학교 이후 두드러기가 자주 났다. 고등학교 때 맹장염이 걸려 수술했다. 이후 이렇다 할 병은 없었지만 허약한 체질이었다.

문제는 중년을 넘어서면서 이름 붙은 질병을 많이 앓았다. 치질 수술(치료) · 디스크 수술(치료) · 통풍(치료) · 무릎관절(치료) · 이명 · 담석 · 좌안(실명) · 위궤양(치료) · 장 결핵(치료) · 대장용정(치료) · 전립선비대(치료 중) · 고혈압(치료 중) · 당뇨(치료 중) · 심혈관 협착(대동맥 이식수술) · 두부외상(치료) 등이다. 그 외 소소한 감기 등은 들락날락했다. 여기에서 ‘치료’라고 쓴 것은 치료가 되었다는 것이고 ‘치료 중’은 지금도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는 말이다. 써 놓고 보니 가관이다.

이 가운데 심각했던 세 가지 질병은 어릴 때의 장티푸스, 2002년도의 심장수술, 그리고 2015년의 두부외상이다. 어릴 때의 장티푸스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02년의 심장수술은 관상동맥 협착을 내 팔의 동맥으로 이식했던 수술이다. 무슨 용기인지 심각한 불안은 없었다. 2015년의 두부외상 경험은 나에겐 심각한 수준이었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차고로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 출혈이 심했다. 가족들이 119에 연락을 하고 나서 차고 바닥에 누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도 이렇게 마무리 되는구나.”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내내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뇌 손상이 없이 두부외상 치료로 4주간의 치료를 받고 퇴원을 했다. 외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잘 관리했던 당뇨와 혈압이 곤두박질이다. 이를 안정적 상태로 만들기까지 4주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겪은 세 번의 심각한 병 중 가장 심각했던 건 두부외상이다. 병상에 누워서 간호사나 의사를 쳐다보는 신세가 되어 보니 내가 가운을 입고 환자를 보던 것과는 판이한 느낌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신경이 좀 더 예민해진 느낌이다.

이렇게 의사와 환자로서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나에게는 다음과 같은 투병 기준이 마련되었다.

⑴ 병은 내 식구다. 망나니 같은 식구지만 함께 살아야 한다.

⑵ 함께 살자면 달래야 한다. 망나니를 달래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다.

⑶ 첫째, 주치의의 처방을 모범생처럼 지킨다. 둘째, 병 조절에 해롭다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⑷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다.

 

이 때문일까. 아직은 내 생활에 지장을 줄만큼 극성을 부리지 않는다. 고마운 일이다. 내가 늙음이 병이라고 했듯이 나이 든다는 것은 병이 없더라도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달리 생각하면 병이란 죽음을 이해하게 만드는 고마운 식구이기도 하다.

‘생로병사’ ―  부처님이 생각하신 인간 일생이다. 소소한 즐거움이나 고통들도 있겠지만 요약하면 생로병사다.

부처님도 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보리수 아래에서 6년 넘게 수행하셨다. 부처님처럼 영특하신 분이 6년 넘게 걸린 깨달음인데, 나 같은 미혹의 중생이야 평생이 걸릴 일이다. 불생불사(不生不死)라고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긴 가물가물하다. 평생 남의 병 내 병 할 것 없이 병과 씨름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러니 병은 내 가족일 수밖에 없다. 함께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함께 갈 수 밖에 없다.

이근후

1935년생. 경북의대 졸업. 연세의대·이화의대 교수. 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회장, 란구임상예술학회 회장, 대한법정신의학회 회장. 현 이화여대명예교수. (사)가족아카데미아 이사장. 저서로 〈정신치료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등 3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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