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로병사(270호)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여러 아픔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은 병고(病苦)이다. 특히 늘그막에 찾아오는 병마는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하면서 더욱 가혹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병고이기 때문에 그것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살면서 끔찍한 주변의 병고를 무수히 보아왔다. 특히 가까운 친지나 벗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차라리 사고사나 돌연사가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자주 해 보았다. 그러나 병과 죽음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숙명처럼 나에게 엄습하는 무거운 멍에일 뿐이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자신도 아프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평범한 중생에게 그것은 너무나 고원(高遠)한 관념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염불수행을 통해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훨씬 실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듦이 가혹하기는 하지만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병마와 싸우면서 자신을 관조(觀照)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또 스스로의 허물을 뼈저리게 참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도 ‘골골백년’이라는 다소 희화적인 표현이 있다. 언뜻 병약해 보이는 이들이 아주 건강한 사람보다 훨씬 장수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리거나 조금만 과로를 해도 몸살이 시달리는 이들이 있다. 반면 평생 병원 신세 한 번 져 본 적이 없다고 강인한 체력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약한 사람이 더 오래 사는 것일까. 사람의 몸은 유기체이다. 적당히 쉬고 재충전을 해야 또 다른 하루를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다.

사람의 몸 중에서 죽을 때까지 쉴 수 없는 것은 심장과 기관지뿐이다. 왜 잠을 자야하는가도 이 같은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수면기간 동안 신체의 다른 주요 장기나 관절 등은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감기 잘 걸리는 사람을 예로 들었는데, 누구나 감기에 걸리면 입맛이 뚝 떨어지고 목이 아프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위장계통은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내가 40년 피우던 담배에서 벗어난 것도 지독한 감기 때문이었다. 목이 아파서 담배 연기를 삼킬 수 없어서 일주일 금연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회복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일주일이나 담배를 끊었는데도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감동시켰다. 그동안 금연에 좋다는 모든 처방도 실패했었는데 그 독감 덕분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내가 알던 몇몇 지인들 가운데 일찍 세상을 떠난 이들 중에도 강철 같은 건강 체질이 많이 있다. 즉 그들은 건강을 맹신했고 죽음의 순간까지도 자신은 아무 일 없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끝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물놀이 하다가 익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흔히 수영 미숙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은 물이 무섭기 때문에 무릎까지만 물이 차도 더 이상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러나 물개처럼 수영에 익숙한 이들은 그와 같은 행태가 가소롭고 또 자신의 수영 실력에 자신을 가지기 때문에, 경련이 들거나 쥐가 났을 때 감당할 수가 없다.

젊은 시절의 나는 ‘병’을 우습게 보았었다. 지나칠 정도로 건강에 소심한 이들을 경멸했고 어차피 갈 인생인데 왜 저렇게 몸에 집착할까 하는 안쓰러움도 있었다. 나에게는 오직 ‘마음’ 뿐이었다. 이 마음을 깨쳐야 보살이 될 수 있고, 이 마음자리를 밝혀야만 학문이 완성된다는 생각만으로 살았었다.

어느새 칠십을 넘기고 어디를 가든 ‘어르신’, ‘할아버지’ 소리를 듣는 요즘에야 겨우 몸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선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넘어지면 아프고 과식을 하면 배가 아프다. 고뇌의 긴 밤을 보내면 두통이 엄습하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낼 때는 가슴이 저리다.

그런데 마음은 거짓말의 명수이다. ‘지금 내가 하는 이 잘못은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좀 부끄러운 짓을 했지만 나보다 훨씬 나쁜 인간들이 많을 걸’ 이런 식의 자기합리화와 상대적 만족감으로 허물을 덮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야 나는 마음도 소중하지만 몸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마음이 아무리 소중한들 몸이라는 그릇이 없으면 그저 허공에 떠도는 신기루일 따름이다. 몸과 마음은 균형을 이루고 발전해야 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니다.

그래서 플라톤도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설파하였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세속의 영화에 탐닉하지도 않고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에 빠지지도 않으면서 여래는 중도를 설하노라.”이다. 즉, 몸과 마음은 어느 한 편이 우위에 있는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인연으로 얽힌 중요한 ‘관련’인 것이다.

병고는 끔찍한 일이지만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괴로움 속에 감추어진 자그마한 진실과 긍정성을 찾아야만 한다. 계절의 순환처럼 인생에도 사계절의 흐름이 있다. 젊음은 계절로 치면 타오르는 용광로 같이 저돌적인 여름과도 같다. 병듦은 가을을 넘어 깊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 놓여있다.

이 병듦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내 인생을 지긋이 돌이켜볼 수 있다. 대부분은 후회로움과 아쉬움이지만, 그 음미와 회상의 시간은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참회의 시점이기도 하다. 특히 원한 맺은 인연을 청산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기도 하다. 지나온 인생을 회상해 보면 그때 소중했던 일들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쓴웃음을 짓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결국 가치 있는 인생은 ‘베푸는 삶’이다. 물질이든 정신이든 간에 남을 위해 줄 수 있는 인생이 값진 삶이다.

병든 우리들에게도 아직 한 뼘만큼의 삶의 불꽃이 남아있지 않은가. 나의 한평생이 부질없이 이 한 몸의 영화에만 붙잡혀 있었다면, 이제부터라도 남을 위한 헌신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나의 젊음과 행복이 영원했다면 꿈결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내 인생의 의미가 되살아나고 있지 않은가.

아직 병에 걸리지 않은 분들은 그것에 안도하지 말고 곧 엄습할 병마를 직시해야 한다. 이미 병고를 겪고 있는 분들이라면 담담하게 그 과정을 음미해 보자. 그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이루어진다. 날 때부터 내 몸 안에는 병과 죽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정병조

현 동국대 명예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동 대학 교무처장 · 도서관장 · 부총장, 인도 네루(Nehru) 대학교 초빙교수, 금강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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