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월간금강 연재
백제불교문화 찬란하게 꽃 피운 ‘부여’신심 나는 국토순례(270호)
  • 글·사진 이강식 기자
  • 승인 2018.02.01 15:21
  • 댓글 0
부여군 규암면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능산리사지의 목탑과 법당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2015년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는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한 대한민국의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총 8개의 유적을 문화유산에 등재한다. 한국에서 12번째이며, 충청권에서는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기록된 이 백제문화는 공주시에 2곳(공산성, 송산리 고분군), 부여군 4곳(관북리 유적 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시에 2곳(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으로 불교문화의 정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 백제의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한 ‘부처님 땅 부여’로 신심 나는 국토순례를 떠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하나인 관북리 유적(왕궁터).

백제 멸망 아픔 서린
낙화암과 백마강, 고란사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뺏긴 백제는 수도를 위례성에서 웅진(熊津, 공주)으로 옮긴다. 그리고 26대 성왕은 538년 봄, 수도를 사비성(泗沘城, 부여)으로 천도한다. 이후 백제는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 전성기를 누린다.

부여에는 성왕 대에 건립된 정림사지(사적 제301호), 백제 왕릉군 인근의 능산리사지(사적 제434호), 왕실사찰 왕흥사지(사적 제427호) · 고란사(皐蘭寺) · 무량사를 비롯해 여러 사찰과 절터, 불상 · 탑 · 석등 · 부도 등의 유물이 전한다. 대부분의 불교유적지는 산성이나 왕궁지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와 백제 멸망의 슬픔을 간직한 백마강과 낙화암 등 가야할 곳이 너무 많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백제의 여인들이 몸을 던진 낙화암에서 바라 본 백마강 일원.
고란사 대웅전 뒤편의 암벽에 자라는 고란초.사찰 이름도 고란초에서 유래했다.
고란초가 자라는 절벽 아래의 고란약수.

부여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고란사와 낙화암이었다. 하지만 네비게이션이 안내한 길은 고란사가 아니라 구드래나루터였다. 백마강은 유유히 흘렀고, 철새 떼가 옹기종기 모여 먹이를 먹으며 체력을 비축하고 있었다. 다시 지도를 살펴 고란사로 향했다. 고란사로 가는 길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관북리 유적이 길손을 반긴다. 관북리 유적은 백제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백제의 마지막 도성인 사비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에 금동광배 · 연화문 수막새 · 사람얼굴이 찍힌 토기 · 중국제 자기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각종 건물터와 연못 등을 정비해 놓아 대략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관북리 유적을 둘러보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왕궁을 방어하던 부소산성(사적 제5호) 매표소가 나온다.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 길이 입구다. 매표원이 “어느 길을 가든 한 바퀴 도는 길이니까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고 조언해 주었지만, 오른쪽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걸 보고 왼쪽 길이 시작점임을 짐작하고 그 길로 향했다. 길을 따라 10여 분 쯤 오르면 왼쪽 기슭에 서복사지(西覆寺址, 충청남도기념물 제161호)가 나온다. 관심 없으면 스치기 마련이다. 정비를 해놓았지만, 안내판이 없었으면 사찰 터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오르막길이다. 20여 분 쯤 올랐을까. 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호)과 고란사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나왔다. 학창시절 교과서 배웠던 그 낙화암이었다. 백제 멸망의 아픈 역사가 서린 곳, 3000명이나 되는 궁녀가 바위 위에서 아래의 백마강(白馬江)으로 뛰어내려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바위 낙화암. 밑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낙화암을 뒤로 하고 고란사로 향했다. 내리막길이다. 10여 분 가량 내려가다 보면 알록달록 연등과 법당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옆으로는 나루터가 있고 백마강이 흐른다. 고란사는 절개를 지키려 백마강으로 뛰어든 백제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창건됐다고 한다. ‘고란사’라는 이름은 대웅전 뒷편 바위 틈에 자라는 고란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제시대에는 현재의 고란사 터에 사찰이 아닌 정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왕흥사지 인근에서 바라보면 백마강과 낙화암, 고란사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고란사를 뒤로 하고 부소산성내에 조성된 백제의 왕자들이 걸으며 사색의 시간을 가졌던 길을 지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족히 2시간은 걸리는 꽤 긴 길이었다. 백제의 왕실 사찰이었던 왕흥사지로 향했다. ‘발굴 중, 출입금지’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이었다. 왕흥사지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목탑지 심초석에서 청동제사리합이 발견됐는데, ‘정유년(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세계적 걸작 백제금동대향로
왕의 극락왕생 발원 능산리사지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 옆에는 능산리사지가 있다.이곳에서는 불교와 도교사상이 깃든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돼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왕흥사지를 지나 강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백마강과 낙화암, 고란사, 구드래나루터 등이 눈에 들어왔다. 강변에서 잠시 눈을 감고 울분을 삼키며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에 몸을 던졌을 백제인들이 극락왕생을 빌어봤다. 그 때의 그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건만,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흔적은 오간데 없으니, ‘무상(無常)’의 가르침이 절절히 다가온다.

이곳에서 길을 따라 가면 백제문화단지와 연결된다.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의 왕궁과 능산리사지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약 100만 평의 부지에 17년 간 공사를 진행해 완공, 고분공원 생활문화마을, 하남 위례성 등을 재현해 놓아 볼거리가 다양하다. 능산리사지는 ‘능사’로도 불리는데, 법당과 탑 등이 복원돼 있다. 특히 웅장한 탑이 시선을 압도한다. 법당에는 비구니스님이 관리를 하며 참배객들에게 따뜻한 차를 내어준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 외곽을 방어했던 산성인 나성.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집약해 재현해 놓은 궁궐과 능사 등이 있는 백제문화단지 전경.

백제문화단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제시대의 왕릉으로 전해지는 능산리고분군(사적 제14호)과 부여 나성(羅城, 사적 제58호), 그리고 망자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건립한 능산리사지가 있다. 능산리 고분군에는 모두 7기의 능이 있는데, 제1호분에서는 사신도(四神圖) 벽화가 발견돼 더 유명해졌다. 고분군을 지나 오솔길을 따라 5분 가량 걸으면 나성과 고분군 사이 골짜기에 능산리사지가 터를 잡고 있다.

능산리고분군. 백제시대의 왕릉으로 전해진다.

일탑일금당식의 능산리사지는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가 발견돼 더 유명해졌다. 이 향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선정한 우리 유물 100선에 들 정도로 조형미가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의 정신이 깃든 걸작이다. 또 이곳에서는 1995년 4차 발굴 시 목탑터의 심초석(心礎石)에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국보 제288호)이 출토돼 관심을 끈 백제를 대표하는 절터이기도 하다.

능산리사지에서 위쪽을 바라보면 긴 성벽이 보이는데, 세계문화유산인 부여 나성이다. 청산성, 청마산성과 함께 수도 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했던 산성이다. 산성에서 내려다보면 능산리사지와 부여 외곽 풍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사비시대 대표 사찰 정림사지
설잠 스님 열반한 무량사

정림사지는 백제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사비시대의 가람배치와 석탑 조성 양식 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부여읍 내에도 백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여의 불교유적지가 산재하다. 오층석탑으로 유명한 정림사지 외에도 동남리사지, 군수리사지도 둘러볼 만하다. 정림사지는 백제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사찰로, 당시의 가람배치와 건물기단, 초석, 석탑 조성 양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림사지에 들어서면 가운데 탑이 서 있고, 양쪽으로 건물터가 펼쳐져 있다. 탑 뒤쪽으로는 불상이 봉안된 전각이 있다. 정림사지를 세계 알린 존재는 오층석탑(국보 제9호)이다. 백제시대에 조성된 이 탑은 거의 완벽하게 남아있는 대표적인 백제석탑이다. 그러나 아픈 역사도 몸에 간직하는 비운의 탑이기도 하다. 중국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의 멸망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에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새겨 놓아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소정방이 건립한 평제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탑 뒤의 전각 안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이 있는데, 전체 높이가 5.62m에 이른다. 사지 옆에는 정림사지박물관이 있는데, 지역의 여러 절터에서 발견된 유구들이 전시돼 있다. 절터와 정림사지박물관을 꼼꼼하게 돌아보려면 2시간은 걸린다. 정림사지 인근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 야외에는 불상과 석탑 등의 유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라 말에 창건된 무량사는 설잠 스님(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도량이다.
무량사부도군. 설잠 스님의 부도가 이곳에 있다.

 

부여읍 내에서 40~50분 가량 떨어져 있는 외산면(外山面) 만수산(萬壽山) 남쪽 기슭에 무량사가 있다. 신라시대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무량사는 고승들이 머물면서 선풍을 일으킨 도량이다. 역사가 오래된만큼 경내에는 극락전(보물 제356호), 석등(보물 제233호),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보물 제1565호), 삼전패(보물 제1860호), 영산전(문화재자료 제413호), 당간지주(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등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무량사는 조선시대 생육신이자 〈금오신화〉를 쓴 설잠 스님(매월당 김시습)이 말년을 보낸 사찰로 유명하다. 무량사 경내에는 설잠 스님의 자화상을 모신 전각이 있고, 설잠 스님의 부도는 무량사 입구 왼쪽의 무량사부도군 내에 있다.

이외에도 부여에는 불교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석목리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이 마을 안에 있는 문화유산은 찾는 이가 드물다. 많이 알려진 유적지와 관광지를 가는 것도 좋지만, ‘알려지지 않은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뜻깊은 역사문화 여행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백제시대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바뀌지 않은 부여.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전하는 이 역사문화의 고장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세세생생 역사문화의 도시로 남길 바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제233호).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제185호).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8호).
석목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글·사진 이강식 기자  lks9710@nate.com

행복을 일구는 도량, 격월간 금강(金剛)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글·사진 이강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