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과학(270호)

자연계 모든 변화는 연기(緣起)의 작용
‘자연의 변화가 바탕’이란 공통점

연기법은 불교의 근본법이며 또한이 우주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자연의 근본법이다.회로 기판에부처님의 얼굴을합성한 그래픽 사진.

싯다르타는 출가 후 연기법의 원리를 여실하게 체득한 뒤에 일생동안 이 법을 설하셨다. 불타는 〈연기법경(緣起法經)〉에서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어느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저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다 옳게 깨달음을 이룬 뒤에,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분별하여 가르치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라고 어느 비구의 질문에 답하셨다. 연기법은 불교의 근본법이며 또한 이 우주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자연의 근본법이다.

이에 비해 자연과학은 인간이 사는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법칙성을 연역함으로써 얻게 되는 원리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인간의 생활 속에 이용하는 분야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이 궁구하는 방향에는 자연적인 변화 현상의 기본 원리를 연구하는 분야인 기초과학 분야가 있고, 또 밝혀진 원리를 이용하여 인간 생활에 유용한 물질이나 기술을 개발하는 응용과학 분야가 있다. 예를 들면 기초과학 분야로는 물리학 · 화학 · 천문학 · 지질학 · 생물학 등이 있고, 응용과학 분야로는 기계공학 · 전기공학 · 화학공학 · 건축공학 · 토목공학 등이 있다.

연기법도 자연의 근본법이고 자연과학 역시 자연현상의 원리이므로 둘 다 자연의 변화에 바탕을 둔다. 그렇다면 연기법과 자연과학은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연기법은 특정 종교의 근본 교의(根本敎義)이고, 자연과학은 21세기까지 인간이 이룬 현대 문명의 주체인 현대과학의 모체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도의 과학 시대에 살고 있으며, 종교와 과학은 밖에서 볼 때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불타의 가르침은 법계에 상존하는 근본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경전 속에는 도처에 자연과학의 원리와 부합하는 내용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기법에 깃든 과학성

세상은 변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다.낮인 것 같다가도 황혼에 물들고, 어김없이 밤은 찾아온다. 세상 만물의 생기(生起)와 소멸은 불교든 과학이든한 치 어긋남이 없다.

연기법이라고 하면 누구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십이연기는 연기의 근본 교의를 불안한 인간 존재에 적용함으로써,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과정을 설한 내용으로 불타의 초기 교설인 〈아함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연기법은 불교 전반에 걸친 일관된 사상이지만 원시불교에서 인생 현실에 적용하여 가장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이 ‘십이연기설’이다.

불타 입멸 후 그 가르침의 깊은 뜻을 밝히려는 불교학자들의 논설이 넓고 깊어지면서, 연기론도 시대를 따라 새롭게 발전하여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 아뢰야연기론(阿賴耶緣起論), 진여연기론(眞如緣起論), 법계연기론(法界緣起論)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앞의 세 종류의 논설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위주로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마음의 변화를 깊게 설명한 불교학의 분야이다. 그리고 법계연기는 〈화엄경〉의 중심 사상으로, 우주만유의 본체와 현상이 둘이 아니고 각기 본성을 지켜 서로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어 끝없고 다함이 없는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로서, 현대의 최첨단 과학까지도 다 포용하기 힘든, 연기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나 고도의 현대과학 원리를 일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듯이 법계연기를 현대과학과 관련시켜 바로 논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들 모든 연기론은 부처님의 근본 교설인 연기의 기본법칙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기본 연기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함경〉에는 곳곳에 연기의 원리가 설해져 있다. 잡아함 제12권 〈인연경〉에는 ‘인연법’으로, 〈대공법경〉에는 ‘대공법(大空法)’으로,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과 〈연기법경〉에는 ‘연기법’으로 같은 내용이 다른 이름으로 나타난다. 잡아함에 나타난 연기법의 표현은 아래와 같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

또 중아함(中阿含) 〈다계경(多界經)〉에는 연기법이 아래와 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것으로 인하여 저것이 있고(因此有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無此無彼),
이것이 나면 저것이 나고(此生彼生),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此滅彼滅).

이 원리를 가볍게 이야기한다면 누구나 다 아는 내용이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다. 또한 이 법은 인간 세사(細事)나 인간의 마음작용과 비유하여 정성적(定性的, 물질의 성분이나 성질을 밝히는)으로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주로 논의되어 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깊이 관찰해 보면 현대의 모든 학문들이 추구하는 기본 법칙들을 다 담아내는 원리로 볼 수 있다.

세상의 만물은그 어느 하나도 독립된 개체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인간이 서로 얽히고설켜 있듯이, 자연 역시 마찬가지다. 연기법이 자연과학 이론을 담아낼 수 있는 이유다.

모든 물리학의 원리, 화학반응들과 공업 공정들을 생각해 볼 때 그들도 역시 모두 이 법칙 속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연과학적 분석은 이런 원리에 대하여 그 의미를 정성적으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정량적 표현인 관계방정식이 필요하다.

잡아함의 여러 경들과 〈다계경〉에서 말한 ‘있고 일어남’이 연기의 공간적 개념이라면, 〈다계경〉에서 말한 ‘나고 멸함’은 인연의 시간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어나는 현상이나 변화가 공간적인 2개의 변수로 나타난다면 다음의 식과 같은 함수 관계로 나타낼 수 있다.

y=f(x)

여기서 x는 독립변수이고 y는 종속변수로서, 말하자면 x는 인(因)이 되며 이 x가 있기 때문에 f(x)라는 함수관계의 연(緣)을 따라 과(果)인 저것 즉 y가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f(x)가 x에 의해 a+bx+cx2+ … 와 같이 변화해 간다면 x항의 수에 따라 간단한 관계식으로부터 매우 복잡한 여러 가지 관계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연의 함수관계가 주어질 수 있다.

현대과학에서 우주의 모든 물질은 궁극적으로 소립자(素粒子)로 구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그와 같은 입자는 입자이면서 파동(波動)이기도 하다. 즉 물질이면서 에너지의 한 형태인 것이다. 〈능엄경〉에는 “공(空)이란 법계에 널리 가득하여 움직이지 않고 지수화풍(地水火風)과 같은 모든 물질의 근본 원소를 낳는 근원이며, 그 자체는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어 “큰 것은 대지이고 작은 것은 미진(微塵)이며, 인허진(隣虛塵)은 저 극미(極微)인 변색제상(變色際相)을 일곱 등분하여 쪼갠 것이니, 인허진을 다시 쪼개면 허공이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불교에서 보는 소립자가 가지는 이중성 즉 물질과 에너지로서의 성질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이 공(空)과 허공이 물질세계의 연기의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현상계는 공으로부터 연기하여 비롯된 것이고, 본래 실체는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계의 현실적인 변화도 인(因)이 연(緣)에 의해 과(果)가 주어지는 것이므로 모두 연기의 작용이다.

2600년 전 대중 근기 맞춘 가르침

불타가 열어 보이신 연기법은 여래가 얻은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로 밝게 보신 법계의 근본진리이고, 인간이 연구해 온 자연과학의 원리도 자연현상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얻은 원리이다. 각자(覺者)인 불타가 만약 오늘날에 생존한다면 현대의 과학자들에게는 그 근기에 맞게 현대 과학적 표현과 정량적 관계식을 들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앞에서 논의한 부처님의 근본 교설은 2600년 전 당시 대중의 근기에 맞게 설명한 것이니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좀 더 불타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나아가 수행을 깊이 하여 지혜를 얻음으로써 불교의 과학성을 명확히 밝혀 주길 바란다.

이준

건국대 명예교수. 전북대 화공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마흔에 불교에 입문, 봉선사 통신강원에 입교해 월운 스님 문하에서 수학하며 불교서울전문강당을 졸업했다. 1983년부터 퇴직 때까지 19년 간 건국대 불교학생회 지도교수를 맡았다. 교수불자연합회장과 참여불교재가연대 총회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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