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명론(270호)

한국 석탑 연구에 헌신, 기틀 다져

‘석탑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한국에는 1,000여 기에 달하는 석탑이 현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망라하며 건립되어 있기에, 문헌사(文獻史)에서 찾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까지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따라서 익히 알려진 사서(史書) 외에 또 다른 측면에서의 역사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고, 이에 베풀어진 우수한 균형미와 건축적인 아름다움으로 인해,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파악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유물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석탑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져 일인(日人) 학자들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었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헌신한 분이 바로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이다.

선생은 비록 40세의 나이로 단명하셨지만(1905~1944),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에 있어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업적을 남기셨다.

우리 미술사를 한눈에 꿰찬 혜안과 깊은 통찰력을 지녔던 선생의 연구는 미학에서부터 탑파 · 불상 · 도자 · 회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양과 질적인 면에서 가장 많은 연구 업적을 이룩하신 부분이 바로 한국의 탑파에 대한 연구였고, 이는 〈한국 탑파의 연구〉를 통해 집대성 되었다.

우현 선생에 의해 집필된 이 책의 본문은 단기 4182년 2월 10일에 제자인 황수영(黃壽永, 1918 ~ 2011) 선생에 의해 정리 · 간행되었다. 을유문화사의 ‘한국문화총서 제3집’으로 발간된 이 책은 271쪽 분량으로 전체 내용은 〈조선 탑파의 연구〉라는 제목 하에 기1(期一)과 기2(期二)로 구분되어 있다.

스승의 유고를 정리해 단행본 책으로 발간한 황수영 선생은 기1과 기2 두 부분을 각각 1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서술했다. 기2 부분은 일어(日語)로 작성했는데, 이에 대하여 “조선 탑파에 대한 일인학자들과의 논전(論戰)이며, 그들의 학설을 철저히 비판 정정(訂正)하는 것인 만큼 일본에서 출판하실 예정으로 진행하시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기1과 기2의 두 장으로 구성된 〈한국 탑파의 연구〉는 전체적인 내용인 한국 석탑 양식 계보의 분석에 집중되어 있는데, 기본적인 맥락은 한국에서 발달한 석탑은 ‘목탑의 충실한 재현’에 있음을 기반으로 서술하고 있다.

기1 부분은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목조탑파를 시작으로, 전탑(塼塔) 그리고 석조탑파에 대한 기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1장에 목조탑파를 두었음은 바로 한국 석탑의 기원이 목탑의 충실한 재현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생각된다. 선생은 이를 위해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한 끝에 “현금(現今) 조선에 남아있는 석탑으로선 가장 충실히 목조탑파의 양식을 재현하고 있는 유일의 것”으로 분석했다.

뿐만 아니라 신라석탑의 발전상에서 석탑을 개별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이를 통합해 분석했다. 즉 같은 양식을 지닌 석탑을 일군으로 묶어 양식적인 공통성을 추출했고, 이를 발전시켜 시원기(始原期) → 전형기(典型期) → 정형기(定型期)라는 석탑의 발전법칙을 완성했다. 즉, 조선 석탑의 시원(始原) 형식은 미륵탑(彌勒塔) · 정림탑(定林塔) · 영니산탑(盈尼山塔 : 의성 탑리 오층석탑)의 3기를 설정했다.

이어 전형기 양식에 감은사지(感恩寺址) 동 · 서 삼층석탑과 고선사지(高仙寺址) 삼층석탑을 두었는데, “재래의 시험적이었던 모든 수법이 집성(集成)되어 정돈되었고 신식(新式)의 건축양식을 가미하여 완전히 통일된 석탑 양식으로서의 완체(完體)가 성립된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이후 정형기에 이르러 신라석탑은 완전한 양식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바, 불국사 삼층석탑을 표준으로 설정했고, 시기적으로는 경덕왕대를 중심으로 8세기 중반에 이르러 우리나라 석탑의 양식이 정착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기1의 연구에서 우리나라 석탑 양식 발달사를 정립했다면, 1943년 가을부터 임종 직전까지 집필하신 기2 부분은 한국 석탑의 이론적인 면을 정리한 논문으로 ‘탑파의 의의(意義)’로부터 ‘조선의 공예적 제탑(諸塔)’에 이르는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가람(伽藍) 조영(造營)과 탑당(堂塔) 가치의 변천’과 ‘불사리(佛舍利)와 가람창립 연기(緣起)의 변천’ 부분이다.

‘가람 조영(造營)과 탑당(堂塔) 가치의 변천’에서는 〈삼국사기〉 · 〈삼국유사〉 · 〈해동고승전〉 등의 문헌에 기록된 모든 사찰의 현황을 국가 및 시대별로 추출해 분석한 후, 당시에 진행된 발굴조사 성과를 더해 삼국의 가람배치를 규명하고 있다. 이 결과 고구려에서는 팔각목탑과 함께 3개의 금당이 존재한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배치였음을 밝히고 있다.

더불어 백제는 일탑일금당제(一塔一金堂制)가 확립되었고, 이는 일본의 가람배치에 영향을 주었음도 규명했다. 아울러 미륵사지는 ‘품자형(品字形)’ 가람배치로 추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굴 조사된 결과를 바탕으로 금당과 탑지의 규모를 비교 분석해 “시대가 하강함에 따라서 금당면적에 대한 불탑의 면적이 축소되어 가는 현상”을 밝히고 있다. 결국 삼국시대의 사찰의 조영에서 당(堂) · 탑(塔)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규명했음과 동시에 탑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 하겠다.

아울러 통일신라시대에는 쌍탑가람이 유행했음도 밝히고 있는 바, 이는 “금당(金堂)에 대한 탑의 가치의 저하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쌍탑식 가람의 출현은 설사 그 본류(本流)는 당조(唐朝) 가람 형식의 영향에서 출소(出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관념은 도리어 법화신앙의 유포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라고 보고 있다.

결국 선생은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나는 쌍탑가람이 시대가 흐를수록 탑의 가치가 저하되고 있다는 점과, 법화신앙의 유포라는 양 측면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쌍탑의 출현배경에 경전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서, 석가탑과 다보탑에 “석가여래 상주설법(常住說法) · 다보여래 상주증명(常住證明)”의 논리가 정착된 것으로 보았다.

 

‘불사리(佛舍利)와 가람창립 연기(緣起)의 변천’에서는 삼국시대 사리의 전래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소개해 탑의 건립에는 사리신앙이 필연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대가 지날수록 “일종의 현세이익의 비보(裨補) 관념에 의한 조불(造佛) 조사업(造寺業)도 많이 행하여져”라고 기술해 탑을 건립하는 동기가 다양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선생의 주창은 1960년대 이후 많은 석탑에 대한 해체 보수 시 출토된 탑지를 분석해 볼 때, 그의 연구가 얼마나 정밀했는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탑지의 분석을 통해 석탑의 건립에 국왕 · 왕족 및 귀족 · 호족 · 평민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계층에 의한 참여가 이루어지고, 각 계층의 염원이 깃든 원탑의 건립이 성행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유섭 선생은 한국의 석탑에 양식 계보의 설정으로부터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를 위해 철저한 현지답사는 물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위시해 각종 지리지와 문집류까지 인용해 석탑에 대한 전모를 규명하고 있다. 더불어 석탑에 구현된 아름다움을 미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예술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도 진행했다. 이처럼 양식과 문헌 그리고 미학적인 측면까지 전체를 망라한 연구를 진행한 탓에 석탑이라는 건축물을 역사의 소산이란 인식하에 바라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구 방법론을 완성하고 있다.

고유섭 선생께서 이룩하신 한국 탑파에 대한 연구 업적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는 학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새로운 학설이 발표되면 그리 오래 되지 못해 이를 능가하는 또 다른 견해가 나오는 학문의 풍토를 볼 때 선생께서 정립하신 이론이 60여 년의 세월을 지탱해 오고 있다는 사실은 석탑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했는가를 입증하는 한 대목이라 하겠다.

더불어 선생의 탑파 연구는 일제강점기하에서 우리문화의 암흑기와 같았던 193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기에, 그간의 순수학문적인 평가에서 진일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즉 탑파 연구를 통해 우리의 문화가 강건한 기반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이를 통해 일본보다 더 우수한 문화가 이 땅에 있음을 당시의 지식층은 물론 일반인들에게 전파했다.

그러므로 선생의 학문세계에 대한 평가는 당대(當代)에 활동했던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같은 관점에서 인식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즉 석탑을 비롯한 문화유산을 통해 민족의 기개와 자존심을 높이려 했던 측면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박경식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석주선기념박물관장. 〈우리나라의 석탑〉, 〈한국의 석탑〉, 〈한국의 석등〉, 〈한국 석탑의 양식기원〉 등의 저서와 석조미술 관련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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