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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 삶보다 진한 선물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270호)

복녀 씨, 명옥 씨, 영숙 씨, 미숙 씨!

또 다른 새해가 왔습니다.

우리가 2015년 봄에 처음 만났으니까 그동안 시간이 꽤 많이 흘러갔군요.

당신들을 만난 건 2015년 여름 5월 27일에 5주간 서울 노원구에 있는 마들여성학교에서 문예 학습자를 대상으로 “시 쓰기를 통한 치유인문학”이란 강의를 제의 받았을 때였습니다.

5주 동안이라는 짧은 기간에 시를 이해시키고 시를 쓰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반 우려 반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건 순전히 저의 기우였어요.

한참 메르스가 유행했던 시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빠짐없이 나오는 서른다섯 분의 수강생들을 바라보며 저는 열과 성을 다해 수업을 진행했어요.

눈 깜빡하는 사이 5주라는 시간이 흘렀고 끝나는 날 뒤풀이에서 당신들은 저에게 시를 더 배우고 싶다고 하셨지요.

한글을 겨우 깨우치면서 시를 쓰셨던 당신들을 위해 전 기꺼이 재능 기부하기로 하고 두 번째 수요일과 네 번째 수요일에 만나서 시를 공부했습니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 시 공부였습니다. 어제 일어났던 일, 더 멀게는 어렸을 때의 이야기, 앞으로의 포부 등 그걸 소재로 시를 써오라는 식이었지요.

우리는 공부할 장소가 없어 대학로 카페에서, 날이 좋으면 음식을 싸 갖고 창경궁에서, 비가 오면 막걸리집에서 시를 한 편 한 편 써 모아 시집을 만들었습니다.

시를 쓰는 동안 우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의 감정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깊이 감추었던 서로의 비밀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 글로 펼쳤습니다.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것을 딱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입니다.”라고 소설가 최명희는 말했습니다.

저는 당신들의 어두웠던 삶을 글로 꺼내 세상에 환히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집을 출간하게 되었고, 독지가의 도움으로 시집 출판 기념회를 하고 티브이와 라디오 방송을 타면서 그동안의 당신들 설움을 씻어내었지요. 당신들 삶의 어둠이 글 속에서 빛을 얻게 되었던 순간이었어요.

시집을 내고 난 후 당신들은 글쓰기를 계속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한글을 쓰고 읽기에 불편이 없어졌으니 긴 글에 도전하기로 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긴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벌써 1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복녀 씨는 유방암에 걸리고 영숙 씨는 중학 과정에 진학했으며 미숙 씨는 호텔에 취업했고 명옥 씨는 관절염에 걸렸어도 글쓰기를 계속했습니다.

저는 그녀들을 보며 글이 삶보다 훨씬 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유방암에 걸렸어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복녀 씨!

딸의 이혼에 가슴 아파 울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하는 영숙 씨!

관절염 치료를 받으면서도 힘든 발걸음을 하는 명옥 씨!

한 달에 한 번 쉬는 날을 오로지 글쓰기에 바치는 미숙 씨!

글을 쓸 수 있는 한 그녀들은 암도 관절염도 불행도 시간도 다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최명희 소설가의 말처럼 그녀들의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습니다. 그녀들은 글쓰기를 통해 그녀들에게 일어나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의 힘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에겐 아픔도 불행도 시간도 암의 두려움도 글을 쓸 수 있는 한, 절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녀들에겐 글쓰기가 그녀들의 어두운 삶을 승화시켜 치유하는 과정이었고, 이제는 그녀 자신들의 치유를 넘어 그녀들과 비슷한 다른 이들을 치유할 것으로 믿습니다.

저도 저의 불행이 가장 큰 줄 알았는데 그녀들과 4년째 만나면서 저 자신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녀들의 불행과 비교하면 어림없는데 말입니다.

그녀들은 동사무소나 은행을 가면 은행원이나 동사무소 직원들에게 글을 써달라고 할 때마다 차라리 팔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고 합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글 쓸 줄을 몰라 대신 써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부끄러워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이제 그녀들에겐 글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녀들에게 글이란 긴 세월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가난과 무지를 딛고 일어서게 해준 선물입니다.

복녀 씨, 명옥 씨, 영숙 씨, 미숙 씨!

당신들에겐 글이라는 선물이 있습니다. 현재의 아픔과 불행, 암도 다 선물로 생각하세요. 당신들 어두운 마음에서 불빛 같은 진실한 알맹이를 담고 있는 당신들의 글이 선물입니다.

눈이 몹시 내리는 날, 낙상의 위험을 불구하고 오로지 글 쓰겠다는 일념으로 모이는 당신들! 올해는 그 힘을 모아 책을 만들어서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줍시다.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현재 고려대와 서울디지털대학 초빙교수. 2006년 〈유심〉 신인상,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가 있다.

박미산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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