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올드 마린보이’로 돌아온 진모영 감독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제작했던 진모영 감독이 3년 만에 신작 ‘올드 마린보이’로 돌아왔다. 시사회가 열린 용산CGV에서.

감독 ‘진모영’ 하면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언급하면 ‘아하~’하며 무릎을 칠 것이다. 89세의 소녀감성 할머니와 98세의 로맨티스트 할아버지의 76년간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이 영화는 480만 관객몰이를 하며 독립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그가 3년 만에 신작 독립영화 ‘올드 마린보이’로 돌아왔다. 10월 24일 용산CGV 언론시사회장과 3일 뒤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작업실 ‘창작집단 917’에서 진모영(47) 감독을 만나 그의 삶과 영화에 대해 들어봤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동그란 안경, 검게 그을린 피부, 하관을 가득 채운 콧수염과 턱수염. 영화 개봉을 앞둔 진 감독은 수더분한 행색이었지만 눈빛만은 반짝였다.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 ‘올드 마린보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촬영이 끝났을 무렵인 2013년 11월, 우연히 통영 가는 기차를 탔다가 KTX매거진에서 머구리(재래식 잠수부를 이르는 옛말)를 소재로 한 기사를 봤어요. 첫 페이지에 잠수병으로 하반신 장애를 겪고 있는 이명수 씨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잠수복을 입은 채 배 난간에 한쪽 팔을 얹은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어요.

‘30년간 심해의 식솔들을 얻은 대가로 그는 바다에 두 다리의 자유를 넘겼다. 바다는 그가 심해를 찾을 때만 그 자유를 돌려줬다. 절뚝이는 땅 위에서의 걸음을 잊기 위해 목숨 건 물질을 놓을 수 없는 머구리 이야기.’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두 다리의 자유를 희생한 가장의 이야기를 꼭 한 번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올드 마린보이’는 한 여자의 남편, 두 아들의 아버지가 가족이란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극한직업 머구리로 살아가는 삶을 담고 있다.

전작과 신작 모두 우연찮게 기획을 하게 됐다는 진모영 감독. 하지만 기획이 순조로웠다고 영화촬영마저 순탄하게 진행되진 않는다. 출장에서 돌아와 이명수 씨에게 촬영을 의뢰하고자 연락을 취했지만 그는 잠수병이 악화돼 병원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찾은 인물이 강원도 고성 대진항에서 머구리 일을 하던 탈북자 박명호(52) 씨다.

탈북자여서 연락을 한 건 아니다. 머구리의 인생을, 가족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내놓은 가장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에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마저 촬영을 고사했다. 몇 차례 방송과 언론에 나왔지만 나름 성공한 탈북자로 포장돼 자본주의 우월성 홍보에 이용되는 것 같았다는 게 거절의 이유였다. 한 달에 걸쳐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첫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게 2014년 3월 14일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작품 중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수중촬영 장면이었어요. 머구리를 따라 카메라감독도 산소탱크를 메고 수심 30미터 아래로 들어가야 했거든요.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여덟 시간 배를 탔지만, 안전 상 하루에 공기탱크 30분짜리 3개밖에 허용되지 않았어요.

또 겨울엔 강원도의 혹독한 추위 때문에 10분만 바다에 들어가 있어도 손이 얼어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고, 여름엔 그늘 한 점 없는 배 위에서 땡볕을 몸으로 받아야 했어요. 저는 수면에 반사되는 태양빛으로 인해 백내장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1년을 예정하고 찍었는데 아쉬운 부분이 있어 계속 찍다보니 3년이 흘렀더군요.”

북한에서 20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살았던 주인공 박명호 씨는 11년 전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무동력선을 타고 서해를 통해 남으로 내려왔다. 머구리 일은 군복무 당시 배웠다. 자칫 욕심을 내어 수심 30미터 아래로 내려가면 ‘시베리(감압병)’에 걸려 불구가 되는 직업. 머구리가 10명 중 5명은 포기하고, 3명은 죽고, 1명은 병들고, 단 1명만이 살아남는 극한의 직업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배운 건 가족과 월남(越南) 후 남한에서 정착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동투구 무게만 15kg, 쇳덩이 신발과 앞뒤에 매다는 추, 잠수복 무게를 더해 60kg가 훌쩍 넘는 장비는 바로 한 여자의 남편, 두 아들의 아버지라는 책임감의 무게다. 그래서 영화 ‘올드 마린보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獻辭)’다.

10명 중 5명은 포기하고, 3명은 죽고, 1명은 아프고, 단 1명만 살아남는다는 극한직업 머구리는 수심 30m 해저에서 한 가닥 공기 공급줄에 의지한 채 해산물을 잡아 올리는 심해잠수부다.

열둘을 낳고, 여섯을 잃은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그와의 인터뷰에 전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빼놓을 순 없다. TV 시청을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TV를 치워버렸다는 그는 사무실 컴퓨터로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KBS-인간극장 ‘백발의 연인’ 편을 봤다. 노부부가 한복을 입고 나오는 독특한 모습에 반했는데, 고민 끝에 극장판을 기획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했던 내용을 영화화했고, 국내 관객들에게 다큐멘터리가 비인기 분야란 건 알고 있었기에 흥행에 대한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구순(九旬) 노부부가 보여준 풋풋한 사랑은 그들이 늘 입고 다니던 고운 빛깔의 한복보다 아름다웠고, 연출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드러난 알콩달콩한 금슬과 이별의 아픔은 관객들의 가슴 깊숙한 곳을 울려 눈물샘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문득, 금슬 좋은 노부부의 장수비결이 궁금해졌다.

 

“글쎄요. 사이가 좋으니까 삶이 즐겁고, 그러니까 건강한 생활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도 내복을 입지 않고 사셨어요. 100살이 다 되셨는데도 내복 없이 강원도의 매서운 추위를 견딜 만큼 강한 체력을 지니고 계셨던 거죠. 술은 전혀 하지 않으셨고, 담배는 젊었을 때 조금 피셨다고 해요.

할머니는 소식을 하셨어요. 전형적인 채식주의자셨는데, 할아버지를 위해 육류로 음식을 해도 드시진 않았어요. 어류 중에서는 도루묵과 명태만 드셨죠. 올해로 93세인데 허리가 조금도 굽지 않았고, 종종걸음으로 굉장히 잘 걸어 다니세요. 이런 표현을 하면 안 되겠지만 다람쥐같이 잽싸세요.”

노부부의 사랑이야기는 연출이 없는 다큐멘터리인데도 대사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렸다.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정도 많이 들었을 제작진. 하지만 그들은 할아버지가 세상과 이별하는, 사랑하는 할머니와 이별하는 모습조차도 카메라에 담아야 했다.

혹시 촬영 말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영화 제목을 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는지 물었더니 초기 타이틀 역시 연로한 연세를 감안해 ‘공무도하(公無渡河)’로 지었단다. 집 앞 풍경에서 보이는 다리를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표현한 제목인데, 이 제목을 한글로 순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감독 입장에서 가장 기억에 나는 장면은 무엇일까?

89살 할머니와 98살 할아버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다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관객 480만을 동원하며 독립영화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했다.

“어렵네요. (음~~) 두 분은 혼인해서 자식을 열둘이나 낳았어요. 그런데 그 중 여섯을 먼저 보내야 했지요. 홍역으로 셋을 하늘로 보냈고, 전쟁 통에 셋을 잃었다고 해요. 여느 부모처럼 그게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았나 봐요. 시장에 가면 그 자식들을 잊지 못해 옷이나 양말 따위를 사곤 하셨어요. 제가 찍지는 못했지만 할머니는 가끔 강가에서 당신 부모님과 시부모님을 위해 한복을 사서 태우곤 하셨는데, 자식들의 옷도 그렇게 하늘나라로 보내셨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한 후에는 중단했는데, 할아버지 편에 보내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할아버지가 병석에 누워계시던 어느 날, 밖에 비가 오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헌 옷가지를 가져와 부엌에서 태우며 혼잣말을 하시던 모습도 잊을 수 없네요.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가서 좋은 자리 잡아놓고 데리러 오면 같이 손잡고 가자. 거기서 더 좋게 살자.’”

 
개봉 2년만인 2016년 5월, 서울 서교동 ‘갤러리 아침’에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MOVIE EXHIBITION’이 열렸다. 촬영 당시 사진을 진모영 감독과 관람하는 강계열 할머니.

다큐에서 튀어나온, 오늘날 현신한 부처와 예수

진 감독은 전남대 법학과를 나온 법학도지만, 학창시절 법전(法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진 못했다. 군부정권에 맞서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전남대는 그 선봉에 서 있었고, 그 역시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못했다.

불교와의 인연도 이 당시 시작됐다. 종교와 무관한 집안에서 성장하며 ‘교회에서 아이스크림도 얻어먹어 봤다.’는 그가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건 순전히 친구 덕분이다. ‘혼자가기 무섭다.’는 친구에게 용기를 보태주고자 따라갔다가 얼떨결에 가입했고, 그날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으며 ‘참, 좋은 곳이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자주 다녔다. 성향과도 잘 맞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 경우임을 감안하면 무척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지회장은 물론 지부장도 역임했다. 동아리 선배들은 실천불교에 대해서 가르쳤고, 사회과학에 대해서도 배웠다. 그 둘은 전혀 이질적이지 않았다. 회상하자면 그의 청춘에 있어 황금기였다. 연애도 해봤고, 친구도 두루 사귀었는데 그만해야겠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 취업준비를 할 때는 곤란을 겪어야 했다. 기자를 해보고 싶어 방송아카데미 리포터반에 입학했는데, 원했던 전공이 아니어서 연출반으로 옮겼다. 졸업 후 KBS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어깨너머로 방송을 배웠다. 그리고 나와 프로덕션에서 15년을 일했다. 주로 KBS와 EBS에 프로그램을 제작, 납품했다. 열악한 제작 여건을 이겨내고, 작품을 만들어도 저작권은 방송사에 넘겨야 했다. 이런 불합리를 지켜보며 ‘내 콘텐츠를 만들어 내가 저작권을 소유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제가 직접 제작을 컨트롤하고, 저작권자로써 일을 하려고 독립다큐멘터리를 시작했어요. 2년 전 국정감사 때 참고인으로 출석해 방송가의 비정규직으로 불리는 독립 PD들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증언한 적도 있는데, 이런 문제는 하루빨리 개선돼야 합니다. 독립 PD들은 방송사 제작비의 1/3 정도로 프로그램을 만들면서도 그들에게 제작지휘를 받습니다. 갑을관계에 놓여있다 보니 관행화된 언어폭력에 시달리고, 인격 무시도 당합니다.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작업실 ‘창작집단 917’에서 만난 진모영 감독.
(사진=이강식 기자)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고생해서 만든 저작권을 방송사(공영방송 포함)가 99.9% 가져가는 현실이죠. 우리나라에서 제작하는 다큐나 드라마는 세계 탑수준입니다. 이제 저작권도 영국방송협회(BBC)나 일본방송협회(NHK)처럼 감독이 100% 가질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정부가 적극 나서서 표준 법률을 만들어야 합니다.”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 탓일까? 아니면 지난 20년 간 겪은 갑을관계의 서러움 탓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사회비판적인 정서가 진하게 묻어났다. 그 역시 박근혜 정부 때 만들어진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세월호 진상규명운동 때 서명을 한 게 이유다. 그는 ‘영화 제작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인 장생과 공길이가 ‘윗입’, ‘아랫입’하며 권력에 똥침(?)을 놓았듯이 그 시대의 풍자를 허용하는가의 여부는 사회가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잣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업실에서 자료를 찾고 있는 진 감독.
진 감독이 사용하는 촬영 장비들.

최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드(THAAD)가 배치된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소성리’(감독 박배일)가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다큐는 소외된 지역에 카메라를 대고, 그 목소리를 전한다. 그것은 누군가 비춰줘야 할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이고, 그곳이 어둠에 묻히지 않도록 양지로 이끌어서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바꿔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게 다큐멘터리스트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그는 믿는다.

“다큐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소박한 위인전기 같을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국내외의 선후배(독립PD)들이 만든 수많은 다큐에 그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 2010, 감독 루시워커)’란 다큐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에 있는, 세계 최대의 쓰레기 매립장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 ‘카타도르’에 대한 이야기예요.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 2010, 감독 루시워커)’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
세계 최대 쓰레기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주워 생활하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예술가 빅 무니즈(Vik Muniz)가 쓰레기를 재료로 만든 작품.

사진작가 빅 무니즈는 이곳에서 쓰레기를 재료삼아 작품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그들이 쓰레기 산에 묻었던 꿈과 희망, 인간의 존엄을 되찾게 돕고 있지요. 개인적으로 다큐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습니다. 이런 작품을 보면서 다큐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앞에 현신한, 부처와 예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시대의 풍향계, 다큐멘터리스트 ‘화이팅’

진모영 감독이 추구하는 다큐의 단면을 보여주는 얘기다. 그는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진 감독은 보수적인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받은 바 있다고 털어놨다. 그가 연출한 두 작품이 가정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삶에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삶과 고뇌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또 실존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다큐멘터리스트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발랄하거나, 자유 분망한 주제를 다루지 않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두 편의 영화에서 70여 년을 금슬 좋게 산 부부, 가정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는 가장의 모습을 추적한 건 단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일까? 어쩌면 보다 깊숙한 그의 내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매우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이혼도 경험했습니다. 되돌아보면 당시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저 자신은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 · 할머니와 박명호 씨가 보여준 부부와 가족에 대한 가치들은 고리타분하고, 낡고, 후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살짝 먼지가 쌓여있을 뿐 닦기만 하면 반짝반짝 빛나고, 미래에도 그 가치가 퇴색하지 않을 소중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혼하고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면서 겪은 여러 경험, 가족에 대한 상념들. 제가 어렸고, 번민했던 시절에 할아버지 · 할머니와 박명호 씨를 만났습니다. 이 분들을 통해 부부와 가족에 대한 사랑 얘기를 했었을 수 있고, 그 결핍을 충족하려 한 연장선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는 가끔 ‘당신은 영화를 찍고 나서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됐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상대가 진정으로 궁금해서 한 질문은 아니겠지만, 그 역시 가끔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자답한다. ‘그렇게 대단하진 않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덜 나쁜 남편이 되었고, 덜 나쁜 아빠가 되었다’고.

진 감독은 가끔 ‘당신은 영화를 찍고 나서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됐나요?’라는 질문을 받은 후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자답한다. ‘그렇게 대단하진 않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덜 나쁜 남편이 되었고, 덜 나쁜 아빠가 되었다’고. 머구리 박명호 씨 가족.

그가 앞서 두 작품을 제작한 건 할아버지 같이 멋진 남편이어서도, 박명호 씨처럼 좋은 아빠이거나 헌신하는 가장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부족했던 부분을 그들에게 발견했고, 그런 이유로 출연자들에게 존경심을 갖게 됐으며, 그런 이유로 그들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자 열정을 다해 촬영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 감독은 현재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동문회에 가입,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동문회 선후배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대불련의 힘’이란 이름하에 서울과 춘천 · 마산 등지에서 신작 대관시사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는 ‘대학시절에 동아리 선배들을 통해 불교와 사회를 배웠고, 덕분에 누구보다 건강한 인간이 되어 사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에도 대학생불교연합회 덕을 보고 있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가 만든 두 편의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올드 마린보이’, 그리고 그의 동료들인 독립 PD들이 과거에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고 있는 수많은 다큐는 분명 이 시대 우리 사회를 측정하는 체온계이자 풍향계임에 틀림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 원짜리 김밥 한 줄 입에 문 채 연출과 카메라맨 · 조명기사와 운전사 등 1인 5역을 해내고 있을, 수많은 다큐멘터리스트에게 외친다.

‘독립 PD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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