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눈(269호)

불교적 시각에서 동물의 권리를 생각하는,
반려동물은 행복할까?

“Caesar Is Home”(나(시저)의 집은 여기다.)

2011년 작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말미에 나오는 명대사다. 과학자 윌 로드만의 가정에서 가족처럼 지내던 시저(유인원)는 한 사건으로 유인원 보호시설에 보내지고, 그곳에서 인간이 유인원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유인원들을 이끌고 숲에 도착한다. 자신을 가족처럼 키워준 과학자 윌 로드만의 귓가에 남긴 의미심장한 마지막 한마디.

우리는 ‘모든 생명의 존엄, 모든 존재의 가치’에 대해 논리적으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살아가며 무의식중에 여러 오류를 범한다. 반려동물 1천만 시대. 혹시 우리 가정의 반려동물은 행복할 것이란 믿음 또는 확신을 의심해본 적은 없는가? 야산이나 길가에 핀 야생화를 뿌리째 캐 집안 화분에 심었다면, 그 꽃은 행복할까? 가뭄에 물을 공급받지도 못하고, 뜨거운 땡볕에 축 늘어져 있기보단 온실 같은 편안한 환경에서 자라는 게 행복하리란 생각은 인간의 편견이 아닐까?

사람과 동물의 생명의 무게

〈중경찬잡비유경(衆經撰雜譬喩經)〉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부처님의 전생 설화가 나온다.

자비심이 많은 시비왕(尸毘王)에게 어느 날 비둘기가 와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왕은 비둘기를 숨겨주었다. 그러나 곧 매가 와서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자 시비왕은 매에게 비둘기의 무게만큼 자신의 살을 주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울에 자신의 살을 베어 올려놓았지만 비둘기가 더 무거웠다. 거듭했지만 비둘기가 더 무거워서 결국 자신의 온몸을 모두 올려놓은 뒤에야 비둘기 무게와 같아졌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에서 비둘기의 무게가 몇 kg이었고, 시비왕의 몸무게가 얼마였는지에 현혹돼선 안 된다. 이 설화의 교훈은 ‘비둘기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은 같은 무게라는 것’이다. 즉, ‘모든 생명은 바로 생명 그 자체로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고뇌의 시작은 농경(農耕)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쟁기에 걸려 고통을 받는 벌레, 그리고 그 벌레를 잡아먹는 새, 채찍을 맞아 괴로워하는 소와 뙤약볕에서 땀을 흘리며 밭은 가는 농부를 보면서 어린 싯다르타는 ‘왜 만 생명이 함께 행복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연관된 모든 생명의 해탈 ·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들은 이제 동물에 대한 깊은 연민을 넘어서 그들의 생존에 대한 권리를 깊이 고려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동물은 전생에 윤회를 거듭해 온 인간일 수도 있고, 자신 또한 윤회과정에서 후생(後生)에 동물로 태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들의 생명권이 갖는 동일성의 가르침은 불교에서는 일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권리를 찾기도 어려운데 개나 짐승에게까지 권리를 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100년 전 미국의 노예주인, 아니 그 훨씬 전에 귀족이나 노예주인들이 바로 노예들을 향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상기했으면 한다. 또 1920년 전후 여성의 참정권이 있기 전까지 수많은 남성들이 바로 여성들을 향해 그런 말을 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차별받는 인간은 말할 것이 없지만, 수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탐욕과 식욕을 위해 고통을 받고 제명에 죽지 못한다.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은 연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에게도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고통과 괴로움의 과보로 돌아올 것이다.

가축은 동물일까? 상품일까?

옛날에는 가축을 방목해서 키웠지만 지금은 돼지의 경우, 살을 찌우기 위해 몸을 돌릴 수도 없고, 앉지도 못하는 작은 우리에서 키운다. 서로 물어뜯지 않도록 귀와 꼬리를 잘라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가축은 도살을 위해 키워진다. 누군가의 먹이가 되기 위해 사육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들의 사육환경을 직접 보게 되면, 예외 없이 그 가축을 식용으로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공장형 축산에서 가축은 동물의 대접조차 받지 못한다.

“돼지가 동물이라는 생각을 잊고 그냥 공장의 기계처럼 다뤄라. 짜인 시간표대로 다루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미국의 한 양돈업자의 말이다. 이들은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가축들을 최대한 작은 공간에서 키운다. 한 명이 수천 마리에서 수만 마리의 돼지를 돌봐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좁은 집약적 환경은 가축에겐 최악의 시설이다. 돼지의 경우, 살을 찌우기 위해 몸을 돌릴 수도 없고, 앉지도 못하는 작은 우리에서 키워진다. 그리고 서로 물어뜯지 않도록 귀와 꼬리를 마취 없이 잘라버린다. 바닥은 흙이나 지푸라기 대신에 청소하기 좋게 콘크리트나 철창을 깐다. 양계장에서 태어난 지 며칠 안 되는 암평아리는 서로 쪼지 못하게 부리를 잘라낸다. 소의 경우에는 좁은 공간에서 서로 찔리지 않도록 뿔을 잘라내기도 한다.

양계의 경우 케이지(Cage, 새장)식이나 배터리(Battery, 대량사육 농장)식의 좁은 닭장에서 지내다 보니 각종 질병에 노출되곤 한다. 이런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도록 모든 돼지나 소 · 닭에게는 엄청난 양의 항생제를 투여한다.

소의 경우에도 몸무게를 늘려 육우(肉牛)로 사용하기 위해 성장호르몬을 주입한다.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철분을 제거한 사료를 먹인다. 젖소의 경우 자연 상태보다 더 많은 우유을 생산하기 위해 호르몬제를 주입한다.

더욱이 운송과정에서 이들 가축들은 물이나 휴식조차 제공받지 못해 스트레스와 비좁은 환경, 영양부족 등으로 병들거나 부상을 입고 죽기도 한다. 전 세계 육류의 절반은 이렇게 공장식 축산시설에서 자라고 생산된다.

이러한 상황은 어업분야에서도 다르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어획량이 줄면서 공장형 양식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오늘날 식용어류의 1/3은 양식장에서 길러진다. 이때 기생충 예방을 위해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제를 투입하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물고기 0.5kg을 생산하기 위해 자연산 물고기 2.2kg이 들어간다. 실제로 자연 상태에서 잡힌 물고기의 1/3이 양식 물고기와 가축의 먹이로 사용된다고 한다. 결국 집약적으로 생산된 식용동물들은 창고 같은 공간에 갇혀 지내면서,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하다가 어마어마한 규모로 살육 당한다. 뿐만 아니라 사냥 · 투우 · 로데오 등 동물관련 유혈스포츠와 경마 · 개 경주 · 동물서커스 · 해상공원의 범고래 쇼 · 동물원 등은 동물권의 시각에서 볼 때 심각한 학대와 죽임의 현장이다.

반려동물, 세 집 중 한 집 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은 지렁이도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 살려고 몸부림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동물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한다는 걸 관찰로 확인할 수 있다.

동물보호를 위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물복지(Animal welfare)’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권(Animal Rights)’이라는 개념이다. 동물복지는 동물에게 통증, 고통, 불안이 없는 적당한 서식환경을 제공하여 육체적·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물복지가 결국 ‘인간을 위해서’라는 수단으로의 의미를 지닌다고 비판한다. 인간에게 필요성와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동물이 한 생명으로서 고유한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게 동물권운동가들의 주장이다. 물론 동물권론자들도 방편적으로 동물복지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권리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을 인간의 유용성을 넘어서, 권리라는 시각으로 보면 과거 애완동물로 불리던 반려동물의 현 상황은 필자에게 대단히 불편하다. 현재 애완동물은 거대한 산업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오락용 동물과 관련된 산업 중에 애완동물시장은 스포츠와 사냥 다음으로 가장 크다. 애완용 동물가게 · 동물병원 · 사육사 · 사료제조 등은 이제 엄청난 시장으로 성장하여 반려동물 1천만 시대를 맞고 있다. 대체로 선진국은 두 가구당 한 가구, 일본은 세 가구당 한 가구가 동물을 키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세 가구당 한 가구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있고, 외로운 독신들이나 형제가 없이 혼자 크는 아이들을 위해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는 게 사랑의 감정을 발양하는 방법이라고 권장되기도 한다.

한국펫(pet)산업협회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반려동물 산업의 규모는 약 1조 원이다. 옷을 입히는 의류사업과 동물병원, 반려동물 가게, 여행을 가는 사람들을 위한 애완동물호텔이 성업 중이다. 특히 사료시장은 엄청나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10가구 중 3가구에 달한다. 숫자로는 1천만 가구라니, 아이 있는 집보다 반려동물 있는 집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개와 고양이가 사이좋게 엎드려 있다.

반려동물은 정말로 행복할까?

개인적으로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동물착취일 수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한 동물권운동가는 “인간은 닭 · 돼지 · 거세한 수소를 육체적으로 고기를 섭취하듯, 개 · 고양이 등 애완동물은 감정적으로 섭취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인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애완동물을 이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적적함을 달래주고, 동물은 인간에게 위안이 되어주고, 편안하게 안심을 주는 기능을 하지만, 아무리 자애로운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또는 생활여건상 불가피하게) 동물의 본성을 최소화시키려고 한다.

야생이었다면 생존의 무기가 되었을 발톱을 잘라내고, 이웃집 시끄럽다고 짖지 못하게 성대수술을 시키는가하면, 꼬리를 짧게 자르고, 날개를 고정시키고 있다. 또 샴푸와 향수로 애완동물을 화장시키고, 긁거나 씹거나 영역표시를 하는 본능을 ‘지저분하고 파괴적인 습관’이라며 절제시키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지 않거나 실망시키면 꾸짖거나 벌을 주고, 심지어 내다버려지기도 한다.

결국 애완동물은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자기 결정권을 상실한 채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애완동물의 장래는 전적으로 ‘인간의 선의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사랑과 증오를 투사하며 이들의 생사여탈을 좌우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실제 수많은 반려동물들이 버려지고 있다. 주인의 눈밖에 벗어났기에 당하는 처벌이다. 이렇게 버려진 반려동물의 상황은 정말 끔찍하다. 이런 유기동물들의 30%는 안락사 되고, 20% 정도는 자연사한다. 이렇게 버려지는 이유는 순종만 고집하는 순혈주의, 공동주택의 주거형태, 훈련인식의 부재, 경제적인 부담 등이다. 하지만 이 모든 원인의 바탕에는 낮은 생명의식이 깔려 있다. 같은 공간을 나누고 사는 생명들이 서로 아끼며 공존해야 한다는 생명의식이 형성되지 않는 한 생명이 생명을 앗는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생명(동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애완동물의 사료는 대체로 도살장에서 나온 동물의 폐기물로 만들어진다. 죽었거나 죽어가는, 또는 병들었거나 장애가 있어 인간이 먹기엔 부적합한 동물의 혈액 ·뼈 ·뇌 ·내장 같은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이 동물들은 이미 엄청나게 많이 사육 중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항생제와 촉진제를 주입당한 것들이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점은 인간에게 판매되지 못하는 가축들을 이용해 애완동물의 사료를 만들어 판매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은 공장형 사육시스템을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현재 고양이와 개의 사체로 사료를 만들기도 한다는데, 소를 키우기 위해 죽은 소를 사료로 만들어 먹여 광우병이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반려동물로 인한 사고가 사회 문제가 되자 정부는 대형 반려견의 입마개 착용과 목줄 길이 제한을 법제화하겠다고 밝혔다. 찬
반양론이 엇갈린다. 그만큼 반려동물이 우리의 생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반려동물이나 애완동물을 키우다 유기시키는 행위는 장난감을 구입했다가 싫증이 나서 버리는, 그야말로 동물을 ‘살아있는 장난감’ 취급하는 사람들의 악행이다. 결국 이런 행동은 동물의 삶에 대한 깊은 배려보다는 자신의 기호와 취향을 위해 동물을 이용하는 그릇된 생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같은 공간을 나누고 사는 생명들이 서로 아끼며 공존해야 한다는 생명의식이 형성되지 않는 한 생명이 생명을 앗는 비극은 되풀이될 것이다.

동물보호운동가들은 애완동물가게나 번식업자들과 거래하지 않고 보호소에서 입양할 것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유기된 동물들에게 안정적인 거처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물권자들도 개별동물들의 권리를 위해, 넘쳐나고 있는 개ㆍ고양이를 줄이기 위해 중성화수술은 불요불급(不要不急)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최근 구제역으로 수천 마리가 도살되는 장면을 보았고, 광우병 소의 수입문제가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메운 모습을 기억한다. 또 조류독감, 사스, 최근 DDT계란문제 등은 모두 인간이 생명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한 과보(果報)의 현장이다.

야생멧돼지의 도심 출몰로 인한 소동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2년 전에는 먹이를 찾아 인근 섬에서 바다를 2km나 헤엄쳐 부산에 출몰한 두 가족, 어미 4마리 새끼 7마리는 모두 사살됐다.

생명에 불교적 시각

인간에게 동물을 지배하고 정복하라고 가르친 유일신을 숭배하는 유대·기독교는 인간을 대신하여 짐승을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燔祭物)의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런 가치와 반대로, 불교는 불살생의 계율과 가르침을 갖고 있다. 또한 ‘초목성불론(草木成佛論)’의 생명관을 갖고 있다. 이런 불교관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음에도 오늘날 불교는 생명 문제와 동물권 문제, 채식운동 등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다.

그 이유는 불교의 생명관이 전체적이고 포괄적이어서 개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에 인간과 동일한 포괄적인 권리와 내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만, 개체적 생명과 개별적 생물의 고통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또한 불교는 자각력 있는 동물이라고 해서 자각력 없는 생명체(식물이나 바위 등 무생물)보다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행동의 초점이 집중되지 않고 문제의식이 느슨하다. 그저 교훈적 가치와 윤리 · 도덕 정도로 인지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이제 불교는 전체성을 고려하되 실천에 있어서는 개별 생명을 주목하는 실천적 구체성을 갖추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이 말씀하신 ‘만생명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정토회 내의 환경단체인 〈에코붓다〉의 공동대표와 ‘평화재단’ 등에서 활동했다. 현재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국민농업포럼 이사, 녹색교육센터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