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눈(269호)

해피가 밖에서 낑낑거렸다. 산책 가자는 신호다. 바빠서 며칠 달리기를 못해 답답한가 보다. 반응이 없으니 밥그릇 엎는 소리가 들렸다. 일하다 말고 마당으로 나갔다. 심심했는지 땅을 파 구덩이 안에 들어가 빼꼼 쳐다보고 있다. 땅을 파다가 혼이 나든 말든, 미래의 두려움 없이 주인과 산책하고 교감하고 사랑 받으면 마냥 행복한 귀염둥이다.

저 단순함은 세상을 달관한 무념무상의 수준이다. 무욕 · 무미 · 무취를 보면 개가 사람보다 자연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사람도 산과 들에서 뛰어 노는 걸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까만 동공이 사리라도 나올 듯 맑아 미소를 지으며 벽에 걸려 있던 줄을 손에 쥐니 목을 내밀며 어서 채워 달란다.

대문을 열고 만추의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린 녀석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행복해졌다. 산책을 한다는 건 서로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것, 해피가 풀 냄새를 맡으면 나도 풀 냄새를 맡고, 해피가 벌레를 보고 신기해하면 나 역시 신기해하리라.

‘너로 인해 내가 행복하고 나로 인해 네가 행복하도록 우리 공존하자.’

주유소 앞을 지나는데 기름 넣던 중년 남자가 눈을 흘기며 침을 뱉었다. 해피가 말귀를 알아 들을까봐 공원 쪽으로 서둘러 피해 갔다. 순종도 혼종도 아닌 시골누렁이라고 ‘똥개, 똥개’ 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하게 차별을 한다. 녀석이 곰팡이 피부병과 귓병을 앓아 동물병원을 다녔는데, 간호사들이 소근 대며 ‘똥개 데리고 한 달씩 병원 다니는 사람은 처음 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가슴이 아팠다. 공원에서 만난 다른 순종 견주들이 해피를 자기네 개와 놀지 못하게 한 적도 있고, 애견카페에서는 종이 없다고 안 받아주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사촌 동생의 시골 농장에서 해피를 처음 보았다. 모견(母犬)이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는데 잡종이라 입양이 안 된다며 한 마리만 책임져 달라고 부탁해왔다. 눈에 별이 박힌 듯 또랑또랑한 녀석이 말갛게 쳐다보는 게 무척 귀여워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 데리고 왔다. 처음엔 쉽게 곁을 안주더니 점점 재롱이 늘어났다. 손을 내주고, 배를 발라당 뒤집고,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리며 쫓아다녔다. 요렇게 예쁜 생명이 또 있을까 싶었다.

처음 품에 안겨 입 맞춰 주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우주가 가슴 속으로 들어온 듯 뭉클했다. ‘인정받는 게 이런 거구나.’ 싶어 스스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눈시울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네가 빨강 · 노랑 · 파랑을 잘 구별 못해 다행이야. 엄마는 늙어 화사하지 않은데도 좋아해줘서 고마워. 나는 실은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야. 하지만 너를 통해 늘 자성(自省)하고 훌륭해지도록 노력할게.’

해피랑 산책을 할 땐 주로 아이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간다. 아이들은 개가 순종인지 혼종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이런 속물적인 잣대 대신 이렇게 묻는다.

“이 개는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나 됐어요?”

하지만 어른들의 반응은 너무 대비된다. 입으로 표현까지는 하지 않지만 그들은 행동으로, ‘식용견이군요,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짓나요?’, ‘서울에서 보기 힘든 똥개네.’ 이렇게 비하한다.

해피도 신분을 달고 다니긴 했다. 일 년 동안 모양이 수없이 바뀌더니 아기 때 모습은 오간데 없어지고 누렇고 뻣뻣한 털로 토종견 티를 냈다.

개의 세계는 참으로 잔인했다. 부처님께서는 2600년 전에 생명 있는 것들은 출생과 무관하게 모두 평등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오늘날도 그 벽은 높았다. 몇 장의 지폐로 쉽게 살 수 있어 그런지 순혈을 선호하는 이들로 인해 해피의 권리가 침해당할 때마다 몹시 미안했다. 소형견 위주의 반려견 문화여서 15kg이 넘는 중 · 대형 잡종견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족이 되고 보니 건강하고, 사람과 친화력 좋고, 성격 좋으면 ‘명품 반려견’이란 생각이 드는데, 이 말에 동의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우리 가족들은 해피가 귀하고 존엄한 생명이어서 간식도 ‘휙’ 던져 준 적이 없다. 항상 정갈한 밥그릇에 깨끗이 넣어주었고, 산책길에 비를 만나도 해피에게만은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럼에도 세상 시선이 이런 것을 탓해 무엇 하랴?

요즘은 아침마다 해피의 변을 살피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변이 무르지 않고 단단하고 윤기 있는지, 사람 아기 보듬듯 유심히 살핀다. 냄새 맡느라고 가까이 코를 대도 냄새가 싫지 않으니 일종의 모성애가 우러나오나 보다. 녀석의 몸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조차도 살아있는 생명의 냄새로 느껴져 친숙하고, 목욕하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녀석을 높은 세탁기 위에 올려놓고 씻기면서 바라보면 정말 내 새끼 된 것 같다.

“밥 다 먹었쪄?”

간혹 해피한테 말을 할 때 나도 모르게 혀 짧은 소리를 낸다. 안 그러려고 해도 나만 쳐다보는 녀석을 보면 저절로 말이 그렇게 나와 실소를 한다. 행복한 만큼 보답을 하고 싶은데, 그래서 가끔 ‘너도 행복하지?’ 하고 묻지만 아직 대답은 못 들었다. 반려견의 언어를 습득해야 하는데 표정으로만 짐작하려니 자신이 없을 때도 있다. 해피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을텐데, 우리 집 식구가 되어 불행한 것이라면 큰 죄(업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네가 사람세계에 편입해 왔듯 나도 너의 세계를 이해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보마. 앞으로도 서로 신뢰하고 좋아하면서, 정신적으로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함께 살아가자꾸나.’

마선숙
시인.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시와 문화> 통해 등단. 여류문학인회 주최 제15회 주부백일장 장원, 문예진흥원 주최 제20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장원, 〈저녁의 시〉로 〈불교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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