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명강연(269호)

브라운대학교 2017년 3월 강연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마음챙김 명상가이드 CD는 아마존에서 베스트셀러다.

존 카밧 -진(JON KABAT-ZINN)은 매사추세츠대학 의과대학 명예교수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음챙김에 근거한 스트레스 완화(MBSR) 클리닉(1979년)의 설립자이다. 그가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세계 각국의 기업 · 병원 · 학교 · 교도소 · 군대 · 스포츠 팀 등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의료계뿐 아니라 뇌 과학, 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감과 실질적 도움을 주고 있다. 그동안 인지행동치료협회가 수여하는 ‘뛰어난 동료상(2005)’, 통합의학브레이브웰 자선협회가 주는 ‘통합 의학 개척자상(2007)’, 이탈리아 토리노대학 인지과학센터가 주는 ‘마음과 뇌상(2008)’ 등을 수상했다.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 등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는데, 30여 개국 언어로 번역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국내에서도 2006년 KBS 다큐멘터리 〈마음〉과 2010년 대장경 천년 특집 다큐 〈다르마〉 2부 ‘치유’ 편에 소개된 바 있다. 2011년 영국에서 발행하는 〈왓킨스 리뷰(WATKINS REVIEW)〉에 의해 ‘현존하는 인물 중 영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던 인물이다.

 

2012년 11월 방한, 대한불교진흥원 다보빌딩 법당에서 강연하고 있는 존 카밧진. (사진=월간 불교문화)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non-doing)’,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 자체에 몰입하는 것(dropping into being)’입니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한 생(生)이라는 찰나(刹那)를 어떻게 하면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을 모두 발휘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원이 아닌 통합적 사고

1965년, MIT 매사추세츠 공대에 재학 중이던 저는 학교 알림판에서 강연 홍보문구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일본으로 건너가 출가수행자가 된 필립 카플로(Philip Kapleau)의 ‘선의 세 기둥(Three Pillars of Zen)’이라는 강연이었습니다. 당시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즈음인데, 불안한 세계정세 등 이런저런 이유로 저는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강연에는 주최 측 관계자 두 명과 저를 포함하여 겨우 다섯 명이 참석했습니다. 그 강연에서 저는 그동안 고심하고 있던 문제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해답은 그날 강연의 주제였던 일본불교에서 얻은 게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그 해답은 ‘다르마(dharma)의 깊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겉보기에는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해하는 통합적인 시각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평소 이원론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고, 실제 세상의 많은 것들은 양분화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과 예술을 서로 상반된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잖아요? 제 아버지는 과학자이고 어머니는 예술가인데 말입니다. 저는 이원론적 사고의 우위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습니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 모두가 타고난 능력, 즉 ‘알아차림(awareness)’을 연습하게 해주는 프로그램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훈련을 끊임없이 합니다. 생각하는 힘은 물론 중요한 능력입니다. 하지만 알아차리는 능력 또한 생각하는 능력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능력입니다. 알아차리는 능력은 경험의 숨겨진 모습과 차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여러 활동과 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과의 소원함은 아주 좋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알아차림 훈련을 거친 적이 없는 우리의 경험에는 ‘현재’가 자리 잡을 공간이 없습니다.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과거에 대한 후회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생각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마음속으로 어떤 담론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갇혀 살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모든 것은 엄청난 망상(妄想)이자 무명(無明, 근본 번뇌 · 어리석음)입니다.

존 카밧진은 진정한 의미의 마음챙김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행위”라고 말한다.

햄버거 홍보문구가 된 마음챙김

1980년대만 해도 ‘마음챙김’이나 ‘마음’을 주제로 한 과학적인 논문은 거의 없었습니다. 평균 1년에 0~2편 정도가 발표되었지요. 그런데 2000년을 기점으로 매해 발표되는 논문의 수가 꾸준히 증가해서 지난해(2016년)에는 무려 660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마음챙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다보니 요즘 학생들은 의과대학에 진학하기도 전에 명상을 접합니다. 본인의 임상적 · 신경과학적 방법론을 ‘마음’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명상 경험 등과 접목해 삶과 일을 통합시킵니다.

이렇게 마음챙김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끌게 된 건 바람직하지만, 이제 우리는 ‘마음챙김’이란 문구를 버스광고판에서까지 보곤 합니다. 마음챙김은 증거를 기반으로 한 신뢰할 수 있는 그 무엇, 그 이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햄버거 가게에서 ‘마음챙김’이란 단어를 차용해서 마케팅을 하는 현상을 보면 마음챙김은 이미 어떤 트렌드가 되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은 마음챙김의 철자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저 타인을 따라 공허하게 문구만 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의 마음챙김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이 그 핵심입니다. 마음챙김은 아주 실증적이며, 과학적 근거에 충실한 것이며,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행위입니다. 또한 스스로와 가까워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앞서 마음챙김을 ‘사랑 이야기’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강연에 온 진짜 이유나, 제가 1965년 겨우 다섯 명이 모였던 불교 강연에 간 진짜 이유는 어떤 간절함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하는 세상이 온전하지 않아서 그 한계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그런 간절함입니다.

미국에서 존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관심은 뜨겁다. 강연에서 명상을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

진정한 명상은 ‘매 순간의 최선’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소중히 여겨야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가만히 존재해 보세요. 비유하자면 나무와 같은 상태입니다. 사실 우리도 나무가 속해 있는 세상의 일부이지 않습니까?

핸드폰을 끄고, 깨어있는 상태에 몰입해보세요. 그저 존재하세요. 그저 삶이 펼쳐지는 것을 편안히 느껴볼 수는 없을까요? 여러분의 지각(知覺)이 몸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지 느껴보세요. 또 고요함에 빠져보세요. 새로 발견한 이 영역에 오롯이 머무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마음챙김입니다.

생각의 틀이나 체계 같은 것 없이 그 상태에 머물러보세요. ‘존재하고 있는데,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 하나?’, ‘좋은 명상이었나?’, ‘좌선 도중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정상인가?’ 등의 생각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이런 질문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누가 평가를 하는 것일까요?

알아차림 속에 오롯이 머무르는 방법을 배우고 나면 마음은 항상 하던 일을 할 것입니다. 심해에 파도가 일어도 바다 자체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요. 그저 해면이 일렁이는 것뿐입니다. 더 나은 경험을 할 필요 같은 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체화(體化)’된 알아차림의 힘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 힘은 타인의 본성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질문을 하지 않고 생각의 부산물을 가지고 스스로를 옥죄이기만 합니다.

그 결과 타인과도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꾸리게 됩니다. 진정한 명상수행은 ‘한 순간 한 순간을 정성을 다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과 사회가 가진 여러 불협화음과 같은 조건 속에서도 말입니다.

‘나는 보다 훨씬 더 큰 존재’란 깨달음

저는 1979년 ‘MBSR(마음챙김에 기반한 스트레스 완화·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프로그램을 개시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의료복지 제도가 포용하지 못한 사람들을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을 통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도록 한 시스템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무(無)’와 같이 낯선 것에 도전할지 한 번 확인해보려는 일종의 실험 같은 의도였습니다.

보험회사측도 아주 의아해 했습니다. 방문해보면 환자들이 바닥에 누워있는 등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핵심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생각의 광기에 사로잡힌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나면 무엇을 깨닫나요? 배움은 우리가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삶과 경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해줍니다. 저는 제자신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는 것을 배웁니다. 환자들도 MBSR 요법을 통해 스스로가 ‘암 환자인 나’보다 훨씬 더 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재정비하고 나는 ‘고통’이나, ‘내 꿈’이나, ‘사회적 환경의 결과물’ 등을 넘어서는 존엄하고,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저는 ‘성장’ 또는 ‘치유’라고 부릅니다.

숭산 스님과 틱낫한의 불이(不二)

대학교 재학시절 저는 매일 아침 숭산 스님을 뵈었습니다. 숭산 스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1970년 초 프로비던스(Providence,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의 주도)의 한국인 커뮤니티는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세탁기 수리점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 지역에 정착하셨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브라운 대학교 학생들이 숭산 스님의 법문을 들으러 모여들면서 ‘선 센터’가 설립되었지요. 숭산 스님께서는 일부러 영어를 배우지 않으셨는데 그 덕에 스님의 말씀은 훨씬 더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학생들의 행동거지를 흉내 내시곤 하셨는데,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는 누구인가?”, “몰라요.” 하고 소리치곤 하셨습니다.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해서는 고집해 오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기존의 사고방식은 종종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것은 아주 강력한 힘입니다. 그리고 노력으로 키울 수 있는 기량입니다.

미국 전법 초기 제자들과 함께 한 숭산 스님. 존 카밧진도 대학시절, 숭산 스님과 인연을 맺었다.

인류의 마음은 유아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1만 4,000년 전이였던가요? 이를 400~500세대(世代)로 계산했을 때 그 동안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배움과 성장, 변화와 발전이 있었던 반면 어둠, 전쟁과 끔찍한 재앙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모두 인류의 손에 의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하고나서 우리는 또다시 화해하고 다시 친구가 되었지요. 인류는 오만하게도 스스로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 정의합니다. 라틴어로 ‘아는 존재이자 안다는 것을 아는 존재’ 라는 뜻인데 제 생각엔 별로 옳은 명칭인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정말 그렇게 살아야하니까요.

‘나는 누구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내 인생’, ‘내 직장’, ‘내 몸’이라고 말할 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정말 내 모든 직관, 총체적 존재, 식견 등을 포함하고 있나요? 틀에 갇힌 사고를 넘어 다른 차원의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마주했을 때 위협을 느낍니다. 요즘 미국 정세가 몹시 혼란스럽고 이런 상황은 전 세계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있습니다. 대선 결과가 달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요? 글쎄요. 우리(미국)가 지금 당면한 문제들은 지난해 11월 이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 동안 존재해 온 것입니다.

우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탐 · 진 · 치(貪瞋癡)를 매일 신문에서 봅니다. 우리 역시 매일 탐욕을 느낍니다. 지금 인류는 불협화음 같은 모든 조건 속에서도 인간답게 존재할 방식을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답은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마음챙김 수행은 체화(體化)된 사랑을 연습하는 일입니다. 틱낫한(Thich Nhat Hanh) 스님은 베트남 전쟁 중 시체를 옮기는 스님들에게 길가에 핀 꽃을 보도록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이혜인
부산외국어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영어 · 교육학 · 한국불교를 공부했다. 2013년 초 인도에서 열린 샤카디타 세계불교여성대회에서 통 · 번역을 했던 것을 계기로 불교 번역에 입문했다. 석사 졸업 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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