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나는 국토순례(269호)

‘세존 사리’ 전래 전설과 토속신앙과 만나 불교 뿌리 내린
 

‘제주’

 

제주 원당골에 자리잡은 불탑사 경내에 있는 원당사지 5층 석탑. 고려시대에 조성된 이 5층 석탑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제주 유일의 석탑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신비로운 땅 ‐ 제주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될 만큼 자연환경이 수려한 제주도. 60~80년대에는 모든 신혼부부들이 가고 싶어 하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고, 근래에는 올레길과 오름 등이 인기를 얻으면서 동남아시아 최고의 관광섬이 됐다. 특히 한라산 영실에서 시작된 불교는 제주 고유의 민속과 만나 독특한 신앙으로 자리 잡았으며 육지와 달리 독자적인 문화와 문화유산을 만들었다. 오늘날도 꾸준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제주도의 불교와 문화유산을 찾아 길을 떠난다.

한라산 영실 병풍 바위 인근에서 바라보면 제주의 들판과 바다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남쪽 바다에 솟은 듯, 떠있는 손바닥처럼 큰 섬이 하나 있다. 제주도다. 조선시대까지도 제주도는 죄를 지은 이들의 유배지로 손꼽히는 고립지역이었다. 철창없는 감옥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드날린 추사 김정희도 모진 유배생활을 할 당시, 서체를 갈고 닦는 데 몰두해 추사체를 완성했을 정도로 제주도는 척박한 땅이었다.

제주도로 가려면 비행기 또는 배를 이용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에서 서울 종로구 안국역에서 제주국제공항까지 가는 길을 검색하면 완도항까지 육로로 약 440km, 완도항에서 제주까지 배로 약 100km를 가야한다. 대략 9~10시간가량 소요된다. 비행기는 이에 비해 훨씬 빠르다. 국내 어느 공항에서든, 제주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 소요된다. 이륙부터 착륙까지 포함한 시간이어서 비행시간은 짧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섬이지만, 바다를 건너가야하기에 농담 삼아 ‘해외 여행 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제주도는 하와이에 버금가는 국민관광지인 셈이다. 관광지 이미지가 강하지만 제주도는 태초의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선사시대부터 축적해온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아울러 제주도 고유의 무속과 불교가 만나 제주인들의 삶 속에 녹아든 미륵신앙, 탐라(제주도의 옛 지명)왕국의 발상지인 삼성혈(三姓穴)과 선문대할망 이야기 등 신화와 설화가 가득한 문화의 섬이기도 하다.

한라산 탐방로 영실코스 병풍바위에서 윗세오름으로 향하는 길.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제주불교 발원지 한라산 영실

‘제주도’하면 떠오르는 산, 한라산(漢拏山)이다. 한반도에서 백두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자, 제주인들에게는 신령스런 산이다. 제주불교에도 한라산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제주불교가 한라산 백록담 서쪽 자락의 영실(靈室)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영실에는 마치 500여 명의 나한이 여기저기 서 있는 것처럼 바위가 뾰죽뾰죽 솟아 있는 ‘영실기암’과 제주불교의 발상지 존자암지(尊者庵址)가 자리하고 있다.

영실기암의 500여 개의 바위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나한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오백나한’으로 불리기도 하고, 제주 설화를 따라 ‘오백장군’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실 주차장에서 숲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면 오른쪽 산 곳곳에 뾰죽 솟은 바위들이 보이는데. 이것이 ‘오백나한’이다. 이 골짜기의 웅장한 모습이 석가모니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하던 영축산(靈鷲山)과 닮았다고 해서 영실동이라고 불린다.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한라산 영실의 병풍바위와 초목들이 한가롭다.

영실코스는 자동차로 영실매표소를 지나 영실휴게소에 주차를 하고 오를 수 있다. 이 코스를 오르면 병풍처럼 넓게 펼쳐진 병풍바위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병풍바위를 등 뒤에 두고 앞을 바라보면 왼쪽에 오백나한이 산 능선을 비롯해 산 전체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서 있다. 정면에는 제주의 푸른 바다와 제주인들의 삶터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서쪽 기슭(영실)에 존자암이 있는데, 동굴에 도를 닦는 스님 형상의 돌이 있어 ‘수행동굴’이라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의 존자암은 영실매표소 건너편 입구를 통해 올라갈 수 있는데, 17세기 중반 경 원래의 존자암에서 터를 옮겨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라산 영실에 펼쳐진 병풍바위(왼쪽)와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오백나한’으로 불리는 영실기암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푸른 창공을 자유롭게 유유히 날고 있다.

제주불교 남방에서 전래설
존자암지 · 원당사지 등 유적 남아

제주도에는 불교가 언제 전래됐을까? 제주불교의 전래와 관련해서는 존자암(尊者庵)과 관련한 남방불교 전래설과, 삼국시대에 전래됐다는 북방불교 전래설이 있다. 남방불교 전래설은 ‘불래(佛來)오름’ 아래에 있는 존자암에 전하는 제주 유일의 부도인 석가세존사리탑(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 석가세존사리탑 앞에 설치된 안내문에는 ‘한중일 불교 최초 전래지로서 탐라국 제6존자 발타라존자가 2550여 년 전 인도에서 모셔온 세존사리탑입니다.’는 문구가 있다. 세존사리탑은 제주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전체높이는 190cm다. 그러나 이 부도는 고려 말에서 조선전기에 유행하던 양식인 석종형부도여서 불멸 후 곧바로 전해진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많다.

한라산 영실에 터를 잡은 존자암으로 가는 길. 붉은 단풍과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조화를 이루며 한라산을 물들였다.

존자암의 창건 연대와 관련해서는 충암 김정은이 쓴 〈존자암중수기〉에 ‘존자암은 고(高)·양(梁)·부(夫) 삼성(三姓)이 처음 일어났을 때 비로소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존자암은 탐라국과 시작을 같이 한 역사적인 현장일 것이다.

제주불교의 북방전래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물은 꽤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곽지사지(郭支寺址)에서 삼국시대 도기편, 강림사지(江臨寺址)에서 신라시대 토기편, 고내리사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질그릇, 수정사지(水晶寺址)에서 9~10세기경의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

제주불교는 ‘사찰 5백, 신당 5백’으로 불릴 정도로 융성했었다. 그러나 유물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편이다. 삼양동 원당골 불탑사 경내에 있는 원당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187호)이 대표적인 불교유산이다. 높이는 4m로, 현무암으로 조성된 제주 유일의 석탑이다. 이 탑은 오랜 세월동안 무너진 채 방치돼 있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원래의 자리인 현재의 위치에 복원됐다. 석탑의 북쪽에는 원당사지 법당 터가 남아 있다. 제주도에는 절터가 여러 곳 있지만, 서귀포 법화사지, 제주시 원당사지를 제외하면 제대로 보존되고 있는 곳은 별로 없는 실정이다. 수정사지에서 출토된 초석 등의 유물은 항파두리 항몽 유적지 한켠에 수정사지에서 나온 유물임을 알리는 비석과 함께 전시돼 있다.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는 수정사터에서 출토된 유구들이 전시돼 있다.

원당사 창건 설화에는 기황후가 등장한다. 고려시대 때 원나라로 끌려갔다가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는 태자가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이 때 한 스님이 북두의 명맥이 비추는 삼첩칠봉(三疊七峰)에 사찰을 짓고 탑을 세워 불공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기황후는 풍수가를 동원해 현재의 원당사터를 찾아 절을 짓고 탑을 세워 기도를 드려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제주 서귀포 법화사 경내 뒤편에는 옛 법화사지 건물 터가 남아 있다.

서귀포에 위치한 법화사지(法華寺址, 제주도기념물 제13호)는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와 관련된 사찰이라는 설도 전하지만,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269년(고려 원종 10년)부터 1279년(충렬왕 5년)까지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1653년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3년 발굴조사 당시 10~11세기의 도자기편과 기와편이 발견됐는데, 신축한 대웅전 옆 공간에 전시해 놓았다. 사지(寺址)에는 잡초가 무성해 유구의 형태만 보일 뿐이다.

법화사 대웅전 오른쪽에는 법화사지 발굴 당시 출토된 초석 등 유구가 전시돼 있다.

제주사람들을 지켜준 복신미륵
무속에 깊이 녹은 불교사상

불교는 독자적으로 발전했지만, 제주 고유의 무속과 결합하면서 제주인들의 신앙생활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대표적인 유물로는 복신미륵(福神彌勒)인 동자복(東資福)과 서자복(西資福)이 있으며, 또 화천사(華泉寺) 경내에는 동회천(東回泉) 마을의 제사인 포제(酺祭)를 모시는 석불단(石佛壇)이 있다.

제주사람들은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 남편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고,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못한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미륵불을 세웠다. 제주에서는 미륵불을 ‘자복신(資福神, 재물과 복의 신)’, ‘자복미륵’, ‘큰 어른’으로 부르기도 한다.

제주에서는 미륵불을 ‘자복신(재물과 복의 신)’, ‘자복미륵’, ‘큰 어른’으로 부르기도 한다. 동자복은 만수사萬( 壽寺)에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주택 안에 있다. 높이는 286㎝로 마을의 평안과 어로활동의 안전을 기원하는 석불이다.

동자복(제주 민속문화재 제1호)은 만수사(萬壽寺)에 있었는데, 지금은 개인주택 안에 있다. 높이는 2m 86㎝로 마을의 평안과 어로활동의 안전을 기원하는 석불인데, 정비가 잘 돼 있는 편이다. 제주사람들은 복신미륵이 집안의 액운을 없애주거나 육아(育兒)에 영험이 있다고 믿고 제를 올렸다. 특히 제주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수호하는 기능도 했다고 한다. 미륵불이지만 돌하르방을 닮아 친근한 느낌이 든다.

동자복은 비교적 찾기 수월하지만, 서자복은 내비게이션의 안내만으로는 찾기 어렵다. 인근에 주차해놓고 곳곳이 마을을 다니다보면 ‘서자복’ 푯말이 나온다. 서자복은 옛 해륜사(海輪寺)에 모셨던 것으로 지금은 용화사(龍華寺) 안에 모셔져 있다. 높이는 2m 73㎝로, 서자복 옆에는 높이 75cm의 동자석(童子石)이 수줍은 듯 서 있다.

복신미륵 중 서자복. 서자복은 용화사(옛 해륜사) 안에 모셔져 있다. 옆에는 높이 75cm의 동자석(童子石)이 수줍은 듯 서 있다.

화천사에 있는 ‘동회천 석불단’은 예전에 회천동에 있었던 큰 절이 사라진 뒤 이 마을에 흉변이 생기면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한다. 5구의 석상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미륵이다. 이 석상들의 생김새는 제주 사람들의 얼굴을 닮았다고 한다. 그 중 일부는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는 외계인과 비슷한 생김새다. 이 석불단은 숙종 28년(1702) 이형상 목사가 유교를 제주도에 정착시키려고 ‘절오백 당오백’을 없애면서 유교 이데올로기로 인한 충돌로 무속과 유교, 불교가 혼합된 형태가 됐다. 그래서 다른 마을과 달리 석불열위지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는데, 제물에는 돼지고기를 올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화천사 경내에 있는 동회천 석불단. 5구의 석상이 모셔져 있는데, 불상이라기보다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미륵이다.

제주도에서 무속은 중요한 의례행위다. 제주도에서는 마을의 토지와 주민들의 출생 · 사망 등을 관장하는 마을 수호신을 본향(本鄕), 본향신을 모신 신당을 본향당(本鄕堂)이라고 한다. 제주 곳곳의 본향당에는 송당 본향신의 자손들이 와흘 본향당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탐라국이 시작된 삼성혈
추사유배지 등 유적지 산재

제주에 뿌리내린 불교와 무속은 제주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며 지금도 전승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탐라국의 하늘이 열리면서부터 비롯됐다. 탐라국이 시작된 곳은 삼성혈(사적 제134호)이다. 삼성혈은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高) · 양(梁)· 부(夫) 씨의 시조가 솟아난 3개의 구멍을 말한다. 이 구멍에서 솟아난 탐라국의 세 시조들은 다섯 곡식의 씨앗, 송아지, 망아지를 이끌고 성산읍 온평리(溫坪里)로 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해 농경 생활을 시작했다.

제주사람들은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한림읍 소재 명월성을 비롯해 9개의 진성 등 방어시설을 만들었다. 제주도기념물 제29호 명월성.
탐라국이 시작된 삼성혈. 이곳에서 고·양·부 씨가 나왔다고 전한다.

삼성혈은 탐라국의 건국신화다. 삼성혈에서 시작된 탐라국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주도에는 용담동 고인돌, 고산리 유적지, 삼양동 선사유적지를 비롯한 여러 곳의 선사시대 유적지, 삼별초가 머물며 원나라와 맞서 싸운 항파두리 항몽 유적, 환해장성,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한 명월성을 비롯한 9개의 진성 등의 방어 유적이 즐비하고, 아픔으로 기억되는 4 · 3항쟁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한국서예사에 큰 족적을 남긴 추사 김정희가 유배 생활을 하며 추사체를 완성한 유배지(사적 제487호) 등 둘러봐야 할 유적지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다리는 듯 그 자리에 의연히 서 있다.

제주도에는 선사유적지가 여러 곳 있다. 삼양동에 있는 ‘삼양동 선사유적지’는 비교적 규모가 크다.
삼양동 선사유적지 내에는 고인돌 1기가 보존돼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3 · 1만세 운동이 펼쳐졌을 때 제주인들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조천읍에는 제주도에서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동산이 있다. 이 동산에서 조천 · 신촌 · 함덕리 주민 500~600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구호를 외쳤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제주항일기념관과 3·1운동 기념탑 등이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추사 김정희 유배지에 세워 놓은 김정희 동상. 추사는 이곳에서 추사체를 완성했다.

세계가 인정한 제주의 자연유산

제주는 역사 유적지가 많은 곳이지만, 자연환경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선정됐고, 제주를 상징하는 368개의 오름과 제주의 허파로 불리는 ‘곶자왈’은 탐방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오름은 제주 전역에 분포하지만, 동북부 구좌읍 일대가 으뜸이다. 수많은 오름 중에는 존자암 위쪽의 ‘불래(佛來)오름’과 구좌읍에 있는 ‘성불(成佛)오름’이 불교적인 색채를 띤 오름이다. 이중 성불오름은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데, ‘불도를 닦는 염원적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오름의 모습이 스님이 염불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성불오름’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이 성불오름은 〈탐라지〉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성불악(成佛岳)’, 또 다른 자료에는 ‘성불암(成佛岩)’으로 기록돼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오름에 불교적인 명칭이 붙은 것은 제주 사람들의 정서 속에 불교가 얼마나 깊이 녹아 들어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곶자왈은 제주의 허파로 불리는 곳이다. ‘곶자왈’은 ‘곶’과 ‘자왈’의 합성어로 ‘원시림’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다. 곶자왈은 구좌~성산 지대, 조천 지대, 교래~한남 지대, 애월 지대, 한경-안덕 지대 등 5개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화산지대로 이루어진 곶자왈을 걸으면 태고의 숲을 걷는 느낌이 절로 든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 바위마다 뒤엉킨 덩굴식물과 푸릇푸릇한 이끼가 무심한듯 반기고, 나무가 뿜어내는 맑은 공기는 도심에서 찌든 폐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 상쾌하다. 이것이 제주도의 참 모습이다.

최근 내 ·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 해변 가까이에는 현대식 건물의 카페와 펜션 등이 줄지어 생겨나 예전에 보았던 소박하고 정갈한 제주는 점점 멋을 잃어가고 있다. 자연이 빚은 제주, 이제는 사람들이 나서 제주의 옛 모습을, 제주의 역사를 기억하고 일으켜 세워야 할 때다.

제주의 가을을 대표하는 초목은 억새다.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억새는 피어 있다. 찬란한 햇살을 받으면 하얗게 빛나는 억새의 물결이 바람에 춤을 춘다. 새별오름은 억새가 장관을 이루는 오름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탐방로를 따라 억새를 관람하고 사진을 찍기도 한다.
한라산 영실 존자암자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 제주도에 있는 유일한 부도다.
제주는 바람이 많은 곳이다. 신창리 해변에는 풍력 발전기 여러 기가 설치돼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석불의 얼굴은 제주사람들을 닮았다.
제주에는 말을 키우는 목장이 여러 곳 있다.
곶자왈은 제주의 허파로 불린다. 태초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화순곶자왈의 나무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면 마치 시공간을 뛰어넘어 원시시대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