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269호)

해마다 만나는 끝남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의 끝남으로 처음처럼 살아갑니다.

어느 식탁 위에서 만난 처음 보는 사람들. 무엇인가 기다림에 얼굴을 파묻은 날이 있다면 그날은 편지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끝없이 새로운 이별인 것처럼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부터 손편지를 쓰는 저녁이어도 괜찮을 것입니다.

창밖에는 바람이 불고 창안에는 잠들지 못하는 꽃병이 있습니다. 꽃병이 방안에 있으면서도, 그곳에 꽃이 꽂혀있으면서도, 눈치 채지 못해 꽃을 멀리 떠나 보내야하는 저녁. 날마다 식탁에서 저녁을 우물거리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일 것입니다. 어느 쓸쓸한 12월의 겨울밤 골목길에서 만난 연탄불처럼, 붉은 불빛으로만 살아가야하는 우리의 운명을 따뜻한 스웨터로 감싸주고 싶은 달입니다.

진실로 처음을 위해 이별로 살아가는 12월이 있습니다. 때로는 차디찬 바닥에 등을 대고 밤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구름으로 가득 채워진 바닥의 얘기도 듣는 달입니다. 너무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한 줄의 문장처럼 우리는 아슬아슬하게 문장을 이어갑니다. 그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위대해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생의 관성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이기에 존재하고 이별은 이별이기에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한 방향 차로에서 불안의 순간순간을 버텨내야만 하는 삶입니다.

어떤 광휘와 빛으로 무장한 필기체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구부러지고 삐뚤어져 망가진 손으로 무슨 글인지도 몰라 몇 단어를 넘어가야 이해가 되는 문장이어도 충분합니다. 봄 여름 가을 지나 겨울이 오듯, 해마다 12월이 이별처럼 다가옵니다. 열두 달을 지나온 골목의 바람이 속내 깊은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바람이 골목에도 거리에도 두툼하게 쌓인 나뭇잎을 밀어냅니다. 여름내 견고하게 키워낸 초록의 들숨날숨을, 상한 말이나 슬픈 마음을 그리고 바닥에 몸을 낮춘 몸짓을 아득하게 더듬어 갑니다.

진종일 무거운 발자국을 앞으로 밀어내는 12월입니다. 고단한 가슴에서 걸망도 내려놓고 조금씩 차분해집니다. 12월의 식탁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한 편 한 편 수고한 목록을 읽어줍니다. 꽃피기 전 바람이 나뭇가지의 가슴팍을 왜 파고들었는가를 들려줍니다. 봄은 겨울이 있어 가벼워지고 별은 어둠이 있기에 밝아집니다.

우리의 달력에는 12월이 있습니다. 12월은 끝나는 달이 아니라 시작하는 달일 것입니다. 올해는 이것밖에 절망을 가진 적이 없다거나, 올해는 더 많은 아픔을 기억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이런 생각들이 위안을 대신합니다.

고맙다는 진솔한 편지를 누군가에게 쓰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기다리는, 또는 나를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환한 미소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창밖에는 눈치 채지 못한 나무들이 불빛에서 서성거립니다. 밤새도록 알몸으로 흔들리며 헤어져야할 것들과 다시 만나야할 것들을 어둠에서 품고 흔들립니다.

해마다 만나는 이별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의 이별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어느 근사하게 차려진 식탁의 촛불로 수고한 당신을 초대하는 12월이 있습니다. 이별이 이별로, 사랑이 사랑으로, 그래서 끝과 시작이 하나의 끈으로 그리하여 살아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느끼도록 12월을 믿고 건너갑니다.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하나로 회귀된다.”는 불타의 말씀이 생각나는 12월입니다. 해마다 만나는 사람처럼 따뜻한 편지의 시작과 끝으로 당신을 묶어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한성희
서울출생.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졸업. 2009년 계간〈시평〉 등단,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15년 시집 푸른숲우체국장, 2016년 세종도서문학나눔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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