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단상(269호)

# 도심과 아파트단지를 가리지 않고 오토바이들이 인도(人道)를 내달린다. ‘뚜벅이족’들은 대부분 이 질주의 위험성에 공감할 것이다. 달려서는 안 되는 길이란 걸 알기 때문인지, 클랙슨을 울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소음기를 통해 토해지는 굉음은 보행자에게 위협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도로교통법 상 오토바이가 불가피하게 인도를 지나야 할 경우에는 시동을 끈 상태로 끌고 가야 한다. 그런데 최근 수년 간 이렇게 교통법규를 지키는 운전자를 본 기억은 없다. 이런 이유로 범칙금을 발부하는 경찰관 역시 보지 못했다.

# 얼마 전부터 동네 전철 역사의 주변 환경개선 사업을 시작했다. 노점상이 있던 자리, 불법 주정차가 자행돼 지저분하던 자리가 새로 단장됐다. 길은 넓어졌고, 말끔해졌다.

그런데 노점에 가려있던 전봇대 하나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전봇대를 중심으로, 1톤 트럭 하나를 채울 분량의 쓰레기가 모여 있었다. 한 사람, 한 가게에서 버린 쓰레기는 아닐 것이다. 누군가 처음 버렸을 테고, 다음 사람은 따라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모인 쓰레기, 일종의 ‘깨진 유리창 법칙’이다.

# 한 때 경범죄에 대한 처벌이 매서웠다. 무단횡단 하는 사람을 쫓아가 범칙금통지서를 발부했고,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도 벌금을 내야 했다.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침을 뱉는 행위도 단속 대상이었다.

우리나라 자동차 대수가 2015년 2,100만대, 오토바이는 지난해 220만대를 넘어섰다. 도심의 팽창과 압축도 극에 달하고 있다. 포화상태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요가 아닌, 자발(自發)적으로 법규를 준수하는 선진국민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 몇 해 전, 학술회의 취재 차 동국대학교에 갔다가 오랜만에 학생식당 상록원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그런데 식판을 들고, 빈자리를 찾다가 우연히 마주한 한 장면에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장삼의 밤색 깃으로 보아 사미승이 분명했다. 1학년, 많아야 2학년 정도로 보이는 동안(童顔)의 스님은 늘어진 장삼 소매 자락을 살짝 걷어 올린 채 한손엔 나이프, 한손엔 포크를 쥐고 품위 있게 돈가스를 썰고 있었다. 육식을 금하는 종립대학의 식당에서 본 그 장면, 당당함 때문일까? 식당 내 그 누구도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 “비록 사람이 백 년을 살아도 계(戒)를 어기고 마음의 고요를 잃고 살면, 하루를 살아도 계를 지키며 마음 고요히 사는 것만 못하다.”

- 〈법구경〉

계율은 경전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초기 불교와 중국 전래 후의 계가 차이 있고,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계도 같지 않다. 특히 성문(成文)화 된 계율과 무관하게 관습화된 계율이 더욱 그렇다.

일례로 남방불교는 먹을 것을 비롯한 생필품을 탁발을 통해 조달하고, 육식을 허용한다. 북방불교(대승불교)는 출가자가 돈을 지니고 사용하며, 육식의 허용은 종단별로 상이하다.

# 어느 국가, 어느 종단의 계가 더 훌륭한지는 논외다. 지금쯤 비구계를 수지했을 그 스님을 탓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다. 계를 받았으면 지켜야 한다는 원론(原論)을 망각하고 있는, 나를 포함한 한국불교의 신자들을 향한 자성(自省)이다.

불교는 승단 구성원의 지계(持戒)를 통해 존숭된다. 그러므로 악법(불합리한 계율)도 지켜야 한다. 못 지킬 악법이라면 지킬 수 있도록 개정을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는 ‘돈가스 한 번 먹은 걸로~’라고 말할 수 있다. 친한 스님에게 육류와 곡차를 대접하는 걸 미덕 삼는 이가 적지 않다. 비불교인의 눈에 ‘가볍다’는 이유로 교통법규를 당당히 어기고, 보이지 않는다며 전봇대에 휴지는 버리는 사람으로 비칠까 우려스럽다.

# 계는 가벼운 계[輕戒]와 무거운 계[重戒]가 있다. ‘바늘 도둑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가벼운 계를 자주 어기다보면 무거운 계의 무게감도 차츰 사라지게 된다.

‘끓는 물속의 개구리(boiling frog)’ 실험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물속 개구리는 물의 온도 상승을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냄비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다. 계의 엄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불자는 냄비 속 개구리와 다름 아니다.

지계는 습관이다. 지켜도 그만, 어겨도 그만이라면 어찌 ‘계’라 할 수 있을까? 한국불교 사부대중 모두 지계가 습관이 된다면, 감소한 300만 불교인구는 5년 뒤 쉽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