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5일 제가 살고 있는 포항지역에 진도 5.4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작년 9월 경주에 이어 이번에 포항에서도 지진이 발생함으로써 국민들의 불안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포항시재난안전대책본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인해 이재민이 약 1,400명에 달하고 1만 4,000여 건의 시설물 피해가 있었으며, 피해액도 총 775억 9,600만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문화재 피해도 잇달아 국가지정문화재 11건과 시도지정문화재 20건 등 총 31건의 문화재가 지진으로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강진 발생으로 초유의 사태도 일어났습니다. 전국수능시험이 일주일 연기돼 23일 치러진 것입니다.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포항 시내 12개 고사장에 소방관, 경찰관, 건축구조 기술자 등 총 156명의 안전요원을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1,400명의 지진 이재민들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학교와 복지시설 등 13개소에 대피 중에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포항시민들이 지진의 여파로 인한 공포 때문에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는 이재민들에 대한 피해복구지원과 시민들의 트라우마 처방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만 보다 효과적인 성취를 이뤄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국민들의 한결같은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실제로 사회 각계에서는 포항지진피해를 돕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정계와 재계, 관계는 물론 각급 사회기관들도 앞다투어 포항시민을 돕고자 정성을 보태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우리 종단은 물론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와 이웃 종교계도 크고 작은 자비의 손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강추위로 아픔이 더한 이재민들은 각계의 온정에 다소의 위로를 느끼고 있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생이 사는 세계를 일러 사바세계(娑婆世界)라 부릅니다. 고통과 기쁨이 뒤섞인 사바세계는 중생들이 그야말로 힘겹게 살아가는 현장으로 고해(苦海)로 표현됩니다. 소란과 혼란이 끊이지 않거니와 각종 재해와 질병으로 고통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러한 고해의 세상에서 중생을 행복한 세계로 이끌고자 했던 분이 부처님이며, 그 사상을 담고 있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와 중생구제를 말로만 외치는 불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비와 중생구제는 현실 속으로 뛰어들 때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들의 아픔과 함께 하므로 자비심이 채워지는 것이며, 중생들이 원하는 바를 알게 되므로 원력의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번 포항 지진은 우리 중생의 삶이 이런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단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연재해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오히려 배워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인간이 불이(不二)의 관계임을 깨닫게 된다면 재해로 인한 고통과 피해를 줄여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우주 삼라만상에서 독립된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제법무아는 곧 고통과 기쁨도 함께 나눠야 할 가치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공업중생(共業衆生)의 운명입니다. 따라서 이번 지진 이재민들에 대해 그들만의 아픔이 아니라 곧 우리 모두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예로부터 공업중생의 처지에서 이런 저런 재난에 대비해 사회복지사업을 펼쳤던 스님들이 있습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파손된 다리를 고쳐주거나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스님들, 또 길가에 버려진 시체를 수습해 무덤에 안장해주는 스님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사람들은 선심승(善心僧) 또는 자비승(慈悲僧)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전해지는 이야기입니다. 한 자비승이 있었는데 초라한 거지행색에 지나지 않았으나 다리나 길, 그리고 우물 등을 수리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일도 아니었지만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재상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자비승이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중이면 산 속에 들어가 도나 닦을 일이지, 어찌 세상에 있으면서 다리나 도로, 우물 등을 수리하는 작은 일을 하고 다니는가?” 물었습니다. 이에 자비승이 웃으며 답했습니다.
“젊었을 때 스승이 시키는대로 산중에 들어가 10년 고행을 했지만 도를 깨닫기는커녕 아무런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화엄경〉을 백 번 읽으면 도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해 그리 했지만 역시 보람이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 나라에 보답하고 중생에게 이익될 일을 찾다보니 다리, 도로, 우물 등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난 그 공덕을 백성과 나누고 있으니 보람이 매우 크다.”
지진으로 깊은 시름에 잠긴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비승처럼 내 자신이 그들과 하나라는 인식으로 응원하고 격려한다면 강진 피해는 이른 시일 내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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