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가지고 있는 시
정서 치유에 활용하면
망각과 회상 우울 치료 도움

나무는 사계절의 문학이다. 봄에서 한여름의 나무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저장한 창고라면, 가을에서 겨울의 나무는 담백한 좌정 삼매에 이르는 노정의 시(詩)일 것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고 붉은 잎으로 장엄한 나무가 삶의 곡절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면, 회색 대기에 마른가지를 드리운 채 우뚝 선 나무는 서사를 은닉한 하나의 은유와 상징이 된다.

인간은 존재방식에서 나무를 닮고 시와 소설의 양식을 따른다. 시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사를 은닉하고, 상징과 은유로 깃든다. 문학은 인간의 삶을 다루고 공감하며 가슴의 공명을 호소한다. 아름다움과 진실에 대한 갈망, 혼란스러운 경험세계에 대한 독백과 참구로 삶의 의미를 찾고자하는 상상의 거울을 드리운다.

문학이 치유가 될 수 있었던 역사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전하는 카타르시스로서 우리 마음에 고여 있던 두려움과 연민을 적당량 배출하거나 메마른 서정을 공급 받는다는 논리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계절과 절기에 순응하며 살았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 깃든 다양한 어휘의 전통에서 언어의 시적 변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겨울의 초입을 알리는 입동(立冬), 소설(小雪), 십이월에 자리한 동지(冬至) 등은 계절을 살피는 지혜와 서정이 담겼다. 입동과 소설, 동지 등은 하나의 이야기가 깃든 시가 되어, 이슬이 서리로 바뀌며 겨울이 일어서고(立冬)/ 살포시 눈발 쌓이며(小雪)/ 대지는 겨울로 깊어지는 것(冬至)이다.

말이 함의한 이야기와 상징은 정서적 치유의 힘이 있다. 정서 치유에서 비극의 공포와 연민의 카타르시스와 희극의 웃음이 주는 거리두기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제는 문학치유를 통해 우리의 정서상태를 객관화하며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지금-여기’에서 깨어있는 자기인식의 말법을 배울 수 있다.

올해 학교 강단에서 ‘문학치료상담’ 시간에 ‘시인과의 만남’을 주제로 두 차례 특강을 가졌다.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는 두 분의 시인을 초청해서 문학치유 전공생들과 공감을 나누며 치유의 경험들을 공유했다. 만학의 노정이 건저올린 이야기는 시가 되고, 인간이 시임을 증명한다. 가장 큰 성과는 ‘인간이 바로 문학이며 문학이 곧 인간’이라는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문학치유는 사람도 문학으로 보며, 치료자와 참여자가 작품을 같이 이해하고 나누는 상호작용이다. 개인적인 치유의 기능에 머물러 있던 치유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확대된 것이다.

개인으로서 ‘나’는 공동체에서 우리가 된다. 주관적 경험의 객관화가 문학 작품의 보편성을 확립하는 핵심이듯, ‘나’가 ‘너’가 되고, ‘너’가 ‘나’가 되는 동체대비가 문학의 길이다. ‘나’를 표현하는 고졸한 어휘와 지난한 구술, 극적인 전개방식은 나무의 사계절을 닮았다. 눈에 보이는 사실(fact)만이 진실이 아니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상한 인간이지만, 강렬한 여름의 서정이 담긴 원색과 출가 수행자들이 즐기는 무채색의 의복 등 ‘나’를 표현하는 비주얼은 일상의 만남에서 70% 이상의 영향력을 갖는다고 한다. 시를 감상하며 시적 인간으로 다시 깨어나, 자신을 자각하고 시가 되는 인간의 길을 가을과 겨울 사이의 교량에서 읽는다. 이 점에서 시는 망각과 회상의 우울을 딛고, 상실의 늪에서 아련함의 추억과 서정의 힘을 길러준다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