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불교국가 미얀마
소수인종 로힝야족 탄압
불자들에게 실망감 안겨

미얀마에서 소수인종 그룹인 로힝야족에 대해 인종청소 수준의 말살이 자행되고 있다. 그 배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치여사가 있다. 미얀마정부의 실권자인 수치여사는 침묵 일관으로 사실상 로힝야족 탄압을 묵인하고 있다는 보도가 뒤따르고 있다. 이 기사들은 불자들이 당혹감을 지울 수 없게 한다.

미얀마는 전형적 불교국가가 아닌가? 심지어 50년대 우누정권은 불교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자본주의 병폐를 극복하려 했다. 불교적 공동체 삶을 원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맑시즘에 대해 본능적인 의구심을 지닌 우리를 놀라게 한 기억이 있다.

식민통치의 결과인 로힝야족은 그대로 버마의 열악한 변경지역에 머물게 되었고, 주변 미얀마인들과의 공생이 문제가 되었다. 로힝야족에 대한 시선은 달가울 수 없었다. 미얀마에서 로힝야족이 겪는 비극적 처지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차별과 탄압은 특히 불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더욱 실망감이 컸다.

수치여사의 남편인 마이클 아리스(Michael Aries)는 티벳불교 전공자로 수치여사가 연금당하고 있을 때 하바드에 와서 불교강의를 하고 있어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한 마디로 모든 면이 불교와 연관된 수치여사의 정권에서 이런 인종말살의 폭력이 자행된다는 일은 상상 할 수가 없다. 자비와 관용을 표방하는 불교에서 이런 폭력이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불자들이 그토록 귀중하게 여기는 비폭력과 관용은 사라진 것인가? “불교는 배반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불교역시 과거 기독교나 이슬람이 자행했던 폭력에 동참한 것은 아닌가하고 개탄하게 된다.

우리는 군사적 폭력이 자비로 전환되는 전형적인 예로 아쇼카왕의 불교적 선정(善政)을 떠올린다. 칼링가 전쟁의 무참한 살육전 이후 폭악 군주로부터 정의와 자비의 제왕으로 변신한 것이 아쇼카왕이었다. 소위 그는 힘과 살육으로만 제패하려던 현실을 달리보기 시작한 것이다. “달리본다”는 계기가 그에게 왔다. 이 불교적 “달리보기”로 정치 현장을 풀어갔다. 곧 자신이 몸소 참여한 불교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쇼카왕 비명에서 그는 종교 간의 갈등을 포용과 공생의 관계로 바꾸고 현실정치에서의 정치와 종교의 상관관계를 잘 매듭짓고 있다. 불교교설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현장에 어떻게 적응시키는가의 문제를 몸소 다룬 것이다. 아쇼카왕 자신이 불교의 담지자가 된 것이다.

외신을 통해 전달되는 곤혹스러운 정치현장들이 우리 앞에 있고, 그것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의 요구만이 불자들의 결단의 태도를 기다린다. 곧 아쇼카왕이거나 서산·사명대사 같은 불법의 담지자들의 구체적 참여를 기다리는 것이다. 따라서 미얀마와 수치여사 가계의 불교정신을 비추어 보아도 이런 인종청소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종교의 다름, 종족의 차이를 부추기며 마치 적대적인 세력의 길항관계로 이끌어가는 의도 역시 중단되어야한다.

외신이 전하는 미얀마사태를 바라보며 불교의 이념이 얼마나 공허해질 수 있고, 또 한 사람의 불자의 참여가 “불교의 배반”을 역전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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