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오방색을 음미하다(268호)

송광사 대웅보전의 단청.

色의 파노라마

정서적으로 느끼는 계절의 변화는 색으로부터 온다. 그 중에서도 가을이 주는 색감은 풍요와 쇠락의 파노라마를 펼치며 인간을 사색적으로 이끈다. 금(金) 기운이 왕성한 가을은 만물이 성장을 멈추고 단단하게 안으로 응축하여 결실을 맺는 수렴의 계절이다. 흙과 물, 볕과 바람(地水火風)의 기운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기나긴 변화의 시간들이 열매로써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침에는 안개 피고 밤이면 이슬 내려 온갖 곡식 여물게 하네. 백설 같은 목화송이, 산호 같은 빨간 고추열매 처마에 널었으니 가을볕이 맑고 밝구나.”

〈농가월령가〉에서는 가을날 농촌 정경을 눈에 선하게 그렸다. 햇살은 따갑지만 무덥지 않고, 잠자리가 어지러이 날아도 하늘은 드높다. 들녘마다 황금 벼가 출렁이고 고추, 사과는 빨갛게 익어가니, 녹음과 바다를 그렸던 초록 · 파랑의 여름 색이 조금씩 노랑과 빨강의 가을 색으로 채색되어간다.

그런가하면 오곡백과를 거두고 단풍이 무르익어 가을이 절정을 이루는 10월의 한편에서는, 찬이슬이 맺히고 서리가 내리는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이 든다. 어느 농사꾼은,

“아침에 일어나보면 하룻밤 새 들판이 바뀐다. 된서리 한방에 푸르던 잎들이 홀딱 데쳐진 듯 누렇게 변한다.”며, 가을의 마지막 절기 상강을 하룻밤 새 들판의 색깔이 바뀌는 시점이라 노래했다. 이즈음이면 가을추위가 제법 깊어지고, 비라도 내리고 난 새벽이면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추위가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음력 9월을 달리 현월(玄月)이라고도 부르니 만물이 생명을 다해 그 색이 검게 변함을 뜻한다.

이처럼 우주만물은 한순간도 머묾 없이 시시각각 변하며 변화의 코드로 색깔을 사용한다. 〈문록(文錄)〉에

“산속 스님은 날짜 세는 법을 모르니 잎 하나 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왔음을 안다.”고 했듯이, 창밖의 나뭇잎 색깔에서 우리는 생겨나 사라지는 이치, 그것이 다시금 순환하는 이치를 읽는다. 산자락마다 가을법회를 열어 불법을 밝히는 소식이 들려오니, 지금은 산중사찰의 환희로움 속에 가을 색을 흠뻑 느끼면 될 일이다.

불교의식 때 치는 법고(法鼓).

오방색의 전통문화

동양의 전통색은 음양오행사상에 따른 오방색(五方色)이 근간을 이룬다. 태초에 음양(陰陽)의 두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음과 양이 목(木) · 화(火) · 토(土) · 금(金) · 수(水)의 다섯 원소인 오행(五行)을 생산하였다. 오행은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요소로 각각의 기운은 다섯 방위, 다섯 색깔과 짝을 이룬다. 이에 동방은 목 기운을 지닌 청(靑), 남방은 화 기운의 적(赤), 중앙은 토 기운의 황(黃), 서방은 금 기운의 백(白), 북방은 수 기운의 흑(黑)이 우주의 이치를 갖춘 오방색 · 오색으로 배치되었다.

오행은 만물의 생명을 지속케 하는 기운이고, 오방은 우주 전체를 상징한다. 이렇듯 완벽한 시공간의 기운을 표현하는 데 색깔만큼 분명한 것이 없어, 오방색은 온전히 갖추어진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다. 각 색깔 또한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오방색은 참으로 유력한 처치인 셈이다.

진관사 수륙재에 등장한 오방기.

따라서 나라의 중요한 의례에는 오방기를 세우고, 각 방위를 수호하는 신수(神獸)와 짝을 이루게 하였다. 중앙의 황룡기를 중심으로 동방에 청룡기, 서방에 백호기, 남방에 주작기, 북방에 현무기를 세워 삿된 것을 물리치고 평안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자 한 것이다. 오방기는 궁중의례와 불교의례는 물론, 마을굿이나 오광대놀이 등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불교에서는 각 방위에 부처가 상주한다는 오방불사상이 뿌리를 내렸는가하면, 유교에서는 오방을 관장하는 방위신으로 오제(五帝)를 두었다. 따라서 수륙재(水陸齋)를 치를 때면 오로단(五路壇)을 마련해두고 이들 오제를 모시는 절차가 필수적으로 따른다. 모든 초월적 존재들이 수륙법회에 걸림 없이 올 수 있도록 오방의 길을 활짝 열어주기를 청하기 위함이다.

오방색은 의례뿐만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되었다. 건축에서는 목조건물에 여러 색과 무늬로 채색하는 단청(丹靑)을 할 때 오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였다. 화려하게 채색된 단청은 우주의 원리를 담은 거대한 표상이자, 건물 자체의 충만한 서기(瑞氣)로 벽사진경을 바라는 소망을 담고 있다. 특히 한국사찰의 법당은 불보살을 비롯해 서수 · 꽃 등과 어우러진 다채로운 단청으로 장엄하여 불법의 환희로움을 드러내는 독자적인 위상을 지녔다.

복식에서도 오방색의 사용이 활발한데, 오색 천을 이어 만드는 색동옷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색동옷은 오행을 두루 갖추어 삿된 기운을 막고 다복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어, 색의 배치에 있어서도 상생하는 청(목) → 적(화) → 황(토) → 백(금) → 흑(수)의 순을 따랐다. 돌이나 명절 때 아이들에게 색동저고리를 만들어 입히고, 섣달그믐에 양팔을 색동으로 만든 까치두루마기를 입히는 것은 모두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연행분야에서는 신라 처용무에 적용된 오행사상이 조선시대 궁중무용인 정재무(呈才舞)의 복식에까지 이어졌고, 민간에서도 오광대놀이와 봉산가면극에 나오는 이들이 오방색의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공동체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특히 주머니는 복을 받아들이고 지니는 장신구로, 오방색의 비단조각으로 만들어 만사평안을 비는 뜻을 담았다. 이 주머니를 ‘오방낭자’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정초에 왕비가 직접 재상가의 아이들에게 오방낭자를 나눠주었다.

추석 때 빚는 전통음식 송편.

음식에 투영된 오방색

오행의 원리는 방위와 색깔뿐만 아니라 계절, 오장(五臟), 오관(五官), 오미(五味), 오상(五常), 오음(五音) 등과도 연결되어 있다. 특히 오색을 기초로 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이와 연결된 오장육부를 건강하게 돌볼 수 있다는 섭생론이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곧 간과 담은 목(木) 기운과 연계되어 있어 녹색음식인 녹차 · 매실 · 시금치 등이 좋고, 화(火)의 기운을 지닌 심장과 소장에는 토마토 · 대추 · 적포도주 등의 붉은 음식, 토(土)의 기운과 연계된 비장과 위장에는 늙은 호박 · 벌꿀 등 황색음식, 금(金)의 기운과 연계된 폐와 대장에는 도라지 · 더덕 · 콩나물 · 무 등의 흰색음식, 수(水)의 기운과 연계된 신장과 방광에는 흑미 · 검정콩 · 검은깨 · 김 · 미역 등의 흑색음식이 좋다는 것이다.

〈표〉 오행소속일람표

오행

방위 계절 오장 오관 오상
간장 신맛
여름 심장 쓴맛
중앙 4계 비장 단맛
가을 폐장 매운맛
겨울 신장 짠맛

따라서 건강한 사람은 이러한 오색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한 셈이어서, 예로부터 오색나물과 오색고명 등 오방색을 사용하는 식생활은 과학적인 것이자 우주자연의 원리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이를테면 잔칫상에 올리는 국수는 대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는데, 국수 위에 오색으로 고명을 얹어 오행에 순응하는 기복의 의미를 더하였다. 고명에 사용하는 재료는 청색에 미나리 · 쑥갓 · 오이, 적색에 홍고추 · 당근, 황색에 달걀노른자, 흰색에 달걀흰자, 흑색에 표고버섯 · 목이버섯 · 쇠고기 등이 주로 사용된다.

이와 관련해, 신성과 금기의 공간을 드러내는 금줄 또한 오행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출산 후 3 · 7일간 대문에 금줄을 걸 때 고추 · 솔가지 · 숯 · 백지 등을 달았는데, 이는 곧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고 부정을 쫓기 위한 오방색의 상징물이다. 새끼줄은 황색, 솔가지는 청색, 고추는 적색, 백지는 백색, 숯은 흑색을 나타내며, 이들 요소는 오행의 각 색깔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정화 · 축귀 · 생명력을 지닌 요소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집 앞에 고추, 솔가지, 숯 등을 매달아 금줄을 쳤다.

1925년에 발간된 월간지 〈불교〉에서 안진호 스님은 불교식 출생의례를 다루는 가운데, 출산 후 금줄을 달 때 솔가지 · 숯 · 고추 외에 ‘범(梵)’자를 쓴 백지를 추가하면 5색 금기가 되어 모든 장애가 없어질 것이라 하였다. 왼새끼로 꼬아 비일상의 신성성을 지니게 된 새끼줄에, 오행의 기운을 두루 갖춘 요소를 매달고, 거기에 신비로운 힘을 지닌 ‘범’자까지 써놓는다면 그 어떤 삿된 기운도 절대 침범할 수 없지 않을까.

음양의 이치를 담은 색

오방색은 정색(正色)으로 양의 색이고, 음의 색은 각 방위의 중간에 있는 간색(間色)이 해당된다. 서방의 백과 동방의 청 사이에 벽(碧), 동방과 중앙의 황 사이에 녹(綠), 남방의 적과 서방 사이에 홍(紅), 남방과 북방의 흑 사이에 자(紫), 북방과 중앙 사이에 유황(硫黃)을 간색이라 하여 오정색과 오간색을 전통색의 기본색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남성 속에 여성성이 있듯이, 음양의 이치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절대적으로 양이나 음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색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이다. 오방색은 정색과 간색의 기준으로 볼 때 양의 색이지만, 서로 음양의 기운으로 대립되기도 하고 각각의 색에 음과 양의 두 기운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오행은 목(청) → 화(적) → 토(황) → 금(백) → 수(흑)로 순환하면서 서로 상생하여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서로 상극하여 과한 것을 조절해 조화를 이룬다. 상생(相生)은 목은 화를 생하고 화는 토를 생하는 방식으로, 상극(相剋)은 목이 토를 극하며 토가 수를 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오방색은 상생과 조화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사진은 상여장식의 일부분. <국립민속박물관>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적과 청, 백과 흑이 음양의 대립을 이루는 것으로 여기지만, 음양오행의 이치로는 그렇지 않다. 적(赤)과 흑(黑), 청(靑)과 백(白)이 대립을 이루기 때문이다. 적은 화(火)에 해당하여 방위로는 남쪽, 계절로는 여름, 오관의 혀를 관장한다. 흑은 수(水)에 해당하여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 오관의 귀를 맡고 있다. 물은 불을 꺼버리니 상극이고, 남과 북, 여름과 겨울, 혀와 귀처럼 서로 대극적 개념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대극적’이란 서로 반대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뜻할 따름이다. 오관(五官)에 대입했을 때 혀(火)로 말하고 귀(水)로 들어 상호작용을 이루는 것처럼, 대립에 놓여있기에 오히려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대극에 있는 남과 여의 존재,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 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상극이 곧 상생으로 연결되는 이치가 담겨 있다.

구미래

불교민속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 학술연구교수, 중앙대 외래교수, 조계종 총무원 성보보존위원, 한국불교민속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모시는사람들, 2015), 〈한국불교의 일생의례〉(민족사, 2012),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민속원, 2009) 등이 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