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268호)

장사익(68). 15년 전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만났던 그는 내 기억 속에 하얗고 순박한 ‘찔레꽃’ 향기로 남아있는 사람이다. 큰 공연(9월 9일, 2017 The-K 한국교직원공제회 파크콘서트)을 앞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연재의 첫 주자로 그를 찾은 이유다. 그의 보금자리는 홍지문 옆 작은 다리를 따라 휘어져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빨간 벽돌집이다. 입추가 막 지난 8월 9일, 옛 기억을 더듬어 대문 앞에 이르니 부부의 문패가 예전 그대로 나란히 붙어 있다. 살짝 열려있는 현관에 들어서며 ‘선생님’하고 불렀다. 기척이 없어 이층에 올라가니 먼저 온 사진기자와 차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밀며 “산들은 그대론데 우리는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네유.”라며 15년 전에 그랬듯 인왕산과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통유리창가의 자리를 권했다.

웅변으로 목청이 터지다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삼봉마을이다. 홍성은 구한말 명창 김창룡(金昌龍)을 배출한 고장이다. 그 영향인지 60호 남짓한 마을에는 재주꾼이 많았다. 당제(堂祭)를 지낼 때는 꽹과리 · 장구 · 북 · 징소리가 마을 구석구석에 메아리쳤다. 특히 부친은 광천 최고의 장구재비였다. 지역 축제나 행사 때면 단골로 불려갔다. 어린 장사익은 그런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엉덩이를 들썩이곤 했다.

“흥은 있었지만,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만 해도 음치에 가까웠어유.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책을 읽듯이 불러, 웃음거리가 되곤 했지유. 노래에 자신감을 갖게 된 건 웅변대회 대표로 추천된 게 계기가 됐어유. 반공 웅변대회가 자주 열리던 시절인디, 학급대표로 뽑혀 매일같이 동네 뒷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댔지유. 5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더니 목청이 터지더구만유.”

중학교 때부터 곧잘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다. 고등학교는 상경해 명문으로 불리던 선린상고에 입학했다. 당시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이 잘 되던 시절. 1967년 졸업과 함께 서울 종로 공평동에 위치한 고려생명보험에 입사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노래에 대한 욕심을 버리진 못했다. 탑골공원 옆 저렴한 국밥집을 자주 다니다가 월급의 절반을 털어 낙원상가 인근 가요학원에 등록했다. 3년간 발성과 코드 등 음악기초를 배운 덕에 1970년 군(軍)에 입대하며 문화선전대(현 국방홍보지원대)에 선발될 수 있었다.

총 대신 3년간 마이크를 잡았던 장사익. 그는 전역 후 복직을 기대했지만 회사가 알리안츠생명보험에 인수되면서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이후 무역회사 · 전자회사 · 가구점 · 독서실 등 열다섯 개의 직업을 전전했다. 이런 와중에도 노래에 대한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1980년 길거리에 나붙은 한소리회 국악강습 안내문을 보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곳에 가입해 단소·피리·대금·태평소 등을 배웠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길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1992년 겨울에 매제가 운영하던 카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문득 ‘나도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 텐데, 마흔 둘이 된 지금 이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들어유. 그래서 ‘좋다. 딱 한 번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 3년만 후회 없이 해보자.’하고는 한 손에 태평소를 들고 이광수 선생의 사물놀이패를 찾아갔어유. 돈 안줘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했지유. 그러고는 죽어라고 불러댔는데, 2년이 지나니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구만요.”

장사익은 정해진 박자없이 노래를 부른다. 무대 위에서 열창하는 모습.

마흔 다섯에 시작한 ‘소리’

1993년 그가 속한 농악패는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놀이’ 공주농악 장원, ‘전국민속경연대회 결성농요(結城農謠)’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듬해는 전주대사습놀이 ‘금산농악’ 장원, 1995년에는 KBS국악대상 ‘뜬쇠사물놀이’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와중에 그는 산조대금(散調大笒) 명인 원장현 선생과 피리연주가 강영근 선생을 찾아가 사사했다. 서태지의 ‘하여가’에서 태평소를 부르는 등 잘 나가던 그가 태평소를 내려놓고 소리를 시작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사물놀이 공연을 마치면 으레 뒤풀이가 펼쳐진다. 뒤풀이의 마지막을 ‘판막음’이라고 하는데 그때마다 등장해 무대를 걸판지게 달군 건 장사익이었다. 그가 ‘봄비’ 등 트로트를 부르면 사물놀이패들은 배꼽을 잡고 자지러졌다. 어느 날, 프리재즈를 하던 故 김대환 선생이 노래를 해보라고 시켰다. 우리나라 재즈 1세대로 불리는 김대환은 재즈드러머의 대가로 불렸지만,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83자를 새겨 넣은 기인이자, 대자유인이었다.

그가 청한 노래는 ‘산토끼’. “박자를 생각하지 말고 불러 보라.”는 말에 첫 소절을 불렀는데, “지금 박자를 세고 있잖아!”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시 록의 대부 신중현 씨와 음악을 하며, 무박자 연주를 시도하던 김대환은 장사익만의 소리 ‘반주를 해체하는 노래’가 영그는데 단초를 제공했다.

“제 노래에는 정해진 틀이 없어유. (즉석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얀~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판의 분위기에 따라 호흡에 따라 노래는 즉흥적으로 변하고, 당시 감정에 충실하며 자유롭지유. 메트로놈에 맞춰 정확히 부르는 노래가 아닌거지유. 노래를 듣는 관객들이 흥겨워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고 싶어도 쉽지 않고, 젓가락 장단을 맞추려고 해도 쉽지 않다고들 말하지유. 그래서 오케스트라나 밴드와 협연을 할 때는 반드시 반주가 들어올 타이밍을 사전에 약속해야 해유.”

그의 노래는 라이브로 들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음반에 담긴 노래도 공연장에서 부를 때는 분위기에 맞춰 다르게 부르기 때문이다. 김대환 선생과의 만남이 장사익 특유의 ‘소리의 길’을 열어주었다면 피아니스트 임동창과의 만남은 그의 소리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94년 당시 그는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꽹과리 연주자 이광수, 가수 서유석, 피아니스트 임동창 등과 어울렸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뒤풀이 자리에서 선보인 노래솜씨에 절친 후배 임동창이 무대를 권했다. 그해 11월 서울 홍대 앞 극장 ‘예(藝)’에서 이틀간 공연을 했다. 장사익 소리판 ‘하늘가는 길’의 초연이다.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100석 규모의 극장에 400명이 넘는 관객이 입장했다. 앉을 자리가 부족해 무대 위까지 관객이 올라왔다. 무대 벽에 등을 붙이고 관객에 포위된 채 노래를 불렀다.

첫 공연의 기세를 몰아 이듬해 첫 음반을 준비했다. 나이 마흔 여섯. 자작곡과 술자리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모아 절차는 무시한 채 6시간 만에 뚝딱 만들어낸 게 1집 ‘하늘가는 길’이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찔레꽃’,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의 상여소리를 재해석한 ‘하늘가는 길’, 평소 즐겨 부르던 트로트 ‘열아홉 순정’ 등 열 곡을 수록했다.

그의 집에는 전통 국악기가 많다. 방짜로 만들어진 징은 울림판에 두드린 자국이 선명하다.

일상이 노래이고, 삶이 곧 음악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었다.’는 얘기는 그를 두고 하는 말이다. 첫 앨범이 세간에 화제가 되면서 ‘장사익’ 세 글자는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그의 음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가뭄 속 단비를 만난 농부마냥 뜨거웠다. 이듬해 세종문화회관에서 단독콘서트도 열었다. 문득 ‘몇 십 년을 돌아 이제야 길을 찾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봄 피는 꽃이 있는가하면, 늦가을 피는 꽃이 있듯이.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는 용어가 있다. 2년차의 슬럼프, 두 번째 결과물의 부진을 의미한다. 장사익 역시 2집에선 고전을 면치 못한다. 1집의 흥행에 기대어 내놓으려던 한 2집은 스스로조차 만족시키지 못했다.

“암퇘지 뱃속에서 맨 먼저 나온 새끼를 ‘무녀리’라고 해유. 이 놈은 한 태에서 나온 새끼들 중에 가장 모자라유. 생김새도 못난데다 덩치도 작아서 어미젖을 먹을 때두 항상 밀려나지유. 2집 음반 ‘기침’은 제게 ‘무녀리’ 같은 존재예유. 얼떨결에 한 녹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방구석에 던져놓고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지유. 그 무렵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셨는데, 거의 말씀을 못했어유. 기침만 자꾸 하셨는디, 그때 방구석에 던져놓은 음반이 생각나더라구유. ‘아, 저게 지금 내 모습이구나. 내가 지금 이 정도밖에 안되는구나.’”

전시회를 열기도 한 가수 최백호 씨가 그려준 작품.

1999년 2집을 발표한 후 지금까지 모두 8집 9장의 앨범을 출반했다. 3집 ‘허허바다’(2000년), 4집 ‘꿈꾸는 세상’(2003년), 5집 ‘사람이 그리워서’(2006년), 6집 ‘꽃구경’(2008년), 라이브앨범 ‘따뜻한 봄날 꽃구경’(2009년), 7집 ‘역’(2012년), 8집 ‘꽃인 듯 눈물인 듯’(2014년) 순이다.

단골손님이 된 산사음악회를 비롯해 매년 수십 차례 크고 작은 공연을 열어온 장사익은 지난해 2월 뜻하지 않게 마음고생을 했다. 성대(聲帶)에서 혹이 발견돼 성대결절 수술을 받고 8개월을 쉬었다. 소리꾼에게 성대는 목숨과 매한가지. 이 일을 계기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게 됐으니, 오히려 전화위복이라고 그는 말한다. 공연이 없을 때는 라디오채널을 FM 93.1에 맞춰놓고 클래식음악을 듣는다. 거실에도 틀어놓고, 새와 고양이, 나무가 들으라고 마당에도 틀어놓는다. 느리고 지루할 것 같은 일상은 그의 음악에 소중한 자양분이다. 이 시간에 시(詩)를 읽고, 흥얼거리며 곡을 쓴다. 마당에서 앉았던 까치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자작곡한 노래가 ‘높고 파란 하늘 푸른 날개 달고 아름다운 세상 날고 싶어요~’로 시작하는 ‘꿈꾸는 세상’이다. 그에겐 일상이 노래이고, 삶이 곧 음악이다. 유일한 취미는 손글씨다. 그는 서예가 아니고 ‘낙서’라고 표현한다. ‘落書’가 아니고, ‘樂書’다. 글씨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는 뜻이다. 한글 흘림체만 10년 이상 썼는데, 요즘은 지인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하고, 지역 도서관 등에 간판으로도 써줬다. 그의 글씨는 디자이너 이상봉이 천 위에 프린트해 옷을 만들기도 했고, 그는 사용하지 않는 휴대폰 디자인으로도 사용됐다.

그는 더 이상 대금이나 태평소를 불지 않는다. 어느 무대에서 태평소를 10여 분 불고 ‘아리랑’을 부르려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부는 걸 많이 하면 소리가 도망간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아들 둘은 모두 대금주자다. 손자는 국악중학교를 다니고, 초등학교를 다니는 손녀는 판소리를 한다. ‘국악 3대’다.

그의 집 옥상에 서면 인왕산과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사람들 생기 북돋우는 기생(起生)

그는 참 잘 웃는다. 인터뷰 내내 그의 표정은 하회탈을 연상시켰다. 사진에 담긴 모습도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데 옛 사진에는 웃는 모습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소리꾼의 길은 그의 삶은 물론 내면마저도 이렇게 바꿔놓았다.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신명나는 감동과 활력을 안겨주는 게 즐겁다는 그는 이를 업(業)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생전에 점을 보러 갔더니만 제가 전생에 ‘기생(妓生)’이었다고 하더래유. 저는 점쟁이 말이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유. 저는 분위기를 즐겁게 만들어 사람들의 삶에 생기를 북돋워주는, 말 그대로 ‘기생(起生)’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유. 기생(起生)은 저의 업인 셈이지유.”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한쪽에 걸려있던 징을 들고 왔다. 그리곤 요령을 알려주며 세 번을 치란다. 소란스러울까 거절하다 마지못해 치는데 ‘위이잉~ 위이잉~’ 징의 울림이 손을 거쳐 팔과 어깨, 가슴까지 파고든다. 손끝에서 시작해 가슴까지 파고드는 전율, 이런 게 국악의 매력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한 경험이었다. 인터뷰 틈틈이 복숭아를 깎아주고, 키위를 썰어주며 먹으라고 강요(?)하던 그는 점심때가 됐다며 불광동 콩나물국밥집으로 잡아끈다. 콘서트 준비 차 외출했다가 돌아온 사모님 일행과 함께 불광동으로 내달렸다. 국밥이 나오기 전부터 셀프코너를 들락거리더니 식사 후에는 계산대 앞에 놓인 뻥튀기를 종이컵에 담아주며 ‘운전하고 갈 때 먹어유’하며 챙겨준다. 아래층 출입구를 지날 때는 후식 아이스크림 통을 가리키며 디저트를 먹으란다. 배가 부르다고 사양했더니 ‘공짠데 왜 안 먹냐?’고 채근이다.

장사익, 그는 15년 전에도 그러했듯, 여전히 찔레꽃 향기가 물씬 풍기는 하얗고 순박한 소리꾼이었다.

취미 수준을 넘어선 손글씨로 본지의 발전을 기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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