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도량에 핀 연꽃(268호)

영산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한바탕 흥겨운 축제가 펼쳐진다. 삼회향놀이다. 삼회향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법주와 바라지의 대화 장면. 9월 12일 구인사에서 열린 삼회향놀이의 법주는 수산 스님(왼쪽)이, 바라지는 석용 스님이 맡았다.

낮은 덥고 밤은 서늘한 9월은 가을인가, 아니면 아직은 여름인가. 경내로 들어서는 언덕길에 내리는 오후 햇볕이 잠자리 날개처럼 맑다. 투명하다. 환하다. 삼라만상을 이루는 온갖 생명들이 마무리를 함께하는 시절이다. 버림이 아니다. 버팀도 아니다. 간직이다. 다시 찾음이다.

종교를 앞세우지 않고 믿음도 없이 경내를 객으로 떠돈다. 객도 집에 들어서면 주인이다. 종교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경내를 얼치기 객이 배회한다. 경건함만으로 둘러보는, 그러던 어느 결에 경내가 사라져버렸다. 내가 없어졌다. 부처님만 계신다.

천지사방, 인산인해다. 천지간 육지와 바다가 모여서 비로소 안팎이 없다. 내부와 외부가 분별없는 어깨를 끼고 이승의 자리를 모두가 함께 노래와 춤사위로 출렁거린다. 법이 어디에 있고 성(聖)과 속(俗)은 또 무엇인가. 나와 우리는 어디에서 제각기 눈물 글썽이며 있었던가. 법(法)을 벗어난 자리에선 모두가 한 생이다. 살다 가고 나면 무엇도 없다. 살아 있어서도 없다. 눈물 나는 말씀도 삶도, 거기엔 없다. 있다고 여기는 삶을 지우고자 하는 자리. 속에는 속이 없고, 밖에는 밖이 없다. 다 털고, 다 버리고, 다 업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자재(自在)를 확인하자.

이게 무슨 말인가. 구인사 삼회향놀이 얘기다. 그냥 놀고, 그냥 즐기면 그만이다. 다 같이 어우러져서 긍정으로 한 생을 건너가면 되는 거다. 종교적이지만 종교는 아니다. 경내의 숭고함을 간직한 마당에서 한바탕 어울림의 잔치가 벌어진다. 그랬다. 그랬었다. 구구한 경전이나 학술은 접어두고 종교란 본시 대중과 호흡하며 존재하는 게 아니었던가.

삼회향놀이는 불교문화와 민속문화가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의 장이다. 석용 스님(왼쪽)과 구수 스님이 법고무를 시연하고 있다.

한국불교 천태종 총본산인 구인사에서 삼회향놀이를 참관한 필자가 느낀 건 그것이었다.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선도가 아닌 대중과의 소통은 한국 불교가 간직해 온 소중한 자산. 수륙영산대재와 생전예수재의 뒷풀이로 벌이는 삼회향놀이는 현대로 이어지던 와중에 맥이 끊겼던 전통이었는데 천태종에서 이를 복원해 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광명전의 눈부시게 환한 불빛을 수많은 이들이 나누고 있다. 가사를 입은 스님들, 각처에서 모여든 사부대중들이 한 무늬로 어우러진다. 주인도 객도 혼연일체다. 모두가 주인이다. 너도 나도 주인 되어 행렬을 이루어 조사전 옥상을 둥글게 돈다. 둥긂은 바람과 완성의 이중적 의미.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아직 푸른 나무들도 합장하고 그 그림자마저 고개를 숙이고 행렬에 스며든다.

어머니와 세 딸, 그리고 재담꾼이 ‘어머니와 구인사의 인연’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민요를 부르며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다시 광명전. 넓고, 넓다. 삼보(三寶)라 하는 법고 · 목어 · 운판이 연단 앞에 놓여 있다. 이건 상징이다. 지상과 물속과 천상까지 불법(佛法)이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다. 설렘과 기대로 어수선한 실내가 자리를 잡고, 연단에 오른 종정 큰스님의 법어는 아주 짧다. 1분도 되지 않는 말씀 속에 ‘마음’이라는 말이 가득 들어 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풍물패들이 분위기를 돋운다. 재담꾼의 도액축원(度厄祝願)은 시시때때로 드는 액을 달거리로 신명나게 풀어낸다. 모든 일이 나날이 잘 풀리고 마음과 같이 모든 소원이 성취되기를 비는 간절함이 절절하다. 이어 등장한 어머니와 세 딸은 생로병사에 갇혀 있는 삶의 애환과 한을 이야기로 풀어내어 눈물 글썽이게 한다. 연세 든 분들 중엔 눈물을 닦는 분들도 계시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무대 위의 광경이 자신의 생에 대한 상념에 젖게 하는지

“가야지 가야지 꽃 피고 새 울면 나는 가야지

산 넘고 물을 건너 혼자 가야지.”

애절하게 부르는 노랫가락에 장내가 조용해진다.

스님 두 분이 연단에 올라 춤사위를 펼친다. 스님들의 손에 네 송이의 연꽃이 피어 있다. 허공을 떠다니는 연꽃들. 닷새 동안 계속된 수륙영산대재와 생전예수제를 무사히 마치는 데 수고한 이들의 노고에 감사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삼회향놀이의 소리와 음악과 춤은 의식이 아니다. 흥이다.

스님들이 피워낸 연꽃이 사라지고, 풍물대가 무대에 오른다. 아주 친숙한 놀이마당이다. 유전자에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되는 리듬이 펼쳐진다. 내부에서 어떤 불길이 인다. 춤추며 추임새를 넣으며 악기를 다루며 상모를 돌리는 그들의 머릿짓을 따라 마음도 움직인다. 어울림의 한마당이 완성된다. 자신을 잊고 시간과 처지를 내려놓고 다 함께 하나가 된다. 어디서 왔고 무얼 하며 어디로 가란 것인가를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런 것은 저 너머 세속의 일이기에 이 자리에서는 하찮고 쓸 데 없다. 무게가 없으니 무거움과 가벼움도 없다. 흥은 무게로 저울질할 수 없다. 나비도 바위도 흥겨우면 모두가 다 허공이니까.

구인사 삼회향놀이보존회 스님들이 작법을 하고 있다.

‘저만치’라는 거리가 대체 얼마만 한 거리인지 모르겠지만, 저만치 앞자리에서 두세 돌이나 지났을까 말까 한 어린 아들을 가운데 앉혀놓은 젊은 부부가 무대를 향해 환호성을 지른다. 등만 보이는 그들의 어깨가 무대 위 사물패들의 리듬에 맞춰 덩실거린다. 바야흐로 조사전 전부가 무대이고 공연장이다. 모든 이들이 다 무대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다. 춤추고 노래하고 박수치며 서로 등을 두드리고 흥을 돋운다. 혼연일체라는 계몽적인 말이 아주 절실하게 와 닿는다. 자발(自發)이 만들어내는 한 마당의 놀이 분위기가 참 발심(發心)이다.

열두 스님들의 천수바라춤은 파도치는 바다를 닮았다. 대중들을 드넒은 망망대해로 데리고 간다. 어떤 이는 헤엄을 치고 어떤 이는 지느러미를 달고 또 어떤 이는 배를 노 젓는다. 천지사방으로 저마다의 방향으로 헤쳐가지만 망망한 바다는 파도를 멈추지 않는다. 고뇌와 번민의 세파가 아닌, 열반에 든 희열의 물결이다. 나 없는 자리에 무엇이 있을까. 바라밀의 세계는 아주 먼 데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 바로, 여기가 거기다. 시간을 잊고 걱정과 근심을 잊고, 마침내는 나마저 없는 자리.

풍물패가 사물놀이와 각종 땅재주를 선보이고 있다.

도량작법(道場作法)과 사방요신(四方搖身)을 거쳐 등장한 스님의 법고무(法鼓舞)는 나를 뚫고 계곡을 지나 이승 너머까지 울린다. 마침내 소리 없는 세계로 뭇 생명들을 데리고 간다.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나올까. 어떤 시공과 만나게 될까. 부족함이 없으니 만족만 있는 세계? 불행이 사라지니 행복으로 가득한 열락? 내 몸이 곧 악기가 되어 나무로도 서 있고 물고기로도 헤엄치고 구름으로도 허공을 만나는 희열? 소리 없는 악기와 잎 없는 나무와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와 비 없는 구름? 그저 아득하다는 말 밖에는 더 할 말이 없다. 무지하므로, 알 수 없으니까, 이런 생각으로 눈 먼 거 세상이 다 안다. 이승에서의 생의 시작에서부터 절정을 거쳐 소멸에 다다르는 모든 여정을 북소리가 울린다.

타악팀의 연주에 맞추어 민요가락 ‘옹헤야’를 부른다. 이어서 의상조사의 법성게를 송한다. 이승과 이승 떠난 자리, 지나온 곳과 지금 여기와 가야 할 길이 훤히 뚫렸는가. 간절한 축원은 생사와 시공을 뛰어넘는다.

화산 스님(왼쪽)을 비롯한 구인사 삼회향놀이보존회 스님들이 의식을 하고 있다.

스님과 회중들이 합장하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성불하십시오.”를 기원하는 것을 끝으로 삼회향놀이는 막을 내렸다. 회향의 사전적 의미는 불사(佛事)를 경영하다 죽은 이의 명복을 빌고, 자기가 닦은 공덕을 남에게 돌려 자타가 함께 불과(佛果)를 성취하기를 기도하며, 미타(彌陀)의 공덕을 들어 극락왕생에 이바지하는 것을 말한다.

삼회향놀이 동참 대중들이 행사장을 돌며 삼회향놀이를 마무리하고 있다.

광명전과 이어진 조사전 계단을 내려오면서 경내에 드리우기 시작하는 그늘을 본다. 웅성이며 앞서서 계단을 내려서는 이들의 등이 환하다. 저분들의 어깨는 얼마나 큰 짐을 내려놓고 사바세계로 돌아가는 것일까. 문득 옆구리로 주름진 손이 파고든다. 떡을 든 손이다. 과일을 든 손이다. 부침개를 든 손이다. 얼결에 받아들고 떡 한 조각을 우물거린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 귓전이 자꾸 간지럽다.

성불하세요. 아, 배고픈 육신과 가난한 마음을 짊어지고 얼마나 먼 길을 가야 하는가.

최준(시인)

1963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났고, 경희대학
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4년 〈월간문
학〉 신인상,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당
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너 아직 거기서〉,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
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등이 있다.


 

뭇 중생 천도하는 불교의식
영산재ㆍ수륙재ㆍ생전예수재ㆍ삼회향놀이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서 열린 삼회향놀이 중 스님들의 작법무 시연(2009년).

불가에서 사후의 영가를 기리는 의식에는 영산재(靈山齋), 수륙재(水陸齋), 예수재(豫修齋), 삼회향(三廻向) 등이 있다.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축산(靈鷲山)에서 법을 설하실 때의 모습을 재현하는 법회의식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성현과 수행자와 덕 높은 스승을 청해 봉양하며, 법문을 듣고 시방세계의 외로운 혼령을 천도하고 무주고혼 영가들에게 장엄한 법식을 베풀어 극락왕생토록 하는 의식이다.

수륙재는 사람뿐만 아니라 육지나 물이나 하늘에 사는 모든 중생에게 공양을 베풀어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천도의식이다. 여기에는 모든 생명을 똑같이 공경하는 불교의 생명사상이 담겨 있다. 이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가 꿈에 어느 고승이 “수륙재를 베풀어 원혼을 제도하는 것이 공덕의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신하 지공(誌公)에게 〈수륙의문(水陸儀文)〉을 짓게 하고 재를 지낸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때 수원의 갈양사(葛陽寺)에서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최초로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영산재와 수륙재를 합쳐 수륙영산재로 부르기도 한다.

예수재는 생전에 미리 수행과 공덕을 닦아 두는 재의식이다. 예수재는 살아있는 이가 자신의 사후를 위해 미리 준비함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맑히고 보살행을 실천할 것을 서원하는 의례다.

2009년 구인사 대조사전 앞마당에 열린 삼회향놀이에서 줄꾼이 외줄타기를 선보이고 있다.

삼회향은 한국 불교의식 가운데 재의식(齋儀式)이 끝난 후에 펼쳐지는 뒤풀이 형태의 놀이다. 현재 구인사 삼회향놀이가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돼 있다. 삼회향은 중생회향(衆生廻向)·보리회향(菩提廻向)·실제회향(實際廻向)의 세 가지를 말한다. 중생회향은 자기가 지은 선근공덕을 다른 중생에게 회향해 그 공덕을 같이하는 것, 보리회향은 자기가 지은 선근공덕을 회향해 보리의 과덕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실제회향은 자신의 선근공덕으로 무위적정(無爲寂靜)한 열반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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