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명론(268호)

사진제공=불교신문

「깨침의 미학」 이원섭 지음

보리달마 이래 참선 수행자들에게 ‘부처’란 사춘기 청소년들의 궁금증[性]보다 더 눈이 빠지는 테마였다. ‘부처? 부처? 부처?’, ‘부처란 어떤 존재일까?’,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을 마음에 품고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으로 일생을 보내고 있는 납자들에게 부처란 단지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 따위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만일 불상이 부처였다면 ‘여하시불(如何是佛)’이라는 물음은 생겨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 당나라 말 무렵까지는 대부분의 선종사원에서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대웅전도 없었다. ‘덕산방(德山棒)’으로 유명한 덕산선감(德山宣鑑, 782~865)과 같은 이는 이미 세워져 있는 대웅전과 불상도 폐지했다. 대승의 진정한 부처는 목석(木石)이나 금(金) · 동(銅) 등으로 만든 조각품이 아니고, 무형의 ‘법신불(法身佛)’ · ‘진리불(眞理佛)’이었기 때문이다.

불상과 신상(身相)의 부정

중국선의 사상적 경전은 〈금강경〉이다. 제5장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이치대로 정확하게 여래의 眞相을 보라)’에서 대승불교의 여래(부처)는 사리불에게, “여래의 진실한 모습은 신상(身相, 형상) 등의 모양에 있지 않다.”고 거듭 천명한다.

“수보리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거룩한 신상(身相, 육체의 모습, 형상)에서 여래의 참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수보리가 대답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신상에서는 여래의 참모습(眞相, 法身)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신상(형상)은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와 같이) 무릇 모든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에 모든 형상이 허상임을 직시한다면 곧 여래를 보게 될(깨닫게 됨) 것이다.”

여하시불(如何是佛)?

중국 선승들은 ‘법신불’ · ‘진리불’ · ‘자성불(自性佛)’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보기에 불상이나 신상(身相)은 아무리 훌륭하게 조성해 놓아도 그것은 부처의 껍데기나허상에 불과했다. 그들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100%로 믿었다.

선승들의 최대 궁금증은 ‘부처란 무엇인가’였다. 그들은 자나 깨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신(新) 유행어가 ‘여하시불(如何是佛, 무엇이 부처인가?)’이었다. ‘여하시불’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와 함께 부처의 진수를 묻는 쌍두마차, 고유명사가 되어 1500여 년 동안 중국 · 한국 · 일본의 선원 구석구석을 휩쓸고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납자들은 걸핏하면 선사들에게 법을 묻었다(질문). 그 상투어의 1위가 ‘여하시불’이었다.

어떤 납자가 진지하게, 그야말로 완전히 농담을 뺀 심각한 어투로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선사, 어떤 것(무엇이)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운문선사가 대답했다.

“간시궐(乾屎撅, 마른 똥막대기).”

 

‘간시궐’이란 ‘마른 똥막대기’라는 뜻이다. 운문선사의 대답은 지성과 사고를 폐기시켜 버리는 동문서답이다.

 

또 어떤 스님이 똑같은 말로 동산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如何是佛)?”

“마삼근(麻三斤, 삼 세근)”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자’ 등을 ‘공안’ · ‘화두’라고 한다. 공안(公案)은 ‘부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직선 도로’이다. 그것을 ‘경절문(徑絶門, 지름 길)’이라고 한다.

이런 공안에 대하여,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절묘하게 해설한 책이 다름 아닌 이원섭 선생의 〈깨침의 미학〉(법보신문사, 1991)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공안 해설서다. 출판된 지 26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따끈따끈한 신간(新刊)이다. 아직까지 이렇게 공안에 대해 탁월하게 해설한 책은 없다. 좀 과장 한다면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책이다.

공안에는 정답이 없다.

공안은 부처로 가는 직선로다. 그러나 공안에는 정답 같은 것은 없다. 정답이 없는 선어(禪語), 즉 공안을 가지고 중생을 부처로 만든다. 의혹에서 해방되어 부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기이한 방법이다. 칼을 휘두르는 놈에게는 더 날쌘 칼잡이가 가야 해결되는 것처럼, 정답이 없는 말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관념병 환자, 깨달음에 구속되어 있는 정신병 환자(수행자)를 치료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원섭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안(화두)에는 답이란 것이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문제들에는, 설사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해도 답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공안에는 처음부터 답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별을 넘어선 절대적 체험을 직시한 것이 공안이기 때문이니, 그러기에 체험을 통해 스스로 수긍할 경지일 뿐 지성(知性)을 동원해 이러니저러니 분별할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설사 알 수 없는 교리처럼 여겨지는 공안이라 해도 그것은 오해에서 오는 결과일 따름이니, 도리어 이런 경우에 착각을 일으키기 쉬워진다. 이를테면 ‘부처란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마조가 ‘마음이 바로 부처(卽心是佛)’라고 대답한 것 같은 것이 그것이다(17쪽).”

공안 해설서가 전무하던 상황에서 1990년에 ‘법보신문’을 통하여 〈깨침의 미학〉이 연재되자 많은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읽고 또 읽었다. 언어도단의 세계에 있는 공안에 대하여 흠집 없이 건드린(해설) 경우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선승들의 공안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가 있는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언어로만 여겨졌다. 그 외 나머지 사람들은 겁이 나서 공안에 감히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뭇매를 맞고 사장(死藏)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비교적 쉬운 언어로 공안에 다가간 책이 바로 〈깨침의 미학〉이었던 것이다. 또 문장도 감칠맛 나서 독서하는 재미도 상당했다.

공안은 말[言]이다. 그러나 논리가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말이다.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질문에 “마른 똥막대기(간시궐)”라는 동문서답으로 상대를 깨닫게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공안에 정답은 없다.’는 것은 곧 공(空)을 의미한다. 정답이 있다면 우리는 그 정답에 사로잡힌다. 관념에 사로잡힌다. 사로잡히면(安住) 그날부터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선승들의 공안은 철학적 개념이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은 언어, 미숙한 언어로 관념의 벽을 부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은 철저하게 공사상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다. 〈금강경〉이 선종의 소의경전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공안이나 선에 대한 교리적 차원의 이해와 선적(禪的) 차원의 체험은 다르다. 교리는 이해지만, 선은 이해나 지식이 아니고 체험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는 이치’를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부처임을 깨닫는 체험’과는 전혀 다르다.

선이라는 비논리의
세계로 가기 위한 체험적 앎

선은 삶이다. 따라서 선은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교리적 · 논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적, 지성적 정답은 없지만, 그러나 체험적인 정답은 있다. 그렇다면 체험이란 무엇인가?

예컨대, 물은 섭씨 100도씨가 되면 끓고, 또 100도씨는 매우 뜨겁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100도씨가 어느 정도 뜨거운지는 손을 넣어 보아야만 알 수 있다.(100도에도 죽지 않는 미생물이 있다) 올해 여름은 무척 더웠다. 한낮 온도가 섭씨 35도씨까지 올라갔다. 35도씨까지 올라간 날씨가 정말 어느 정도 더운 것인지는 한낮에 실외에 나가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 안에서는 섭씨 35도씨를 지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체험적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의 앎이란 대부분 이런 지식적인 앎에 그친다.

선(禪)은 지성(知性)으로만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지식과 이성적 사고를 초월한 비논리의 세계가 바로 선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선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지식과 지성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는 습관부터 버려야 한다. 지식과 지성으로 선에 다가갈 수 있다는 착각부터 버려야 한다. 그렇게 디딘 한 걸음만이 중생의 강을 건너 부처의 강으로 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이원섭(李元燮, 1924∼2007) 선생은 192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혜화전문학교(동국대 전신) 불교학과를 나온 후 경신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첫 시집 〈향미사〉(1953)를 낸 이후로는 불교경전 공부와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고, 선(禪)의 세계를 간결하고도 정교한 언어로 풀어냈다. 〈불교대전〉, 〈선시(禪詩)〉, 〈당시(唐詩)〉, 〈노자〉, 〈장자〉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장자를 탐독하면서 불교적 · 자연적 세계를 시로 쓰게 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윤창화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1972년 해인사 강원 졸업(13회). 민족문화추진회 국역연수원 졸업(1999). 논문으로는 ‘해방 후 역경의 성격과 의의’,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 ‘성철스님의 오매일여론 비판’ 등이 있다. 저서로는 〈왕초보, 禪박사 되다〉, 〈근현대 한국불교명저 58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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