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명론(268호)

「무소유」 법정 지음

우리나라 출판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사랑 받으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단행본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법정(法頂, 1932~2010) 스님의 〈무소유〉라고 단언할 수 있다.

스님의 유언에 따라 아쉽게도 절판이 되어 지금은 시중 서점에서 사볼 수 없는 책이 되고 말았지만, 〈무소유〉는 불교계에서 손꼽는 명저를 넘어서서 오랜 세월 ‘국민의 필독도서’로 1976년 4월 15일 초판을 발행한 이후 2010년 4월 10일까지 3판 87쇄를 발행할 만큼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40년 넘게 받아온 책이다.

장장 17년, 〈맑고 향기롭게〉 본부장을 맡으라는 스님의 분부에 따라 법정 스님을 곁에서 모시는 과분한 복을 누렸던 필자로서는 〈무소유〉를 대할 때마다 남다른 감회가 가슴에 넘친다.

박정희 군사독재치하였던 1960년대 초, 필자가 동국대학교의 ‘동대신문’ 편집부장을 맡고 있을 때 계엄사령관 일행이 학교를 방문하여 총·학장들을 다 모아 놓고, 망언을 퍼부은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때 ‘동대신문’에 “계엄사령관 일행, 공갈협박차 래교(來校)”라는 제하에 계엄사령관의 망언 내용을 폭로했다.

이 사건으로 신문은 전량 몰수되어 불태워졌고, 결국 필자는 대학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 내용을 ‘털보교수’로 유명했던 불교대 서경수 교수가 〈사상계〉잡지에 다시 폭로하는 글을 썼다가 무서운 기관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필자는 이 사건이후 출판사, 주간신문사 등을 전전하다가 ‘동서문화원’이라는 출판사 편집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이때 서경수 교수가 법정 스님과 함께 한국일보 골목길 안에 있던 출판사 아래층 ‘다정다방’으로 오셨다. 이때 법정 스님을 처음 뵈었다. “군사독재치하의 무시무시한 세상에 계엄사령관의 망언을 폭로한 겁 없는 청년이 바로 이 친구”라는 서 교수의 소개에 스님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 후 발행인이었던 송재운 대표가 스님의 책을 한 권 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 계속해서 스님께 수상집을 한 권 내자고 간청했다. 서경수 교수와 박경훈 선생의 지원 설득까지 가세해서 어렵게 출판 승낙을 얻고, 그렇게 해서 법정 스님 최초의 수상집 〈영혼의 모음〉이 1972년 12월에 출간되었는데, 발행일자는 1973년 1월 1일이었다. 이 〈영혼의 모음〉에는 ‘무소유’, ‘너무 일찍 나왔군’, ‘오해’, ‘설해목’, ‘탁상시계이야기’ 등 무려 65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었다.

법정 스님 최초의 수상집 〈영혼의 모음〉은 당시 한국 최고의 서예대가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제자(題字)를 써주시고, 당시 최고의 화백 장욱진(1917~1990) 선생이 표지그림까지 그려 주셨다. 그러나 〈영혼의 모음〉이라는 제목이 너무 어려웠던 탓이었을까,

3판인가 5판인가 찍고 더 이상은 찍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 더 이상 〈영혼의 모음〉을 찍어내지 않은 채 3년이 지난 1976년, 법정 스님과 동향인 광주(光州) 출신 수필가 박연구(朴演求, 1934∼2003) 선생이 범우사 윤형두(1935~) 사장께 “〈영혼의 모음〉을 이대로 사장시키는 게 너무 아까우니 재출간해 달라.”고 요청하자 윤 사장이 흔쾌히 수락해서 재출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박연구 선생은 원래 제목인 〈영혼의 모음〉을 그대로 재출간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법정 스님 당신께서는 “〈무소유〉를 책 제목으로 하지 않으면 책을 내지 않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출판사 측은 할 수 없이 저자이신 법정 스님의 강력한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은 〈무소유〉를 책 제목으로 정해 1976년 4월 15일 초판을 발행했다.

본래 〈영혼의 모음〉에는 65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었고, 〈무소유〉에는 35편이 수록되었는데, 〈영혼의 모음〉에 수록되어 있던 글 가운데 무려 25편이 〈무소유〉에 그대로 재수록 되었다.

1976년 〈무소유〉가 출간된 이후, 법정 스님은 〈무소유〉로 인해 일약 ‘유명한 스님’이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월간 잡지 〈샘터〉에 수필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무소유〉를 읽고 감동한 서울 성북동의 유명한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 여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고려사에 머물고 계시던 법정 스님을 직접 찾아가 자기 소유의 ‘대원각’을 스님께 시주하겠으니 사찰로 만들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스님은 “못 받겠다.”고 손사래를 치셨고, 김영한 여사는 “제발 제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하면서 장장 10여 년에 걸친 해괴한 실랑이를 계속한 끝에 결국은 스님의 뜻대로 소유권은 송광사에 등록하고, 사찰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만 스님이 관여키로 합의,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도량인 ‘길상사’가 개원하게 되었다.

〈현대문학〉 1971년 3월호에 처음 발표되었던 법정 스님의 수필 ‘무소유’는 〈영혼의 모음〉을 거쳐 문고본과 단행본 〈무소유〉로 거듭나면서 날이 갈수록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존경과 사랑 속에 ‘대한민국의 명저, 국민 필독서’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일부 독자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으니,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가난뱅이로 살라는 말이냐?”고 묻는 일도 많았다. 이에 대해 스님은 공개석상에서나 사석에서나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누구나 더 많이, 더 크게, 더 호화롭게, 더 높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갈망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그러나 자칫하면 소유의 노예가 되어 더더욱 불행한 삶에 갇히게 된다.

〈무소유〉 책 한 권은 속된 말로 수천 억짜리의 요정 ‘대원각’을 시주하여 맑고 향기로운 사찰 ‘길상사’가 되게 하였고, 더 많이 소유하지 못해 마음이 병들었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무소유의 자유와 행복’을 깨우쳐 주었다.

법정 스님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과 만족은 어떤 ‘부(富)’ 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어떤 물건이 갖고 싶거나 사고 싶은가? 그렇다면, 최소한 세 번은 자신에게 엄히 물어보라. 정말 필요한가? 꼭 필요한가? 참으로 꼭 필요한가? 바로 이것이 〈무소유〉를 읽은 독자의 올바른 자세이다.

이 책 〈무소유〉에는 모두 수록된 35편의 수필은 한결같이 맑고 가난한 삶 속에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행복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스님의 지혜와 가르침이 반백년이 지나도록 넘쳐흐르고 있다.

윤청광
전 (사)맑고향기롭게 본부장. 동국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MBC-TV 개국기념작품 공모에 소설 〈末島〉가 당선되었으며, MBC에서 〈오발탄〉, 〈신문고〉, 〈세계 속의 한국인〉등의 방송작가로서 활약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상무이사와 부회장, 저작권대책위원장,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와 감사, 방송위원회 심의위원을 역임했다. BBS불교방송을 통해 스물여섯 선사의 〈고승열전〉을 장기간 방송했고, 〈불교를 알면 평생이 즐겁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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