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저명론(268호)

「만다라」 김성동 지음

김성동의 〈만다라〉는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작이었던 것을 이듬해 장편으로 개작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김성동이 승려 신분이었던 1975년 ‘주간종교’ 종교소설 현상모집에서 〈목탁조(木鐸鳥)〉란 제목으로 당선된 것으로, “악의적으로 불교계를 비방하고 전체 승려들을 모독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따라 작가의 승적(僧籍)을 박탈한 문제작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김성동은 출가를 했지만 증명서 제출을 하지 않아 승적이 없었으므로 ‘무승적제적(無僧籍除籍)’이란 기이한 결과가 초래된다. 절에서 쫓겨난 그는 처절한 방황을 거듭하다가 〈목탁조〉를 〈만다라〉로 개작하면서 일약 문제적 작가로 부상한다.

〈만다라〉는 작가의 출가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이 불교계와 승려를 비난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물론 작품에는 당시 불교계와 일부 승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있으나, 그것은 출가자의 진심어린 애정이 담긴 고언(苦言)일 뿐 불교를 비방하고자 한 망령된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만다라(曼茶羅)’는 범어로 ‘Mandala’라고 하는데, ‘Manda’는 ‘진수’ 또는 ‘본질’이라는 뜻이며, 접속어미 ‘la’는 ‘변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만다라’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소설 〈만다라〉에서 불교의 진리 추구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변용된다. 다시 말해 소설 〈만다라〉는 두 출가승 지산과 법운이 서로 다른 방법으로 불교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해 하나가 된다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다.

소설 〈만다라〉는 청정비구 ‘법운’이 술에 절어 사는 ‘지산’의 일탈적 행동을 비판하다 점차 그를 이해하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법운은 지암 노사에게서 ‘병 속의 새’란 화두를 받아 6년간 신실하게 수도에만 매진하지만 특별한 성취가 없어 고민하고, 지산은 ‘구자무불성(拘子無佛性)’ 화두로 용맹정진 하던 중 한 여성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사음계(不邪婬戒)를 범하고 방황한다.

법운과 지산은 선가의 정통적인 수행법에 따라 화두를 잡고 참선하다가 뜻밖의 마구니를 만나 출가 전보다 더 극심한 번뇌에 시달리는 공통점을 보인다. 여성과 살을 섞은 뒤 지산은 속세로 돌아가지도 않고 예전처럼 철저히 수행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술과 담배에 빠져든다. 지산의 비승비속(非僧非俗) 행위는 원효나 경허 등 고승들의 그것과 유사해 보이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회의하고 자책한다는 점에서 그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남는다.

이에 반해 법운은 선원을 찾아다니며 올곧게 정진하는 전형적인 수좌로 그려지지만, 지산과 여러 차례 조우하고 그를 알게 되면서 자신의 수행에 대해 회의한다. 그런 법운의 갈등에 대해 지산은 “경계에 부딪쳤을 때 그대는 무서워 피하고, 난 부딪쳐서 뛰어넘고자 몸부림치는” 차이가 있다고 구분 짓는다. 그러나 그가 도반을 비롯한 절집 사람들의 비아냥을 견디면서 절집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속세로 돌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지산과 법운의 청정한 수행을 방해하는 요인이 여인의 육체라는 것은, 인간의 본능 가운데 가장 끈질기고 독랄한 것이 색욕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일찍이 “네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대지 말라.”고 직설적인 언술로 경계한 바대로 청정비구에게 여체(女體)는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유혹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법운과 지산의 출가 혹은 파계에 직간접적으로 여성의 육욕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여색의 무서움을 일깨워주는 단서다. 앞서 살핀 대로 지산은 여성의 단순한 유혹을 이기지 못했고, 법운이 출가를 결행한 이면에는 아버지의 좌익 활동과 어머니의 음분(淫奔)이 숨겨져 있다.

법운과 지산의 속세 나이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법운은 대략 이십대 중후반이고, 지산이 색계를 범한 것도 그와 비슷한 시점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이십대는 이성의 육체에 대한 갈망으로 정신이 혼미하고 신체가 들끓는 시기로 정의된다. 그런 시기에 일체의 욕망과 단절하고 수행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 욕망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절단한 수좌들의 얘기가 전설처럼 떠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옛 조사들이 깨달음을 얻은 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며 식욕과 수욕(睡慾)은 인정하면서도 색욕은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 또한 그것의 무서움을 잘 알아 그 뿌리를 완전히 잘라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소설 〈만다라〉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징은 ‘바람’이다. “비구승들에게 제일 견디기 어려운 때는 깊은 밤 창문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잠이 깨었을 때”라는 비산의 독백처럼, ‘바람’은 인간의 온갖 욕망의 비유이자 상징이며, 홀연히 나타나 광풍으로 몰아치다가 문득 사라져 존재조차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닌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실체적 표상이다. 인간의 욕망과 번뇌 또한 바람처럼 출몰이 변덕스러워 때론 욕망의 노예가 되지만 그것을 놓는 순간 자유인이 된다.

따라서 지산과 법운이 절에서나 세간에서나 끊임없이 바람소리를 의식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아직 세속의 때를 완전히 벗겨내지 못했음을 뜻한다. 지산은 소주에게 ‘소주불’이란 명호를 붙이고 바람도 ‘바람보살’로 부르는 등 두두물물을 부처나 보살로 받아들이고 임종도 합장한 자세로 동사(凍死)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좌탈입망’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끝내 경계를 넘어서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만다라〉는 지산과 법운이란 상이한 개성의 두 승려를 작중 인물로 내세워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불교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실천의 어려움을 박진감 있게 보여준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법운과 지산은 각각 지계승(持戒僧)과 파계승의 역할을 맡고 있는데, 작가의 관심이 법운보다 지산에게 좀 더 기울어 있고 독자 또한 그의 일탈적 행위를 통한 카타르시스나 불교적 진리에 대한 통찰,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점에서 이 두 캐릭터는 한국불교소설의 한 전형을 형성한다.

사실 우리 불교문학에서 지산의 파계적 행위의 계보는 신라시대 원효에서 조선말 경허에 이르기까지 길고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어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이와 함께 이 소설에 등장하는 ‘병속의 새’와 ‘구자무불성’, 그리고 ‘파자소암(婆子燒庵)’ 화두와 이를 타파하려는 수좌들의 이야기는 불교소설만이 갖는 각별한 반전의 재미를 선사한다. 주둥이가 작은 병 속에 새를 넣어 기르다가 새가 다 크면 병을 깨뜨리지 않고 새를 병속에서 꺼내라는 것이 ‘병속의 새’ 화두인데, 이 화두의 정답이 무엇인지는 소설에 밝혀지지 않는다.

사실 화두의 답이란 것이 존재하며 그것을 언설로 표현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법운과 지산은 자신에게 주어진 화두를 해결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들은 “병을 깨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개에게 불성이 있다/없다.”는 형식논리에 갇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새의 생명이 중요하다면 병은 가차 없이 깨뜨려야 하며, 조사스님이 “개에게 불성이 있다/없다.”고 했다하더라도 그 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선가의 ‘살불살조(殺佛殺祖)’ 전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산과 법운은 옛사람들의 말에 구속되어 참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산과 법운의 차이는 분명하다. 그것은 지산이 법운에게 한 말과 정반대로 지산은 절 집안을 떠나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다 죽음을 맞는 데 반해, 법운은 과감히 속세로 나아가는 소설의 결말에서 확인된다. 다소 과장된 해석의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나, 법운이 여관에서 창녀와 ‘이층’을 이루고 속세로 나아가는 것은 정각을 이룬 부처님이 속세로 돌아와 법문을 한 것에서 시작하여 유마거사, 십우도의 ‘입전수수’, 원효와 경허의 무애행 등 여러 사례와 겹친다.

지산이 끝까지 절과 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합장 자세로 동사하였다면, 법운은 그의 행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생들이 모여 사는 번뇌의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 그의 결행에 이르는 과정이 다소 급작스럽고 돌발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산의 돌연한 죽음이 초래한 허망함을 법운이 새벽녘 도시로 진출하는 작품의 결말 행위가 어느 정도 상쇄시켜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장영우(張榮遇)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해 〈중용의 글쓰기〉 · 〈아리랑 연구〉 · 〈소설의 운명, 소설의 미래〉 · 〈우리 시대의 소설, 우리 시대의 작가〉 · 〈거울과 벽〉 ·  〈연기의 시학〉 등 평론집을 상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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