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토굴살이(268호)

강진 고을에는 명소들이 아주 많지만 나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이야말로 명소 중의 명소라고 생각한다.

강진의 백련사에 가면 나는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걸어 내려간다. 그 오솔길 양쪽 끝자락에 전혀 다른 향기로운 삶의 모양새가 놓여 있다.

서울에서 ‘천주학장이’였다는 죄로 말미암아 유배되어 온 한 유학선비의 삶이 아래쪽에 놓여 있고, 위쪽에는 세속을 버리고 엄한 계율에 따라 사는 스님의 삶이 놓여 있다.

그 오솔길을 걸으면서 괘종시계의 추를 생각한다. 시계추는 한쪽에 치우쳐 있을 때 시계는 멈추어 선다. 쉬지 않고 양쪽을 오락가락하는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우주의 원리이고 율동이다.

유배되어 온 유학선비의 삶은 타의에 의해 갇혀 산 삶이다.

따지고 보면 유배되지 않는 유학선비의 삶이란 것도 유학의 이념에 갇혀 있는 것이다. 조선조 선비들의 정신 교육장인 향교나 그 선비들이 사는 집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이념에 철저하게 갇혀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향교나 양반들의 집은 드높은 담으로 둘러 싸여 있고 육중한 권위의 솟을대문이 굳게 닫혀 있고 안쪽에 빗장이 받쳐져 있다.

양반의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채와 사랑채를 갈라놓는 담이 있는데, 안채에는 어머니를 비롯한 아녀자들이 살고 사랑채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이 산다. 후원에는 사당이 있는데 그 속에는 그 집안의 선대로부터 흘러온 정신이 괴어 있다. 그 정신은 사랑채의 아버지에게로 이어져 있다. 손님들이 그 집을 찾아가는 것은 그 아버지의 정신을 만나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정신은 성인이 가르친 ‘어짊(仁)’에 있다. 어짊은 윗사람에게 효도(孝)하고 아랫사람을 사랑(弟)하고 가엾은 사람을 구제(慈)하는 것이다.

절집은 그와 전혀 다르다. 절 안에 살고 있는 스님들의 삶도 따지고 보면 더럽혀서는 안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계율에 갇혀 사는 삶이다. 그런데 모든 절집에는 드높은 담이 없다. 담이 없다는 것은, 스님들이 깨달음과 동시에 계율을 뛰어넘는 자유자재한 초월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우주 속의 모든 것과 삶을 함께 한다는 것이고 그들을 가엾어 하고 구제한다는 것이다.

강진에 유배된 다산 정약용은 그 오솔길을 걸어 백련사로 가서 혜장(惠藏) 스님을 만났다. 다산과 혜장은 양쪽이 다 대단한 천재였다. 다산과 혜장 스님의 첫 만남에 대한 일화는 아주 재미있다.

역대의 임금들 가운데 학문의 뛰어남에 있어서 세종 임금 못지않다는 정조 임금은 다산을 조선조 최고의 학자요 정치가 · 사상가로 인정한 바 있었다. 임금을 교육시키는 경연장에서 경연을 주도하는 선비는 임금에게 가르칠 부분을 줄줄 암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그 부분과 관련된 중국의 고전들을 달달 외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것을 가장 시원스럽게 잘한 벼슬아치가 다산이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는 동서고금에 통달해 있었고 수학 · 과학 · 물리학에도 능했다.

나는 후배나 제자들과 함께 그 산길을 갈 때 수수께끼를 내곤 한다. 정다산의 아이큐는 얼마나 되었을까. 한 300쯤 이었을까? 강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저술한 책은 약 500권이나 된다. 그 책과 참고 서적들을 합하면 모두 몇 권이나 되었을까.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경기도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 책을 등에 짊어지고 간 인부는 몇 명이나 되었을까.

혜장 스님 또한 대단한 천재였다. 스물 여덟부터 해남의 대흥사에서 강백 노릇을 했는데, 배우기 위해 몰려드는 학승들이 구름 같았다. 그 혜장이 삼십대 중반에 백련사로 부임했다. 그는 스님이었지만 유학에 능했는데, 특히 주역에 통달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몰려드는 강진 · 장흥 · 해남의 유학선비들이 줄을 이었다. 어느 날 다산이 한 노인과 함께 혜장을 찾아갔는데, 혜장은 앞에 앉은 체구 강단진 노인이 천하의 다산인 줄 알지 못하고 거침없이 주역에 대하여 떠들어댔다.

그날 밤 다산과 다른 노인을 한 암자에 재운 다음 자기 거처로 돌아온 혜장은 아무래도 그 체구 강단진 노인이 천하의 큰 산인 다산인 듯싶어 당장 쫓아가 모시고 자기 거처로 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다산의 날카로운 질문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 이후 두 사람의 사귐은 깊어지기 시작했고, 다산은 자존심과 고집이 꼬장꼬장한 혜장에게 아암(兒菴)이란 법호를 주었다. 아이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라는 것이었다.

다산은 혜장과 선문답을 주고 받았고 차를 얻어 마셨다. 유배지에서의 고독함과 불안함을 위로받은 것이었다. 갇힌 삶에서 놓여나는 길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이다.

혜장은 천하의 큰 산인 다산의 학문과 삶으로 인해 절망을 거듭했고, 스스로의 삶을 재구성 재건설하려고 몸부림치다가 주지의 일을 그만 두고 대흥사 옆의 한 암자로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면서 술을 가까이 한 끝에 술병으로 나이 마흔에 입적했다. 다산이 달려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써준 만장의 내용은 그들의 사귐을 아는 모든 사람을 슬프게 한다.

정약용 선생은 다산(茶山)에 살면서 차(茶)처럼 향기로운 사람이 되었는데 그것은 그 오솔길 끝자락에 있는 백련사 혜장 스님의 선풍을 만난 덕분이기도 하다.

자기를 서책 속에 가두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그윽한 향기가 나고 탐욕 속에 자기를 가두고 사는 사람에게서는 흉측한 냄새가 난다. 나를 잘 가두는 법을 배우기 위해 나는 늘 달려가서 그 오솔길을 걷곤 한다. 내가 9년 전에 서울을 버리고 장흥 바닷가에 토굴을 짓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 사는데 나는 그것을 다산에게서 배운 것이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오지 않았더라면, 벼슬길이 탄탄대로처럼 열렸더라면 오늘의 다산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가두는 법만 알고 풀어놓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자는 오만해지고 인색해지고 옹졸해지고 고집스러워지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다산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은 ‘자기 가두어 놓고 살기’와 ‘자기 풀어 놓고 살기’를 가르쳐주는 길이다. 다산초당 쪽으로 가는 길이 ‘들이쉴 숨결’이라면 백련사 쪽으로 가는 길은 ‘내쉬는 숨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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