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단상(268호)

한 병의 물이 있다. 반쯤 차 있는 물을 두고 누군가는 말한다. “물이 반이나 있네.” 또 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물이 반밖에 없네.” 낙관적인 사람과 비관적인 사람의 태도를 비교하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어딘가에 치우치지 않고 “물이 반 정도 있네.”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병에 든 액체가 ‘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일수사견(一水四見). 다시 물을 본다. 천계(天界)에 사는 신(神)은 물을 ‘보배로 장식된 땅’으로 본다. 천신 말고도 다른 존재들은 어떻게 물을 인식하고 있을까? 인간, 아귀, 물고기는 ‘물’을 각각 물, 피고름, 보금자리로 본다. 각기 다른 존재들이 보기에 ‘물’이라는 대전제는 유효하지 않다. 같은 대상이라도 보는 이에 따라 사뭇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다는 이 이야기는 ‘태도’를 넘어서서 ‘관점’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시사하고 있다.

관점은 참으로 미묘하다. 같은 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심지어 모든 국민 앞에 평등한 ‘법’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 관점에는 주관이 개입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의 왜곡도 더 심해진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도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다르다.

언제부터인가 유명인의 강연, 인기 있는 자기계발서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주제 ―행복.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행복’한지를 묻고 나서 ‘행복’으로 향하도록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려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관점으로 행복을 정의해본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행복하기도 하고, 행복하지 않기도 한’ 사람이지 않을까.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 새로운 전환점을 생각하는 사람, 삶을 돌아보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행복하라’는 조언은 큰 쓸모가 없는 것 같다. 누가 봐도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공평하지 않다.

이때 누군가 조용히 ‘성숙’을 말했다. 삶의 기준을 ‘행복’이 아닌 ‘성숙’으로 삼으라고. 때로는 고통스럽고 인내해야하지만 이를 통해 인생의 깊이가 생긴다는 것.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이를 계기로 성숙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점점 더 익어가고 향기로워지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자 행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났다. 마음이 훨훨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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