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를 일구는 사람들(267호)

언어로 다다를 수 없는 부처님 세계
춤으로 풀어내는 ‘마묵무용단’

벼루에 먹을 갈다 - ‘마묵(磨墨)’

종이에 글씨를 쓰기 위해 선행돼야만 하는 행위.
마묵을 하면서 옛 선비들은 마음을 가다듬었고
몸을 움직이기 전에 마묵무용단 단원들은 먼저 마음을 다스린다.
무대가 밝아오기 전 내면에 집중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일은 하나의 종교의식과도 같은 일.
세상을 규정하는 ‘언어(言語)’를 넘어서서 부처님 세계를 표현하는 마묵무용단을 만나봤다.

2013년 11월, ‘아난아, 아난아(능엄경)’. 육근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육경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새겨진 나무토막을 오브제(objet)로 사용했다.

불교경전 소재로 한
새로운 불교무용 발표

동양사상 가운데서도 특히 불교적 심성에 주목하고 있는 마묵무용단은 〈관무량수경〉, 〈능엄경〉 등 불교경전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하며 불교무용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다. 2011년 6월 28일, 대학로 성균소극장에서 무용극 ‘하얀코끼리’를 초연한 것을 시작으로 마묵무용단은 ‘낯선 기류’, ‘바르도(Bardo)’, ‘아난아, 아난아(능엄경)’, ‘관무량수경’, ‘누워있는 선(禪)’, ‘잡감(雜感)’ 등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했다.

마묵무용단의 작품 안무 및 연출·감독을 맡고 있는 윤민석 대표는 한국무용을 전공했고, 프랑스에서 현대무용을 배웠다. 그리고 마묵무용단을 창단한 이후부터는 불교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정재만남성무용단과 국립국악원무용단에서 무용수로 활동했던 그는 1990년 한국무용협회 신인콩쿠르 한국무용 부문 특상(1위)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8대학 무용과를 수료하고 조세프 루시리오(Joseph Roussillio) 무용단에서 활동했다. 프랑스의 여러 축제에 참가해 안무 활동을 펼쳤던 그는 귀국 후에는 2007년 ‘평론가가 뽑은 제10회 젊은 안무가전’, 2005·2006년 ‘Modern Dance Festival’, 2006·2012년 ‘SIDance 우리춤 빛깔 찾기’ 등에 참여했다.

전통무용에 깊이 심취했던 윤 대표는 전통무용을 더욱 확장해 새로운 창작을 하고 싶었고, 전통무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다. 그는 무용이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위해서는 간절함과 지극함이 녹아있는 일종의 ‘종교적인’ 마음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용수에게 육체적인 훈련은 분명 중요하지만 마음훈련에 훨씬 더 비중을 둬야 한다는 것.

그러나 당시 발레나 현대무용 등을 전공한 사람들은 한국무용 전공자를 내려다보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무용에 비해 상대적으로 움직임의 진폭이 크지 않기 때문에 육체적 훈련이 비교적 수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같은 편견에 맞서 윤 대표는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동안 유럽 현대무용을 한국무용에 접목시키며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움직임을 연구했고, 현 시점에서는 불교를 소재로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이 만나는 지점에 ‘마묵’만의 향기로운 꽃을 피워보였다. 그렇다면 윤 대표는 언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어떻게 불교경전을 작품으로 만들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일까?

프랑스 유학 시절,
한 권의 책으로 불교와 조우

2013년 6월, ‘바르도(Bardo)’. 무용수 강민경 씨는 “고무줄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변형하고 움직이면서 입체적으로 구현했던 공연 ‘바르도’가 인상깊다.”고 말한다.

“30대 초반, 유학 2년차에 외환위기(IMF)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문화원에 갔는데, 한국어로 된 책이 많이 꽂혀 있기에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그 자리에서 책 한 권을 읽었죠. 그 책이 숭산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부처님께 재를 털면〉(1999)이었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우연히 펼쳐 든 책 한 권으로 윤민석 대표는 부처님 가르침과 조우했다. 마치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나무판자를 만난 것처럼. 무한히 크고 넓은 인과의 그물에서 지극히 필연일지도 모르는 이 사소한 사건은 윤 대표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서 빠른 시간 내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다보니 강박관념이 생겼습니다. 생활비를 벌며 어학도 배워야 했고, 춤도 춰야 하는데 제대한 직후라 덩어리근육이 뭉쳐서 춤도 배우지 못했죠.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스트레칭을 하다 보니 몸도 많이 아팠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잘 때마다 가위에 눌려 잠조차 편히 잘 수 없었던 그는 숭산 스님의 책을 만난 뒤 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윤 대표는 스님과 제자들의 문답을 읽고 또 읽으며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어찌나 많이 읽었던지 거의 외우다시피 한 정도. 윤 대표는 책을 읽는 데에서 나아가, 책에 소개된 수행법을 생활 속에서 하나 둘씩 실천해 나가며 어려웠던 유학시절을 버텨냈다. 그리고 2003년 6월,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첫 교편을 잡았다.

관객과 부처님 가르침
무용으로 이어주고파

2016년 5월, ‘누워있는 선(禪)’ 공연 모습.

그렇다면 마묵무용단을 ‘불교무용단’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춤의 기법이 전통불교무용과는 다를뿐더러 작품의 소재나 주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은 이제껏 윤 대표가 작업해온 방식이 마묵무용단의 첫 작품인 ‘하얀코끼리’ 이후로 완전히 바뀌었다고 평가한다. 창단 당시부터 함께해 온 무용수 김석중 씨는 첫 작품 ‘하얀코끼리’를 이렇게 회상한다.

“창단 직전의 공백기와 겨울 내내 차갑고 무거운 오브제로 연습을 해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작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 바로 ‘하얀코끼리’입니다. 매년 공연하는 작품은 달라지지만 ‘하얀코끼리’ 이후 꾸준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윤민석 대표는 부처님 가르침을 춤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관객들과 부처님 가르침 사이의 가교 역할을 마묵무용단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많은 이들이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을 두루 섭렵한 윤 대표에게 주목했지만, 그는 크고 화려한 무대 대신 ‘불교’를 소재로 소극장 공연에 몰두했다. 때로는 흔들릴 때도 있지만 윤 대표는 아직도 자신이 좋아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소신을 걸고 있다.

한편, 마묵무용단의 첫 작품 ‘하얀코끼리’는 성균소극장 이철진 대표의 눈에 번쩍 띄었다. ‘하얀코끼리’에 담긴 불교적 색채를 독실한 불자였던 이 대표가 한눈에 알아본 것. 불교경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고 오래도록 발원해온 이철진 대표는 윤 대표에게 자신의 숙원을 이야기했고, 윤 대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후 윤 대표는 〈관무량수경〉, 〈티베트 사자의 서〉 등을 읽으며 불교에서의 ‘죽음’과 정토신앙에 대해 공부했다. 이렇게 만든 작품이 ‘바르도(Bardo)’와 ‘관무량수경’이다.

“누군가 ‘아!’ 하고 깨닫도록 하려면 제가 바로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와 소통하며 작업하는 단원들에게도 전달되거든요.”

온갖 언어와 생각이 끊어진 ‘아!’ 하는 찰나. 그 잊지 못할 순간을 무용을 보는 관객들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작품을 만들고 싶기에 윤민석 대표는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는 학문적으로 불교를 배운 적은 없지만, 경전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2500년 전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기 때문이라고.

“누구든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이 삶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를 아프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최대한 업(業)을 쌓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거죠. 그게 제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한 테두리입니다.”

염화미소와 불이법문, 그리고 춤
언어가 닿지 않는 깨달음의 세계

‘누워있는 선(禪)’을 리허설 중인 무용수 김석중 씨.

2017년 제3회 불교무용대전에서 마묵무용단은 ‘잡감(雜感)’을 선보였다. 잡감이란 ‘형형색색의 오만가지 생각과 감각’이란 뜻인데, 윤 대표는 이를 ‘중생’으로 보았다.

“〈반야심경〉에서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감각들이 모두 공(空)하기 때문에, 색(色)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우리가 느끼는 여러 가지 감각과 생각은 ‘중생이 빠져있는 늪’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대부분은 말로 설명되고 말로 이해된다. 그러나 윤 대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때나 춤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 할 때마다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곤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곧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불가(佛家)에서는 언어가 지닌 한계를 설하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설법 하실 때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어보였던 이야기, 수많은 보살들이 ‘불이법문’을 정의하고 난 뒤, 문수보살이 다시 그 뜻을 되묻자 침묵으로써 가장 높은 법문을 내린 유마거사 이야기, 수많은 선사(禪師)들에 얽힌 이야기, 이야기들…….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보인 ‘염화미소(拈花微笑)’나 유마거사의 ‘불이법문(不二法門)’처럼 언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온전한 깨달음 그 상태를 관객들에게 직접 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윤 대표가 마묵무용단을 통해 펼치고 싶은 공연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다보면 뭔가 깨닫는 순간이 오지만 그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조건이 맞으면 다시 그 상태를 일깨워낼 수 있어요. 관객들이 마묵무용단의 공연을 보면서 함께 ‘아!’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말이란 편리한 도구이지만, 깨달음을 표현하거나 전하는데 있어서 때로는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절대의 경지. 분별과 대립, 차별을 떠난 부처님 세계를 그려내는 마묵무용단. 육체의 기교를 넘어서서 전하는 그들의 다음 공연을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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