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도량에 핀 연꽃(267호)

벌거숭이 소백산에 200만 그루,
10만평 논밭에 농작물 키우며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종풍 드높인 구인사

 

부처님 당시 생활습관인 탁발과 보시를 사원경제의 근간으로 삼는 남방불교와 달리 북방불교는 오랜 기간 ‘자급자족’을 통해 사원을 유지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전통을 이어왔다. 당대(唐代)의 고승 백장회해(百丈懷海)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부터 시작된 이런 전통은 1,3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색 · 변질돼 그 명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렇다고 그 맥이 단절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그 전통을 오롯이 계승하고 있는 도량이 있으니 바로 천태종 총본산 소백산 구인사다.

못자리에 비친 스님들의 모습.

전란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1950~60년대는 쌀밥은커녕 꽁보리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힘겨운 시절이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보릿고개 때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대신해야 했던,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외국의 원조를 받아야했던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는 먹을거리만 부족했던 게 아니었다. 추운 겨울, 도시에는 일부 연탄이 보급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정에서는 제대로 된 난방연료가 없어 인근 야산에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일제의 수탈에 이은 전란과 도·남벌로 전국의 산이 벌거숭이가 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민둥산의 비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정부는 1967년 산림청을 설치하고, 국가시책으로 녹화사업에 나섰다.

1970년 경 소백산 조림작업 중에 점심공양을 하는 신도들. 당시 소백산은 민둥산이었다.
1968년 구인사는 국가시책에 부응해 자발적으로 소백산 조림사업에 나섰다. 신도들이 가마니로 등짐을 만들어 식목할 나무를 옮기고 있다.
조림사업을 완료한 후에도 구인사는 인근 지역에 꾸준히 식목을 해왔다. 1979년 신도들이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고 있다.

구인사 대중 1968년부터
5년간 소백산 일대에 200만 그루 조림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는 정부의 이 같은 시책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사찰이다. 구인사는 1968년 천태종 중창조인 상월원각대조사의 원력 아래 생산불교의 일환으로 10개년 조림계획을 세우고, 인근 54만여 평의 황폐화된 국유림을 대부(貸付)받아 전 종도가 조림(造林)에 나섰다. 그런데 천태종은 10개년 계획을 3년 만에 달성한다. 그러자 다시 조림 5개년 계획으로 세우고 100만여 평의 임야를 추가로 빌려 잣나무를 비롯해 유실수와 낙엽송을 심는데 이마저도 3년 뒤에 마무리한다. 그리고 1973년 4월 6일 ‘200만본 조림 달성 기념법회’를 봉행했다.

6년간 심은 나무는 160여만 평(500만㎡) 임야에 200만 그루에 달했다. 화전민들이 살면서 민둥산이 되어버렸던 충북 단양군 소백산 일대는 전국에서 동참한 천태종도들에 의해 울창한 숲으로 거듭났다. 충북도와 농림부는 1970년 연말, 산림조성에 대한 천태종의 공적을 인정해 상월대조사께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국가적 사업에 자발적으로 동참해 ‘나무 심는 종단’, ‘녹색혁명을 이룩한 종단’이란 훈장 같은 값진 별칭을 얻은 것은 덤이었다.

민둥산이었던 구인사 주변은 50년 만에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50년, 구인사는 매년 16만 그루의 잣나무에서 2,000kg(40kg 50포대) 안팎의 잣을 수확하고 있다. 잣 방울을 따고, 일일이 손으로 까는 일은 구인사 대중들의 울력으로 이루어진다. 시중 가격으로 추산할 때 1억여 원 가량인데, 판매하지 않고 공양물로 올리거나 선물용으로 사용한다.

소백산에 200만 그루를 심은 조림 불사는 국가시책에 대한 부응이란 측면도 있지만, ‘천태종’이란 종단명을 정부에 등록(1967년 1월)한 직후 주경야선(晝耕夜禪)을 통해 생산불교를 지향하는 한편 자급자족과 종단 수익기반을 다져 백년대계를 계획하고자 한 상월대조사의 원력과 종도들의 똘똘 뭉친 애종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대작불사였다.

모내기를 하고 있는 구인사 사부대중.
지난해 6월 구인사 사부대중들이 인근 밭을 갈고 있다.

낮에는 농사, 밤에는 수행
‘잠 실컷 자보는 게 소원’

상월대조사는 평소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염불수행을 하라고 가르치면서 제자들에게 주경야선을 강조했다. 구인사 인근은 화전민이 살던 산간오지였기 때문에 자급자족을 위해 대중들의 울력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그보다 당나라 때 ‘백장청규’를 제정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의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직접 실천하고자 한 상월대조사의 수행철학에 기인한다.

“새벽에 일어나 늦은 밤까지 논밭에서 일을 한 스님들은 사찰로 돌아와 몸을 씻은 후 다시 선방에 모여앉아 수행을 했어요. 아무리 피곤하고 고되어도 빠질 수 없었어요. 빠지는 스님이 있는 경우, 대조사께서 사부대중이 다 모인 자리에서 호되게 꾸짖으셨기 때문이죠. 가난한 살림살이에 농사와 수행이 너무 힘들어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어요. 잠이 부족해서 ‘잠 한번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란 말을 하곤 했지요.”

생전에 상월대조사를 모셨던 원로 비구니 스님들이 털어놓은 추억담이다. 이 같은 주경야선, 선농일치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구인사에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다. 매일 아침, 해당 소임을 맡은 스님들과 기도를 위해 구인사를 찾은 신도 중 신청자들이 영춘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밭을 맨다. 논이 1만4,000여 평, 밭이 8만 평에 달하다보니 일손은 항상 부족하다.

지난해 10월 스님들이 추수한 벼를 햇볕에 말리고 있다.

재배하는 농작물은 20~30가지에 달한다. 1년 쌀 수확량이 40kg 420가마니에 달하고, 옥수수·콩·깨를 비롯해 김장에 사용되는 배추·무·고추·대파도 직접 재배한다. 농작물 생산량은 일정치 않는데, 10년 전까지만 해도 김장을 할 때 소요된 재료가 배추 4만포기, 무 3.2톤, 고춧가루 2.4톤, 소금 3톤, 생강 220kg, 마늘 150접에 달했다. 지금은 김치 소비가 줄어 2만5,000포기 정도로 줄어들었다.

사과와 배·포도 등 과수 농사도 짓는데, 모든 농작물은 외부에 판매하지 않고, 경내 대중 스님들과 기도·참배객들의 공양물로 쓴다. 물론 화학비료와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무공해 청정 농작물이다. 이런 농작물을 연중 보관해야 하다 보니 서너 곳에 분산된 창고가 2,000여 평이 넘는다.

농작물 30종 수확해 자급자족
‘생산불교는 구인사의 큰 자랑’

“구인사는 대중공양에 필요한 식재료의 대부분을 농사를 지어 충당하고 있습니다. 농사에는 스님들은 물론 기도 차 구인사를 찾은 신도들도 참여하는데, 사부대중이 함께 땀을 흘려 맺은 결실로 구인사의 모든 대중이 공양을 하는 셈이죠. 농사 울력에 손을 보태는 신도들은 모두 ‘복 짓는 행위’로 여겨 즐겁게 동참합니다. 모두가 아무 욕심 없이 즐겁게 일하면서 하심(下心)을 배우지요. 필요한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이러한 생산불교는 구인사의 큰 자랑입니다.”

영농국장 보국 스님의 설명이다. 스님은 “농사를 지으며 밭에 씨를 뿌리고 제때 잡초를 속아내면서, 우리 내면에 깃든 부처의 씨앗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마음에 깃든 번뇌란 잡초를 잘 단속해야 한다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면 바로 이게 바로 선농(禪農)일치가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천태종이 내세우고 있는 3대 지표는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이다. 민둥산을 조림하겠다는 국가의 시책에 자발적으로 앞장섰으니 애국불교요, 가사장삼을 작업복으로 삼아 목탁 대신 괭이를 쥐어 수만 평의 농지를 경작해 자급자족을 하고 있으니 생활불교요, 그 일련의 과정에 승속이 함께 동참하니 바로 대중불교의 실천이자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소비가 아닌 생산불교를 지향하는 천태종 구인사의 대중들이 흘린 땀방울이야말로 소백산이란 연못에 핀 한 떨기 연꽃이 아닐까?

잣 방울에서 잣을 골라내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는 스님과 신도들.
지난해 김장을 하고 있는 구인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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