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267호)

쉽고도 어려운 불자의 삶

불자로 살기는 쉽고도 어렵다. 이 말은 무엇인가? 불자의 삶에는 쉬운 측면과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 쉽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부처님께서 팔만 사천 법문을 통해 모든 중생의 근기에 맞게 상세한 방편을 베풀어 놓으셨으니, 그 가운데 자기에 맞는 것만 잘 선택하면 된다는 점에서 쉽다. 다르게 말한다면 취향과 능력에 맞는 수많은 ‘탈 것[乘]’을 마련해 놓으셨으니 골라서 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자상하고도 간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불자로 살기 쉽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렵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동전의 양면처럼, 그렇게 수많은 방편과 탈 것이 있는데, 그 방편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어렵고, 또 수많은 탈 것을 제대로 쓰고 제대로 타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부처님 말씀을 올바르게 실현시키지 못하는 불자

오늘은 그 두 측면 가운데 어렵다고 하는 측면에 대해 말을 해보기로 한다.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오늘의 현실에 올바르게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불자들이 다 알고 있듯이 불교는 방편설이요, 대기설(對機說)이다. 약간은 의미가 다르지만 그 두 가지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문자 그대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격류를 건너기 위한 뗏목처럼 수단 방편이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말씀 그대로가 진리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기설의 기(機)라는 것은 조건과 상황을 말한다고 할 수 있으니, 부처님의 말씀은 어떤 특수한 조건과 상황에 주어진 말씀이다. 그렇다면 과거와 현재의 조건은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른가?

사람의 삶에 본질적인 문제야 변함없으니,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인 것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나니,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도 그만큼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근본적인 것은 같다고 할 수 있으므로 부처님 말씀의 근본 뜻을 파악하여야 한다. 그 근본 뜻이 현실이라는 조건과 상황에서는 어떻게 드러나고 적용되어야 하는가를 살펴, 오늘의 상황에 맞는 변화를 꾀해야 한다.

그러니 어렵다면 얼마나 어려운가? 근본적인 뜻을 파악해야지, 현실의 상황과 조건을 살펴 알맞게 적용해야지……. 그저 “믿습니다!”로 끝나지 않는 종교, 끊임없이 모색하고 탐구하며 현실에 올바르게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종교가 바로 불교인 것이다.

유교 국가에서의 불자의 삶

그런데 불교는 심하게 말하면 천년 이상 그 ‘가르침을 통한 현실적인 삶’을 이끌어 가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중국에 불교가 전파되면서부터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불교가 중국에 와서 보니 중국에는 유교라는 상당히 강한 대항마가 존재하였고, 유교는 중국의 토착 사상으로서 그 지역의 문화와 정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인륜을 중심으로 하면서 현실적인 삶을 이끌어 가는 강력한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불교가 거기에 대응하여 불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현실적인 삶의 지침을 내 놓고, 그것을 통해 유교와 경쟁하기는 힘든 면이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현실적인 삶의 윤리 영역은 유교의 기득권을 적당히 인정하고, 주로 종교적인 행위와 수양 및 수행의 측면에 집중하였다고 생각된다.

쉽게 말하면 현실적인 삶은 삼강오륜을 비롯한 유교적인 윤리로 따르고,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 등은 불교가 맡겠다는 식이다. 유교에 없는 절충적 윤리체계를 내놓았을 뿐, 치열한 모색 없이 그냥 저냥 지내온 세월이 너무도 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중국을 중심으로 발달한 대승불교의 국가들에서 보이는 불교의 신앙형태가 아직까지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유교라는 사상이, 이제는 거의 자취를 감춘 현재에도 불교는 구체적인 지침을 통해 삶을 이끌어가는 건강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주로 관념적인 이야기나 기도 수행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분들 많을 줄 안다. 그렇지만 대놓고 질문해 보자.

“당신은 불자로서 다른 종교인과 다른, 어떠한 삶의 원칙을 지니고 살아가십니까?”

정말 대단한 분들 빼놓고는 쭈뼛 쭈뼛 자신 있는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신앙과 수행의 영역, 그리고 계율의 원칙

사람 사는 원리야 거기서 거기고, 우리가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라는 것도 거의 비슷한 거 아니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만 공자는 그것에 절대 반대다.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어떻겠습니까?”하는 물음에 공자는,

“그렇다면 은덕은 무엇으로 갚을래? 은덕은 은덕으로 갚고 올바른 도리로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엇이라 하실까? 정답을 내고자 하는 물음이 아니다. 사상에 따라 그만큼 구체적인 행동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가 구체적인 삶을 이끌어가는 원칙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불교가 반쪽짜리 종교라는 것을 말한다. 신앙과 수행의 영역에만 집중하는 종교, 현실적인 삶의 원칙과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데는 뒷전에 선 종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계율의 문제이다. 가장 기본적인 계라고 할 수 있는 오계를 보자. 계를 주는 분도 받는 분도 계 지킬 생각이 별로 없는 듯하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주된 원인은 바로 ‘술 마시지 말라!’는 계에 있다. 술이라는 것이 거의 삶의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술 마시지 말라!’는 계율은 거의 사문화된 계율에 가깝다. 어떤 절의 법회에 갔다가

“이 계율을 지킬 수 있는 분 손들어 보세요!”

했더니 어떤 분이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신기한 생각이 들어

“어찌 그리 자신이 있으십니까?” 했더니,

“전 체질적으로 술을 전혀 못 마십니다.”

해서 모두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게 바로 ‘술 마시지 말라!’는 계율의 현주소이다. 그런데 계율 가운데 하나의 계율이 권위를 잃으면 단지 그 계율에만 문제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란히 거론되는 나머지 계율 모두 그 권위를 잃게 된다. 그러니 수계하는 분이나 계를 받는 사람이나 모두 건성으로 주고받는 계율이 된다. 그리고 계율이 이렇게 힘을 잃으면, 우리 삶을 이끌어 가는 원리가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군법당에서는 궁여지책인지 ‘술 마시지 말라!’는 계율을 ‘술 마시되 취하지 말라!’고 바꾸어 설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술 마시고 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지는 둘째 치고, 그렇게 적당히 바꾸는 것 자체가 계율의 권위를 떨어뜨린다.

현실에서의 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

무슨 권위에 의해 그렇게 계를 바꾸었는가? 여기서 바꾸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 한다는 강제력이 있는 계율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확고한 권위가 있는 해석에 의하지 않고 적당히 절충식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전 종단의 뜻을 묻고, 권위 있는 종단 기구 등을 통해 이 시대의 계율을 새롭게 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술 마시지 말라!’는 계율은 ‘마약 하지 말라!’ 정도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계율은 금과옥조로서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많은 계율들이 사문화되고 있다. 세세한 율로 들어가면 지금의 스님들도 계율 제대로 지키는 분 거의 없다. 비구 스님도 앉아서 소변보아야 된다는 율이 있는 데, 그런 스님 거의 없지 않은가? 또 돈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돈을 사용하지 않는 스님 계신지? 이런 상황에서 그런 계율들에 대한 치열한 모색을 통해 시대에 맞는 계율을 다시 정하지 않으면 계율 자체가 모두 권위를 잃게 된다.

불교가 반쪽짜리 종교를 벗어나려면 우선 계율을 새롭게 해석하고 지켜나가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리고 계율을 바꾸는 것이 종교적 권위 문제에 부딪쳐 힘들다면, 백장 스님이라는 위대한 선배의 예에 따라 새로운 청규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백장청규로 잘 알려진 ‘하루 노동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청규는 계율에 대한 혁명적인 해석을 통해 나온 것이다. 삶을 위한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본디의 율에는 위배되는 것이다. 스님들은 모든 힘을 수행에 쏟아야 되는 존재이기에, 삶을 위한 노동조차도 금지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중국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조건과 노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일하라!’는 혁명적인 청규를 제시한 것이다. 요 근래 들어 일어나고 있는 청규 운동들은 이런 측면에서 주목받아야 할 것이며, 불자의 삶을 특징짓는 불교적 삶의 원칙 제시로 나가야 할 것이다.

올바른 계율과 올바른 삶

일단 이렇게 근본 계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게 되면 그로부터 많은 세부적인 원칙들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산목숨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바탕으로 환경운동의 지침들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또 과소비 문제를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율과, ‘산목숨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통해 조명할 수도 있다. 과소비는 다른 생명의 몫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몫을 도둑질 당한 생명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도태되고 죽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간접적인 살생이 된다.

이런 식으로 세분화하게 되면 보다 낳은 삶과 세상을 이루어가는 많은 원칙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 불자들이 이 세상을 바르게 세워가는 주역이 되며, 불교가 이 세상을 이끌어 가는 지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다.

지금의 불교는 이런 이상적인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 불자들은 현실적인 삶의 원칙은 적당히 이것저것 절충하여 세우고, 기복 아니면 수행에 몰두한다. 다산 정약용이

“불교는 마음 닦는 것을 일로 삼지만, 우리 유교는 일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다.”

고 비판했던 모습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 세상을 앞서서 이끌어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주축이 되지는 못하고, 늘 현실문명 병폐만을 지적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에 머물러 있다.

세상은 구조적으로 괴로움을 생산해 내는데, 그 괴로움을 생산해내는 구조를 고치려 하기보다 이미 생산된 괴로움을 처리하는 것도 버거워하고 있다. 이 모든 잘못된 모습들은 바로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계율이 바로 서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원인이 있다.

이제 불자 하나하나가 올바른 의식으로 치열하게 모색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삶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가? 또 충분한 권위를 지닌 범종단적 기구를 통한 계율 재해석, 청규 운동 등을 통해 불자들의 삶 전체를 이끌어가며, 이상적인 세계를 실현해가는 원칙들을 끊임없이 제시해야 한다.

반쪽짜리 종교가 아닌 온전한 종교로 바로 서는 그 첫걸음이, 바로 계율의 올바른 정립에 있다.

 

성태용(건국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술연구진흥재단 인문학단장, 건국대 문과대 학장, (사)우리는선우 대표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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