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으로 여는 불교(267호)

어느 임금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는지를 살피려고 성을 나와 마을로 갔다. 가난하게 보이는 어떤 초가집 앞에 갔더니 안에서 도란도란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이 동한 임금은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였다. 아기가 걸음연습을 하는데 부모와 먼저 태어난 남매가 같이 지켜보며 도와주고 있었다. 가족도 행복한 모습이었고 임금도 내면이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또 다른 집으로 갔다. 그 집은 커다란 기와집으로 언뜻 보아도 부잣집이었다. 임금은 이 집은 얼마나 더 행복할까 하는 기대로 가까이 갔다. 그러나 안에서는 한숨소리와 함께 원망하는 고함도 터져 나왔다. 들어보니 이웃동네 사촌이 자기가 사려던 땅을 먼저 사버린 것을 알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임금도 내면이 불편해졌다.

어렸을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이다. 그때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의 욕심을 경계하는 뜻 정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잘 들여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본인의 내면세계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세계가 어떻든, 사람이 반응하고 삶에 대응하는 기준은 자기 내면이다. 이런 사실은 「섭대승론(攝大乘論)」에서 가르치는 사승마(蛇繩麻)의 비유, 즉 어두운 밤에 뱀인 줄 알고 깜작 놀랐던 것이 아침에 보니 삼으로 꼬아 놓은 굵은 노끈임을 알았다는 비유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니까 굳이 유식학(唯識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문제는 모두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인식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보다 완전한 내면의 평안을 확보하고 싶어하는 우리는 그러한 심리의 작용이나 발생의 기제(機制)와 원인에 대하여 전문가에게 의존한다.

때로는 정신과에서 진단을 받고 약물을 복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심리전문가에게서 상담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프라이버시 등 몇 가지 고려 사항이 있어 어느 쪽이나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난점도 있다.

그러면서도 동서양에서는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법을 다양하게 추구해 왔고 실천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서 그 길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인간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많은 소중한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기둥이 되는 가르침, 그것이 바로 종교가 아닌가?

그것이 생성된 문화권에 따라 명칭과 교리와 언어, 그리고 실행방식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인간을 위해서 인간에게 행복한 상태와 편안한 내면을 가져다주는 유용한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은 공통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종교적인 삶이 다소 높은 이상을 지향하고 있어 그 길이 세속을 사는 사람들로서는 쉽게 실행할 수 없는 부분, 누구나 접근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는 하다.

현대는 동서양의 문화적 경계가 많이 허물어진 세상이 되었고, 사람들에게는 지금까지 낯익지 않은 것에서 매력을 느끼는 속성이 있고, 그런 면에서 서로 몰랐던 부분에 대하여 호기심과 선망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19세기에 들어와서 동양에서는 서양문물에 커다란 쇼크를 받고 적극 수용하려고 했다. 마침 국제정세나 소위 과학적 물질문명에 힘입어 비교우위를 차지한 서양의 가치가 마치 점령군인양 위세를 떨치며 동양으로 침범해 왔다.

그리하여 지금은 어느 정도 글로벌화 된 지구촌 개념이 대두되고 동서양간에 커다란 격차는 사라졌다. 오히려 전통적인 동양의 정신문명이 서양에서 더 주목 받고 매우 강력하게 수용되고 전파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동양의 정신문명이라고 함은 우리나라의 선도나 일본의 신도 혹은 중국의 도교, 유교도 포함되겠지만 보다 좁힌다면 그 모태는 인도사상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즉, 불교(힌두교 포함)가 서양에 많이 어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양은 물질문명의 본거지이니까 아무래도 우리보다 일찍 현대생활의 고달픔에 염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 내면의 평안을 추구하는 길을 찾는 과정에서 바로 그동안 잘 몰랐던 불교에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는 곁에 가까이 있는 보물을 모르고 남의 집에서 보물을 찾느라고 애쓰고 있는 듯하다. 그런 우리의 모습은 전래의 가보를 잘못 보관하여 흙투성이가 되었는데 그 가치를 몰라 팽개쳐두고 뭐 다른 좋은 것이 없냐고 남의 것을 기웃거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비유하고 싶다.

시중에는 사람의 내면을 편안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많은 심리관련 프로그램들이 있다. 그것들은 주로 서양에서 개발된 방법론들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며 그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형식을 취한다.

물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 연원이 동양인가, 서양인가는 크게 중요한 사항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서양에서는 그런 분야에 대한 접근이 그동안 공개적으로 확장성 있게 잘 이루어져온 것에 반하여 동양에서는 아무래도 암묵적으로 다소 폐쇄적으로 전해오지 않았나 하는 감이 들기는 한다.

오늘날 학문분야에서 심리학의 뿌리를 누구나 프로이드에서 찾는 것이 정설화 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가 19세기 말엽 처음으로 무의식이라는 개념, 무의식 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접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무의식 개념이라는 점에 집중한다면 동양에서는 다소 늦게 잡아도 서양보다 1천6백 년 앞선 기원전 3세기에 말라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무의식을 발견하였다. 프로이드 보다 훨씬 앞선 기원전 1세기~3세기에 인간의 심층심리를 다룬 유식학이 성립된 것이다. 바수반두(세친世親)가 「유식30송」을 지어 유식학을 집대성한 시기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1천5백년이나 앞선 셈이다. 다만 그것이 서양에는 교류가 되지 않아 서양에서는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마치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양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그동안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의 창시자로 알려진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고려의 금속활자가 서양에 알려졌고 구텐베르그가 모방했던 사실이 서양에서도 확인되어, 이제는 고려의 금속활자가 인류 최초였음이 정설이 되었다.

때문에 잊어서는 안 된다. 초기불교 즉, 부처님 생존 시의 가르침은 사실 바로 인간 심리에 대한 가르침 그 자체였다. 그러니까 불교는 종교이기 이전에 심리학이었던 셈이다. 거기에 차츰 형이상학적인 교리와 후세의 해설이 더 해지면서 점차 내용·형식 등 여러 면에서 종교화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머지않아 심리학의 시원도 프로이드가 아니라 부처님 혹은 아상가(무착, 無着)나 바수반두임이 정설화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앞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좀 더 편안한 내면의 삶,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 등에서 보다 자유롭게 대응하고 자기답게 사는데 도움이 되기 위하여 때로는 치유사례도 곁들이며 불교와 현대심리학의 관계 혹은 불교적 심리학의 세계에 대하여 함께 탐색해 보고자 한다.

심교준 (한국NLP연구소장)
동국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일본 산노(産能)대학교 비즈니스스쿨 마케팅, 산업심리과정을 수료했다. 광운대학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LG전자 영업전략연구소장, LSR연구소장을 거쳐 현재 광운대 겸임교수, 상지대 대학원 교수, 한국코칭학회 부회장, 한국신경-언어프로그래밍협회 부회장, 한국NLP교육실천학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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