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눈(267호)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가야사 복원’ 문제가 주목받고 있다. 노무현 정부 때도 나온 얘기지만, 이명박 ·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중단되었던 사안이다. 가야사, 특히 가야불교는 일제식민사학의 영향으로 기성 사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금강의 눈’을 통해 가야사 논쟁의 배경과 홀대받아 온 가야불교(가야사), 향후 연구과제에 대해 알아봤다.

하동 칠불사. 칠불사는 김수로왕의 왕자 일곱 명이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에 흩어져 수행한 후 성불한 것을 기뻐하며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야불교라는 명칭은 ‘가야시대의 불교’, ‘가야시대에 전래된 불교’ 또는 ‘가야시대에 전래되고 전승되어 오다가 현재 전승되고 있는 가야의 자취가 서린 불교’, ‘신라에 의해 멸망 되었지만 신라나 백제의 불교 속에 습합되고 전승되어 온 불교’ 등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겠다.

가야의 역사나 불교사는 항상 가야 고대사와 함께 거론된다. 고대사의 영역은 그 역사가 오래되어 유적이나 유물, 그리고 문헌을 통해 정확하고 객관적인 고증과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그 가치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는 부분이다. 특히 패망한 나라의 자취는 승리한 나라의 역사에 파묻혀 버리거나 왜곡되어 전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가야의 역사나 불교사도 이러한 보편적 흐름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의 역사나 가야불교사가 끊임없이 거론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패망한 가야의 혼이 역사의 물결 속에 그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가 현재의 시공(時空)에서 강하게 작용해서일까? 아니면 남인도를 출발해 아시아의 여러 해항(海港)도시를 거쳐 한반도 서남해안의 해항도시로 전해졌으리라 추측되는 해양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남방불교가 베일을 벗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시기가 되어서일까?

단재 신채호의 역사관을 참고하면,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통일신라와 고려와 조선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정체성이 역사에 등장했다. 하지만 가야는 신라에 습합된 이후 아직도 역사의 무대에 제대로 그 독자적인 정체성을 단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다.

어찌됐든 가야사가 베일에 가려져 역사의 뒤안길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대가야·소가야·아라가야·성산가야·고령가야·금관가야 등 여섯 가야는 여러 고분들과 유적들을 땅에 간직한 채 도처에서 이를 밝혀줄 인연 있는 사람과 시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식민사학 그늘에 갇힌 가야불교

현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재임시절 추진했다가 중단됐던 가야사 복원사업을 다시 진행하겠다고 밝히면서, 이 사안이 주목받고 있다. 그 목적이 정치권의 분석처럼 영남과 호남의 화합 그리고 왜곡된 역사의 재정립에 있다면 이 과제의 진행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가 특정 집단이나 특정 지역의 또 다른 지역이기주의를 조장하는 전시행정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사실을 침소봉대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야기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나 미래의 지침이 되고 방향성 정립에 영향을 끼쳐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이라도 가야의 역사, 그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감추어졌던 가야불교사의 베일을 걷어내야 한다. 가야사 논쟁에서 가야불교사가 홀대를 받아온 주된 이유는 고대사 연구에서 항상 문제가 된 고증부분에 있어 문헌의 결핍이나 유적 · 유물의 부재에 있다.

이와 함께 종교적 성향이 다른 학자들에 의한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주장이 일부 언론에 의해 마치 정당성을 확보한 양 위장되어 보도된 점도 원인 중 하나라고 하겠다.

덧붙인다면 일본제국주의적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 사유방식에 함몰된 학자들, 2차적 억압이라 할 리오리엔탈리즘(Re-orientalism)의 사유를 토대로 일제의 조선 침략과 식민통치에 동조한 조선총독부사학파 잔당들의 전통을 승계한 사학자들의 무리가 일익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대주의적 사고가 골수에 박혀 중국 문물과 사상을 흠모하는 모화사대주의 사관을 가진 자들도 예외는 아니라고 본다.

식민사학으로 역사를 공부한 사학자들이 강조하는 고증사학이라는 진리(?)의 범주에서 이들의 담론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여타 학자들의 무비판적 인식 행태가 이를 덧붙여 지지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가 가야사 중에서, 특히 가야불교사를 조작된 것으로 폄하해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 뒤편으로 가둬버리려는 의도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가야불교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기록 자체가 후대의 불교적 윤색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불교적 윤색이라는 추측도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의도일 뿐 명확한 증거는 없다. 〈삼국유사〉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야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삼국유사〉의 저자가 일연 스님이라는 선입견을 전제로 한다. 이 선입견으로 〈삼국유사〉를 바라본다면 유교적 사관에 의해 기록된 〈삼국사기〉 역시 유교적 입장에서 윤색된 것이며, 여타 종교적 색채가 농후한 동서양을 막론한 대부분의 역사서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비판하고 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당시에 전해지던 구술 자료에 근거한다고 해서 이를 신화나 전설의 부류, 역사적 진실이나 가치가 부족하다고 보는 견해는 구술전승 가운데 담겨진 진실을 배제하는 위험한 사고일 따름이다. 구술은 항간에 떠돌아다니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정사(正史)라고 하는 역사에 포함되지 못한 진실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발언은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가야불교 관련 유적이나 유물 또는 이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이 대부분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 역시 조작되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불교유산과 유물들이 불에 타고 다시 제작되었을 때는 당연히 과거에 존재하던 것들을 근거로 최대한 고증을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런 유산도 시간이 지나 후대에 만들어졌으므로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긍정적인 입장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새로운 각도에서 가야불교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방향을 정립할 수 있다.

가야불교 전래에 관한 사료를 검토한 후 “사료가 거의 없다”고 주장하며 이런 이유로 가야불교를 허구라고 보는 견해는 일반화의 오류이자 선행전제가 잘못된 오류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한 것이므로 이 또한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고대사는 자료가 있든 없든 대부분이 추론에 의거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발굴되지 않고 남아있는 가야의 고분이나 유적·유물은 많다.

韓中日 역사서와 유적 종합연구를

신화와 미신의 차이는 신비하고 애매하다고 여겨지는 역사적인 이야기에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면 신화적인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미신이나 설화·전설로 전락한다. 실제 패권을 장악한 세력에 의해 이러한 조작은 있어 왔고, 그러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가까운 근현대사에 대해서도 인식과 사실 그리고 가치평가를 극단적으로 달리하는 상황은 이를 충분히 방증한다.

가야불교의 자취를 말하는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사찰을 확인할 수 있다. 장유사(長遊寺) · 칠불사(七佛寺) · 흥국사(興國寺)  · 은하사(銀河寺) · 해은사(海恩寺) · 모은암(母恩庵) · 성조암(聖祖庵) · 영구암(靈龜庵) 등이다.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한반도 불교 전래는 공식 전래된 시기보다 300년이 앞서게 된다. 파사석탑은 마멸이 심하며, 기단을 포함 7층으로 되어 있다. 몇 번 옮기면서 탑층 순서가 명확치 않다.

장유사 창건기록에 따르면 AD 48년 인도 아유타국 스님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허황옥(許黃玉)을 따라 최초로 창건한 사찰이다. 이와 함께 가락국 제8대 질지왕(銍知王)이 세운 장유화상 사리탑(문화재자료 제31호)이 현재 남아있다.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아들 중 일곱 왕자가 모두 성불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경남 하동 칠불사는 사찰의 명칭에서 이미 가야불교의 흔적을 담고 있다. 칠불사는 가야불교에 대한 다른 이야기와 달리 불교에 대한 깊은 인연을 전하는 장소이다.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을 아내로 맞아 슬하에 10남 2녀를 두었다고 전해진다.

첫째 왕자는 왕위를 계승하고, 넷째부터 막내까지 7명이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가야산에서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화왕산(火旺山)과 와룡산 그리고 지리산 칠불암 터에 흩어져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흥국사는 허황옥과 김수로왕이 결혼한 뒤 첫날밤을 보낸 곳에 지은 절이다. 흥국사에는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사왕석(蛇王石)’이 보관돼 있다. 그리고 김해 은하사에는 장유화상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의 주춧돌이 있다.

김수로왕의 영정.
허황후의 영정.

또 김해에는 허황옥이 인도에 있는 어머님의 은혜를 생각해 세웠다는 모은암(母恩庵)을 비롯해 성조암 · 영구암 · 해은암 등 가야시대 불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보고(寶庫)를 이루고 있다.

이밖에도 고령지역 대가야의 성문을 전단문(栴檀門)이라고 불렀는데 ‘전단(栴檀)’은 불경에 자주 등장하는 향나무의 일종이다. 고령(高靈) 고아동(古衙洞) 벽화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연화문(蓮花文)은 부여 능산리(陵山里) 벽화고분과 상통하는 양식이다. 이는 대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다. 그리고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의 어머니 이름이 불교의 팔정도의 하나인 ‘정견(正見)’이 포함된 정견모주(正見母主)이다.

더 나열하면 최치원이 저술한 〈석이정전(釋利貞傳)〉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의 감응을 받아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대가야국의 시조라는 이진아시(伊珍阿豉, 또는 內珍朱智)의 별칭]과 금관가야왕 뇌질청예(惱窒靑裔, 수로왕의 별칭)를 낳았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의 별명은 불경에 나오는 월광태자(月光太子)이다. 허 황후가 머물던 자리는 오늘날 ‘대비촌(大妃村)’이란 지명으로 전해지고,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접한 둘째와 셋째 왕자가 불심을 일으켜 수행에 정진했다고 전해지는 장소인 칠불사 북쪽으로 10리쯤의 봉우리는 ‘허북대(許北臺)’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대부분 가야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었고 유행했음을 전달하고 있다. 가야 역사에 대해 기록한 우리나라 문헌은 〈삼국사기〉 · 〈삼국유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중국의 문헌은 〈삼국지〉 · 〈후한서〉 · 〈진서〉 · 〈송서〉 · 〈남재서〉 · 〈양서〉, 일본의 문헌은 〈일본서기〉가 있다. 이러한 문헌이 제작되던 시기에 만들어진 불교관련 문헌이나 유적·유물들을 함께 연구해 본다면 가야불교의 자취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해상 실크로드와 병행 연구 나설 때

여러 종류의 사료나 문헌들을 참고로 하는 것도 좋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예를 들어 특정한 왕이 통치하는 어떤 시점에 불교가 공인되었다고 해서 그 시점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 이전부터 전래되어 민간이나 특정 사람들에게 유포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단순하게 파악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근·현대사의 경우를 보더라도 특정 분야에 대한 해석과 정의가 제각각이고, 그 가치를 정립할 때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서 한 가지로 확정짓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물며 오랜 세월이 흘러 그 자취가 아득한 고대사의 경우야 오죽하겠는가. 그렇기에 고대사를 바라보는 자세는 지극히 조심하고 겸허해야 한다. 특히 종교사가 이슈가 되었을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불교사에 대해 진행되어 온 연구를 살펴보면 지나칠 정도의 단언과 망언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학문은 사실을 통한 진실을 추구하지만 당연히 자신의 성향에 따른 선입견을 바탕으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해석의 방향에 있어서 애매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둘 다 정확한 근거가 없다면 망언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 고증·추론·직관·구술 등에 따르는 포괄성을 바탕으로 여러 학문적 연구방법이 동원되어 융·복합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백제나 중국의 남조 그리고 고구려를 통해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되었을 것이란 주장은 북방불교 전래설에 해당한다. 이와 달리 남방의 해로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다수가 있다. 실크로드 육로와 달리 실크로드 해로는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해상 실크로드의 흔적은 해상관련 또는 지리학 분야의 관심 또는 공동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즉, 육로와 해항도시의 연계에 따른 해상 무역루트에 대해 종합적인 연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의 방향과 지리적 요소를 고대의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기후 및 기상환경에 대한 연구를 하고, 이를 문헌 및 종교학의 관점과 병행해서 진행해야 한다.

사실상 많은 역경승들이 동남아시아의 해상 무역루트를 통해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넘어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동시에 인도와 해상루트에 있는 여러 국가의 해항도시들이 불탑 중심의 불교문화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야에 인도불교가 직접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대에 사상이나 종교의 전파는 경제나 무역의 교류와 함께 이뤄졌으며, 이러한 교류의 총체가 해양문화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그 자취를 남겨놓았을 것이다.

이제야 남인도나 스리랑카를 시작으로 벵골만, 미얀마, 인도네시아의 팔렘방, 메콩강 하류의 푸난과 참파, 중국의 광동성, 복건성과 항주, 그리고 한반도 남서부로 이어지는 해양 실크로드의 자취를 더듬어 가야불교사의 진실을 찾아볼 시절 인연이 도래한 것 같다.

흥국사 극락전 사왕석. 1956년 흥국사 칠성각을 건립할 때 발견된 석탑면석(石塔面石)으로 폭 74㎝, 높이 52㎝, 두께 15㎝ 크기다. 좌불 좌우에 코브라 형상의 뱀이 불상을 옹호하고 있다. 인도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리디아’라는 사왕(蛇王)의 형상으로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교류를 입증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흥국사 사적비. 비문에는 김수로왕이 황후를 맞는 배경, 허황옥을 만나 임시 궁전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상황, 그 터에 절을 세운 과정, 1956년 사적비를 세운 연유 등이 적혀 있다.
허황옥이 인도에 있는 어머님의 은혜를 생각해 세웠다는 모은암(母恩庵).
고령(高靈) 고아동(古衙洞) 벽화고분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연화문.
김수로왕이 허황옥과 만나 첫날밤을 보낸 자리에 세워졌던 절은 명월사, 흥국사, 진국사이다. 이 중 흥국사는 세자와 새 왕조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며 지은 사찰이다.
장유화상 사리탑. 장유화상 사리탑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1호이다. 가락국 수로왕(首露王)의 처남이 되는 장유화상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팔각사리탑(石造八角舍利塔)으로 경남 김해시 대청동 장유암 암자터에 있다. 질지왕 때 장유암을 재건하면서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높이는 241㎝이며, 팔각기단 위에 팔각의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렸다.
장재진 교수.

장재진 동명대학교 교수

동국대에서 박사를 수료(인도철학)한 후 한국해양대에서 박사(국제지역학)학위를 받았다. 현 동명대학교 학부교양대학 학장이자 글로벌문화콘텐츠학부 교수로 인도문화교류연구소 소장과 문화융복합콘텐츠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국불교학회 법인이사,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총무이사, 한국인도학회 부회장, 도가도교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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