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지식을 찾아서(267호)

빛의 구도자로 불리는 방혜자 화백은 1937년생이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1년 파리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미술학교에서 벽화를, 파리 헤이터 아틀리에 17에서 판화를 배운 뒤 지금껏 유럽을 무대로 활동 중이다.

 

쎄르끌 다르 출판사 현대미술가 시리즈로 화집 Ⅰ 〈방혜자〉, 화집 II 〈빛의 숨결〉, 화집 III 〈빛의 노래〉 등이 출간되었다. 그동안 수필집으로 〈마음의 소리〉, 〈마음의 침묵〉, 〈빛에서 온 아기〉 등을 펴냈으며 모나코 국제현대예술제에서 성(聖)미술상, 몽루주와 라 훼리예르 등 시 주최 전시에서 감사패와 예술훈장 등을 받았다.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자랑스러운 경기인 상’을, 2010년 문화의 날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2012년에는 ‘한불 문화상’과 ‘세계를 빛낸 여성문화예술인 상’ 등을 수상했다.

영은미술관 내 방혜자 화백 작업실.

1년의 절반은 프랑스 중남부 내륙의 산속, 해발 700m에 자리한 아죽스의 아뜰리에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고국의 자연 속, 우리 땅의 기운으로 그림 그리기를 소망했던 방혜자 화백은 15년 전, 경기도 광주 영은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 초대작가로 입주했다. 그때부터 1년의 절반 동안을 그곳에 머물기 시작했다. 국내 사립미술관 가운데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영은미술관의 A-7 스튜디오. 푸른빛과 초록빛으로 어우러진 빛그림들로 가득한 창작의 산실에서 단아하고, 겸허한 방혜자 화백을 만나 뵈었다.

석굴암 본존불의 뒷모습을 보았는가?

한불 수교 130주년이던 지난해, 프랑스와 우리나라에선 다양한 문화교류가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돋보인 작업으로 단연코, 방혜자 화백이 연말에 기획 · 출간한 불어판 사진집 〈한국의 문화유산, 불국사-석굴암〉을 꼽을 수 있다. 프랑스에 한국불교의 진면목과 선조들의 예술혼을 온전하게 알린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안장헌 작가의 석굴암 · 불국사 사진과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이 쓴 ‘불국사 · 석굴암의 예술과 사상’은 깊고 깊은 한민족의 세계관과 불심을 세계만방에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석굴암의 인상을 그린 ‘지심’(1960).

이 책은 자애로운 석굴암 부처님 미소 대신, 본존불의 뒷모습이 담긴 표지부터가 눈길을 끈다. 부처님의 뒷모습이 낯설긴 하지만 든든하고 미덥다. 바로 뒷자리에 서 계신 11면관세음보살님 눈에 비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일 것이다. 표지만 바라봐도 ‘부처님, 당신의 뒤를 따르며 살겠습니다.’하는 서원이 절로 나온다. 세상살이 힘들 때마다 언제든 기대어 의지해도 좋을 등이 아닌가.

“이 책의 출간엔 ‘물성과 빛 협회’의 역할이 컸습니다. 제 그림과 인연이 된 이웃들이 저마다 재능을 기부하면서 프랑스에 한국을 알리면서 한불 문화예술의 가교 역할을 하는 모임이죠. 어려운 형편에서 그림 그리는 유학생들에게 지난해부터 학비지원도 해오고 있어요. 이 책의 수익금은 그들을 위해 쓰일 겁니다.”

방혜자 화백은 이 책을 출간한 이래 프랑스 길상사와 기메박물관 · 솔본느 대학· 프랑스 문화원 등지에서 강우방 선생과 안장헌 작가를 초대, 각각 불국사와 석굴암의 가치를 조명하는 강연회를 열었다. 한국 미의 정수인 불국사와 석굴암의 면면을 책과 강연으로 만난 프랑스 독자들은 입을 모아 ‘하루 바삐 경주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지만, 기실 우리에게도 이 책은 유리에 갇혀 이젠 더 이상 구석구석 돌아볼 길 없는 석굴암 불보살님들을 두루 친견케 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책장마다 프랑스식의 파격적인 디자인과 편집은 흥미롭게도 한글의 조형적 아름다움까지 새롭게 발견하게 만든다. 국내에서는 도서출판 도반과 경기도 광주의 영은미술관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예술은 세계평화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길이라 일러주신 윤경렬 선생

이 책이 출간된 뿌리에는 고청 윤경렬 선생이 있다. 생전의 윤경렬 선생은 경주땅에서 일제강점기에 잃어버리고 왜곡된 민족문화의 얼을 되살리며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드높이는 일로 헌신하셨던 분이다. 방 화백은 여고시절 여름방학이면 스승을 따라 미술반원들과 함께 경주답사에 나서면서 윤경렬 선생과 연이 되었다. 눈부시게 하얀 한복을 입은 윤 선생의 안내로 천 년의 옛 도읍지를 돌며 보석 같은 문화유산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 번 강의를 시작하면 천지가 울리는 소리로 열정을 다하셨지요. 지혜의 빛으로 가득한 선조들의 예술세계를 접하면서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습니다. 지금도 달밤에 토함산 오르는 길에 둘러앉아 선생님께 듣던 무수한 신라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예술은 세계평화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길이라 일러주신 윤경렬선생 부부와 방혜자 화백.

고독과 긴장의 파리 유학생활 중, 윤경렬 선생이 보내주시던 ‘백제 보살님께’로 시작하는 따사로운 편지는 예술적 자긍심을 심어주며 낯설고 막막한 파리생활을 이겨내는 버팀목이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윤경렬 선생의 향기로운 한 말씀이 있다.

“예술은 세계 평화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길이다.”

프랑스에선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예술 행사들이 국가차원에서 넘치도록 열리던 반면, 우리는 찾아 읽을 책조차 귀했다. 방화백은 그동안 고승의 선시집 〈천산월(千山月)〉을 프랑스어로 출간한 이래 프랑스와 우리 시인의 시화집을 출간하고 우리의 전통예술과 문화유산을 프랑스에 적극 알려오고 있다.

또한 방혜자 화백은 금강석처럼 아름다운 우리나라 불교를 알리기 위해서 우렁찬 육성으로 민족의 믿음을 강조하셨던 윤경렬 선생의 경주 남산에 관한 명저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을 번역 · 출간하는 일에 혼신을 다했다. 프랑스어로 한국불교와 한국전통문화유산을 소개한 첫 번째 책이자, 세상에서 ‘마지막 신라인’이라 불렸던 윤경렬 선생을 ‘영원한 신라인’으로 되살려낸 책이었다. 출판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방 화백은 밤낮없이 그림을 그렸다. 적어도 우리나라와 프랑스, 두 나라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해야겠다는 서원을 품고 시작한 일이다.

“이번의 두 번째 책을 펴내기까지 무려 15년 세월이 흘렀네요. 경주 남산,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경주 사진집 3부작을 준비해야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기회가 되면 신라왕릉 사진집을 내고 싶습니다.”

꿈꾸는 일은 실행의 첫걸음이 아니던가.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그리는 일

방혜자 화백은 윤경렬 선생 뿐 아니라 자애로운 스승들을 만나는 인복을 타고 났던 것 같다. 여고시절, 자하문 밖에서 그린 풍경화를 미술반 김창억 선생이 보시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15년간 연구한 것을 금방 터득했구나.”

이 한마디 칭찬이 시인을 꿈꾸던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스승은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거”라고 강조하셨다.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을 화두 삼아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장욱진 교수는 아카데믹한 서울대에서 홀로 늘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며 그이를 아껴주셨다.

“대학 1학년 때 휴양 차 수덕사에 머물면서 이응노 화백을 뵙고 좋은 가르침을 많이 들었죠. 프랑스로 떠나실 땐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을 그려주셨어요. 소처럼 꾸준히 말없이 그림을 그리며 살라구요. 뒤따라간 파리에서 제게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시기도 했죠.”

1961년, 방혜자 화백은 국비장학생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에선 저명한 미술평론가 피에르 쿠르티옹(Pierre Courthion)을 만났다. 그는 방혜자의 첫 전시회를 열어주고, 카탈로그 서문도 써주고, 유명 화가들과 교류할 수 있게 해줬다. 세상 떠날 때까지 쿠르티옹 스승의 후원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스승의 은혜로 시작한 그림의 길, 한 번도 이 같은 지중한 인연을 잊어본 적이 없다. 올 9월, 방혜자 화백은 경기여고 경운박물관에서 늘상 감사함을 잊을 적 없는 스승 김창억 화백의 회고전을 열어드릴 계획이다.

마음의 빛으로
빛의 노래를 담는 빛의 구도자

‘빛에서 빛으로’, 2014, 닥지에 자연채색, 182×120cm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 56년 세월 동안 붓을 놓아 본 일이 없다. 그사이 방혜자 화백은 사람들 사이에 ‘빛의 작가’, ‘빛의 구도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자갈들이 잠겨 있던 맑은 개울물이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걸 봤죠. 그 순간, 사람의 손으로도 이런 빛을 그릴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아마 빛에 관한 최초의 경험이었지요. 이후로 빛에 관한 꿈도 참 많이 꿨어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사랑과 평화의 씨앗을 세상에 뿌린다는 마음으로 빛을 담습니다.”

방혜자 화백은 ‘아득한 태고에서부터 생명의 원천이 된 빛’을 화면에 담고자 했다. 빛의 따사로움과 찬란함, 영원함을 찾아 나서면서 방화백은 ‘세상에 빛 아닌 것이 없다’는 실상을 깨치게 된다. 우주 삼라만상이 빛이자 자비광명이었다. 이 같은 깨달음은 어떻게 그림이 될까. 방화백은 ‘한 획을 긋기 위하여’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온몸과 마음으로 그려나가면
색과 색이 어울리고
획과 획이 춤추는
자유의 공간을 이룬다
마음의 눈을 크게뜨고
무한 천공에
불멸의 한 획을 긋는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채우고, 비우고, 버리는 가운데 드러나는 불멸의 한 획인 것이다. 초기에 수묵화처럼 묽게 칠한 색감으로 빛의 본성을 표현하던 방화백은 고국에서 한지와 조우한다. 빛을 표현하는 데에 한지는 최상의 재료였다. 물감 칠한 한지를 겹쳐 발라 중첩된 그림은 빛이 머금은 무한한 공간을 드러내 주었다. 90년대 말부터 남프랑스의 황토와 부직포를 사용하면서 그림 속 빛은 더 풍성해졌다.

안료는 광물성, 식물성 같은 천연으로만 사용한다. 방혜자 화백이 사용하는 붓도 서예용 붓이다. 천연재료들이 스스로 빛을 머금고 반사하니, 마음과 평화를 담는 데에 꼭 필요한 재료들이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빛그림은 마르면 다시 칠하고 두드리기를 무수히 반복해 완성된다. 그림의 앞뒤로 물감이 배어드는 데에 드는 공력은 끈기 없이는 불가능할 일이다. 그리하여 앞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양면그림이 탄생한다.

“한지에 하던 양면 채색기법을 부직포에 활용했지요. 나중에 그것이 고려불화에서 사용된 배채법(背彩法)과 같은 기법이란 것을 알게 됐어요. 내가 그린 것이라기보다 이미 내 세포 속에 있는 게 발현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DNA를 타고 흐르는 문화원형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자성의 길을 통해 빛의 길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방혜자 화백은 나면서부터 허약했다. 집안에선 동학사, 수덕사에 머물게 하셨다. 그 인연으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외롭고 힘겹게 작업을 할 때면 고국 산사의 저녁 예불소리며 풍경소리가 향수를 달래주곤 했다.

프랑스 유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61년 국립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전시장을 찾아온 스님이 있었다. 법정 스님이었다. 훗날 파리 길상사 개원 때 스님의 제안으로 불상 뒤 후불탱화로 선생의 추상화를 모셨다. 빛의 숨결이 뿜어져 나오는 그림은 우주법계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우리시대 후불탱화가 되면서 이후 방 화백의 추상화는 서울 평창동 보각사, 개화산 개화사, 광주 무각사 대웅전에 후불탱화로 모셔져 있다.

결혼 후 두어 달 머물 요량으로 들렀던 서울에서 무려 8년을 머물게 되었다. 그 무렵, 탄허 스님께 〈화엄경〉 강의를 듣고, 석주 스님께 붓글씨를 배울 수 있었다니 큰스승을 만나는 인연은 타고난 듯하다.

 

“부처님이요? 존재의 빛이시죠. 존재 자체로서 빛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이시고, 빛의 존재시죠. 길을 일러주신 감사한 분, 이름만 불러도 환희심이 나는 분이시죠. 저로선 그림을 통해 그 빛을 나눌 수 있는 게 중요하겠죠.”

피에르 쿠르티용은 “방혜자의 그림 속에서 나는 흙과 공기, 그리고 물을 다시 발견한다. 불의 경우, 신성한 불이 그의 마음속에 있다.”고 찬탄했다. 우주를 생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가 그의 그림 속에서 빛난다는 의미가 아닌가.

우주의 빛을 방화백의 그림으로 강의하는 천체물리학자로 다비드 엘바즈(David Elbaz)가 있다. 그는 허블망원경을 통해 본 우주가 방혜자 화백의 그림과 정교하게 닮았음을 확인하며 충격을 받는다. 어떤 면에선 방혜자의 그림이 더 깊이 있다고도 밝혔다. 엘바즈는 자신의 강의에 망원경으로 찍은 우주사진과 방화백의 작품이미지를 교차한 영상물을 만들어 교재로 사용 중이다. 방혜자 화백이 지난해 고등과학원(KIAS)에서 열린, 입자물리학 및 우주론 세미나에 ‘과학과 예술’을 주제로 강연을 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우린 영롱한 한 알의 빛이 되려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한 알의 빛으로 떠날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빛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 사랑은 기쁨, 기쁨은 평화로 이어지죠. 자성의 길을 통해 빛의 길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게 제 마지막 걸어가는 길일 겁니다. 빛으로 받은 모든 사랑을 세상에 잘 회향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방 화백을 뵌 지 30여 년 세월이 다 되어간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은 늘 한결같다. 나지막한 음성이 높아지는 일도 없거니와, 자고 깨면 명상으로 하루를 열고, 항상 기쁜 마음으로 화폭 앞에 앉아 구도자처럼 작업에 임하고, 화실과 숙소 사이의 ‘오솔길에 서서 장엄한 저녁노을을 바라보길’ 즐기는 것도 그러하다.

또 청목(淸穆)한 표정으로 들려주는 생명과 평화, 예술에 관한 말씀들은 고스란히 금싸라기 법문이다. 그래서 방혜자 화백을 마주하는 이들은 누구라도 ‘선생님처럼 기품 있고 지혜롭게 나이들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실은 나도 한때 그런 소망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낮은 근기로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방혜자 화백의 미풍같은 미소, 하심하는 삶의 태도, 서원 세운 바 그대로 이뤄나가는 신심만큼은 항상 닮고 싶은 ‘맑고 향기로운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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