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바닷가.

바야흐로 휴가철이다. 여름휴가하면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 작열하는 태양과 수많은 인파에 가려있지만 바다 구석구석에는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의 단편(斷片)들이 흩어져 있다. 역사는 후손들이 기억할 때 비로소 역사로써의 가치를 지닌다. 기억되지 못하는 역사는 더 이상 역사로 부를 수 없다. 올 여름, 역사의 단편들을 맞춰보는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처용 전설 서린 울산 세죽마을

외항강변도로에서 바라본 처용암. 좌측 세죽마을 앞으로 산업용 철도공사가 한창이다. 우측으로는 온산국가산업단지가 보인다
1985년 세죽마을에 세워진 처용가비.
처용암 앞에는 울산시가 2001년 제작한 처용문화제 공식캐릭터가 서 있다.

동경 밝은 달에, 밤들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러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신라 향가 중 처용가(處容歌)다. 이 향가를 부른 처용은 신라 49대 헌강왕 때 인물이다. 그가 처음 출현했다는 장소는 지금의 울산 앞바다. 〈삼국유사〉는 이 장소를 ‘개운포(開雲浦)’라고 적고 있는데, ‘구름이 갠 포구’란 뜻이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개운포의 유래와 처용 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다.

“대왕이 울산 앞바다에서 놀다가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괴상히 여겨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길 “동해의 용이 부린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하고 고했다. 왕은 신하에게 시켜 근처에 용을 위해 절을 짓게 했다. 어명이 내려지자마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동해용은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이 처용이었다. 왕은 그에게 아름다운 여인으로 아내를 삼게 하고, 관직을 주었다.

어느 날 밤, 처용이 귀가해보니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귀신)이 그의 아내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처용은 이를 보고 물러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노래를 듣고 역신이 본 모습을 나타내 무릎을 꿇고 “공의 아내를 사모해 잘못을 저질렀으나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동하였습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습만 보아도 그 문 안에는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후 백성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삿된 귀신을 쫓았다.”

처용과 관련해서는 여러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설화에서는 처용이 용의 아들로 등장하지만, 이슬람인이라는 주장부터 무속인이란 주장까지 다양하다. 실제 신라는 아랍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했는데, 개운포가 교역항이었을 것이란 추측의 근거다. 또 위 향가에서 역신과의 동침을 아내가 천연두에 걸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천연두에 걸린 아내의 병을 낫게 하고자 귀신을 쫓는 춤을 추어 낫게 했기 때문에 이후 신라의 집집마다 처용의 형상을 그려 역신(천연두)를 쫓았다는 주장이다.

울주 망해사지를 지키고 있는 승탑 두 기(보물 제173호). 
망해사지 아래에는 1960년대 새로 지어진 망해사가 자리하고 있다.
망해사 법당 뒷면에 그려진 벽화. 신라 헌강왕과 처용의 조우 장면이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 39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처용무의 한 장면.

개운포는 현재의 울산 앞바다다. 정확히는 울산시 남구 황성동 세죽마을이다. 그 앞바다에는 처용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는 처용암이 있다. 외황강 너머로 학남산업단지와 온산산업단지의 높은 철탑과 굴뚝이 늘어서 있어 처용의 자취를 느껴보긴 쉽지 않다. 다행히 세죽마을 선착장 앞에는 처용암이 울산시기념물 제4호란 안내판과 함께 시비와 처용캐릭터가 세워져 있다.

신라 헌강왕은 서라벌에 돌아온 후 약속대로 동해의 용을 위해 절을 세웠는데, 바로 망해사(望海寺)다. 처용암에서 북서쪽으로 15km 떨어진 영취산 자락에 세워진 망해사는 현재 절터와 부도(보물 제173호)만 전한다. 절터 아래 1960년대 새로 지어진 망해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에 망해대(望海臺)가 있어서 멀리 바다가 보였다고 전하는데, 부도 앞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산 정상 쪽으로 100m쯤 올라가면 넓은 터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바다가 보여 이곳이 망해사지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한편 처용이 추었던 춤, 처용무는 궁중무용으로 전승돼 왔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39호이자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는데, 울산시는 매년 10월 태화강 대공원에서 처용문화제를 열고 있다.

주변볼거리

고래문화특구 울산 남구 장생포는 고래잡이로 유명했던 마을이다. 현재 고래문화특구를 조성하면서 옛 마을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특구 내 고래박물관은 1986년 포경이 금지되기 이전에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1986년 포경금지)와 관련 포경유물을 볼 수 있고, 지난 6월 13일 새끼돌고래가 태어나기도 했던 고래생태체험관에서는 돌고래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선착장에서는 고래바다여행선도 탈 수 있다.

화암주상절리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된 화암주상절리는 처용암에서 27km 정도 거리에 있다. 신생대 때 화산활동으로 분출한 현무암이 만들어놓은 절경이다. 학자들은 용암이 표출된 후 급랭하면서 수축할 때 육각형, 사각형, 삼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기둥모양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다듬어놓은 목재더미를 연상시킨다.

수로부인 향기 아련한 삼척 임원 · 증산해변

수로부인이 노인으로부터 꽃을 받았다는 헌화공원 입구는 삼척 임원항에 있다. 매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드넓게 펼쳐진 헌화공원이 펼쳐진다.

붉은 바위 옆에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면
저 꽃 꺾어 바치오리다.

신라 성덕왕 때 귀족이었던 순정공은 무척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바로 수로(水路)부인이다.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태수로 부임을 받은 순정공은 수로부인과 함께 서라벌에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갔다. 지금으로 치면 7번 국도를 자신은 말을 타고, 아내는 가마에 태워 함께 올라갔을 것이다. 점심때가 되어 경치가 좋은 장소(현재의 삼척 임원항 북쪽 야산 앞)에 머물렀는데, 천 길은 될 법한 바위 봉우리가 바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철쭉이 활짝 피어있었다.

수로부인이 이 모습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 줄 사람, 누구 없소?”

주위 사람들이 한 입으로 말하길

“저곳은 사람의 발길이 이를 수 없는 곳입니다.”

이때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절벽을 올라 철쭉을 꺾은 후, 앞의 노래를 지어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노인으로부터 철쭉을 건네받은 수로부인 일행은 이틀을 더 올라가 동해바다가 넓게 펼쳐지는 해변(현재의 삼척 증산해변)에서 점심을 먹는데, 이번에는 바다의 용이 나타나 부인을 바다 속으로 데리고 가버렸다.

순정공이 애를 태우고 있는데, 한 노인이 이렇게 아뢰었다.“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고 했으니, 바다 속의 용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을 사람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며 지팡이로 강 언덕을 치면 부인을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정공이 이대로 행했더니 용이 수로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바다 속의 일을 물으니 “칠보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로워 인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하고 답했다. 부인의 옷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났는데, 인세의 것이 아니었다. 순정공과 마을 주민들이 부른 노래가 바로 해가(海歌)다.

임원해변에서 다시 남편의 부임지를 향해 북쪽으로 향하던 수로부인은 삼척 증산해변에서 점심을 먹다가 해룡에게 납치를 당한다. 이곳에 정자와 해가사터를 알리는 비가 서 있다.
낮에 만나는 추암 촛대바위는 추암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일출몰이나 먹구름·운무가 낄 때 신비롭다.
장호해변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장호항 방파제를 지나 막다른 곳에서 만나는 작은 바위섬과 주변을 권한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스노클링 최적지.
수로부인 헌화공원에서는 남쪽으로 임원항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에 임원해변이 있다.

주변볼거리

삼척 장호항 삼척하면 추암이 먼저 떠오르지만, 낮에 만나는 추암은 기대에 못 미친다. 수로부인헌화공원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장호항을 만날 수 있다. 장호해변보다는 장호항 방파제 옆을 지나 막다른 곳에 이르면 작은 바위섬과 그 사이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날 수 있다. 해수욕하기에는 최적의 장소. 어촌체험마을에 신청하면 투명카누와 스쿠버다이빙, 바다래프팅 체험을 할 수 있다.

레일바이크·해상케이블카 레일바이크는 장호항 바로 위쪽 용화해변과 궁촌해변을 오가는 5.4km 복선 구간으로 어디서든 출발할 수 있다. 2인용, 4인용을 운영하는데, 하루 여섯 차례 출발시간이 정해져 있으므로 사전에 문의하는 게 좋다. 해상케이블카는 근덕면 용화리와 장호항 사이 880m 구간을 연결하는데, 32명이 동시 탑승 가능하다. 7월초 개장 예정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거역하고 바치지 않는다면
그물을 넣어 사로잡아 구워 먹으리라.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예나 지금이나 미인의 운명은 기구하다. 수로부인은 용모와 자태가 빼어나 깊은 산,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물(神物)에게 붙잡혀 갔다고 전해진다.

노인이 철쭉을 꺾어 바친 절벽은 지금의 삼척 임원항 북쪽 야산으로 해발 120m 높이다. 산 정상에는 수로부인헌화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임원항에 있는 헌화공원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한다. 공원에 서면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또 수로부인이 해룡에게 잡혀갔던 삼척 증산해변은 쏠비치 리조트와 접한 북쪽 바닷가다. 수로부인 일행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임해정(臨海亭)이란 아담한 정자가 지어졌고, 수십 미터 앞에는 ‘해가사터’라는 비가 세워져 있다.

학계에서는 수로부인과 관련 다양한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헌화설화를 애정을 바탕에 둔 신라인의 미의식으로 보기도 하지만, 수로부인을 무녀(巫女)로 보는 주장도 적지 않다. 용궁을 다녀온 수로부인의 몸에서 난 향기를 약초향으로 보거나 두 설화 모두 꿈으로 보기도 한다. 또 암소를 끌고 등장한 노인을 심우(尋牛)를 붙든 선승으로 보거나, 가야 김수로왕 때 부른 구지가(龜旨歌)와 흡사한 해가(海歌)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해 행하는 초혼 굿의 자취가 묻어 있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의 최후 격전지 서천 장항항

선높이 15m, 길이 250m의 ‘기벌포 해전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멀리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구)장항제련소 굴뚝이 보인다.

“신이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머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은 후에 공격해야 합니다.”

성충(成忠, ?~ 656년)은 백제의 충신이다. 그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을 거둔 후 자만에 빠진 의자왕에게 충언을 했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던 성충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는 그 내용을 위와 같이 전한다.

660년, 성충의 말대로 전쟁이 발발했다. 신라군이 쳐들어오고, 당나라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앞세우고 덕물도(현 인천시 옹진군 덕적도)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백제 땅에 전해졌다. 마음이 급해진 의자왕은 귀양을 보낸 또 다른 충신 흥수(興首)에게 대책을 묻는다. 이에 흥수 역시 탄현과 기벌포를 잘 지키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 충언마저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계백이 거느린 5000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패하고, 기벌포에서는 수군이 패했다. 사비성으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의자왕은 그제서야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하고 후회했다.

성충이 말한 기벌포는 지금의 충남 서천 장항항 앞바다다. 기벌포는 당시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었고, 백제가 당나라·일본과 교류를 하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런 이유로 기벌포에서는 백제의 멸망과 관련해 총 세 차례의 해전이 벌어진다. 의자왕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첫 해전이 벌어진 3년 뒤 제2차 기벌포해전이 발발한다. 바로 백제부흥군·왜나라 연합군 대 나·당 연합군의 결전이다.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쟁이기도 한 이 전쟁은 1000척의 배에 2만7000여 명의 병력과 170척의 배에 1만7000여 명의 병력이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나·당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간다.

제3차 기벌포해전은 676년 일어난다.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동맹을 깨고, 신라마저 병합시키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670년부터 7년간 지속되는데, 그 마지막 격전지가 기벌포 앞바다다. 신라 수군은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수군을 격파, 사실상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때서야 이뤄진다.

1,300여 년이 흐른 지금,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동북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쟁이 벌어졌던 서천 장항항 앞바다에는 ‘기벌포 해전 전망대’가 세워져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장항 스카이워크로 불리는 이 전망대는 장항송림산림욕장에 위치한 높이 15m, 길이 250m에 이르는 전망대다. 이곳에서는 유부도와 군산산업단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구)장항제련소 굴뚝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편 고려 말인 1380년 기벌포가 위치한 금강에서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1325~1395) 장군과 고려 수군이 신무기를 앞세워 500여 척의 왜선을 격멸시킨 바 있다. 최무선 장군은 이 전투에서 화약무기를 적극 활용했다. 기벌포는 조선시대에도 서천포영(舒川浦營)이 위치했었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배치되었던 군사적 요지이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한 가족이 전망대에 올라 기벌포 앞바다를 구경하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유부도와 군산산업단지가 한 눈에 조망된다.

주변볼거리

금강하굿둑 금강은 전북 장수에서 발원해 충남북도와 전북 내륙을 거쳐 군산만(群山灣)에 이르는 총길이 401㎞의 강이다. 이 강 하구를 막아 건설한 둑이 금강하굿둑이다. 방조제 총길이는 1,841m로 1990년 완공했다.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과 금강 주변의 홍수조절 역할을 하고 있다. 주변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

조류생태전시관(금강철새탐조대) 금강하구에는 고니ㆍ개리ㆍ가창오리ㆍ청둥오리ㆍ고방오리를 비롯한 오리류 및 기러기류와 북극권과 동남아시아, 호주를 오가는 철새들을 볼 수 있다. 4층 옥상정원에서는 철새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고, 3층에서는 서천의 대표적 철새를 배우고, 철새 관찰수칙을 배울 수 있다. 2층에서는 새의 생태에 관한 에니메이션 및 다큐영상을 상영한다.

마라난타 스님을 마주하다 영광 법성포

영광대교 위에서 본 법성포와 마라난타사.

‘…구월에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晋)으로부터 이르렀다. 왕은 이를 맞아 궁 내에서 의례로써 공경하였는데, 불법(佛法)이 이로부터 시작됐다.’
〈삼국사기〉 권 제24 ‘백제본기 제2 침류왕(枕流王)’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甲申)에 호승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禮)로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乙酉)에 새 도읍인 한산주에 절을 세우고 도승(度僧) 열 사람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佛法)의 시초이다. 또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년 2월에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 복(福)을 구하라고 했다.’
〈삼국유사〉 제3권 홍법 제3 난타벽제(難陀闢濟)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마라난타 스님에 관련 기록이다. 인도 출신의 마라난타 스님은 384년 현재의 법성포를 통해 백제로 들어와 불갑사를 창건, 백제 전역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마라난타 스님이 동진에서 배를 타고 거친 바다의 물살을 헤치고 와서 내린 곳은 영광의 칠산 앞바다였다. 당시 이곳은 마라난타 스님이 아미타불을 안고 내렸다고 해서 ‘아무포(阿無浦)’로 불렸다고도 한다. 그리고 마라난타 스님이 아미타불이 머무는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을 전래했다고 해서 ‘아무포’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불법이 널리 퍼졌다’는 뜻의 ‘부용포(芙蓉浦)’로 불렸다가 이후 ‘불법을 전해온 성인이 오신 곳’이라는 의미의 ‘법성포(法聖浦)’로 바뀌었다.

현재 법성포에는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 불교를 최초로 전한 곳임을 알려주는 마라난타사가 있다. 영광군이 사업비 184억 원 가량을 투입해 건립한 사찰이다. 마라난타사는 총면적 1만 3,745평에 사면대불 · 만불전 · 부용루 · 탑원 · 간다라유물관 · 다원 · 존자정 · 만다라광장 · 연못 등이 조성돼 있다.

법성포와 마라난타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은 인근의 영광대교다. 영광대교의 인도로 가려면 다리 아래의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다리 중간쯤 서면 드넓은 법성포구와 마라난타사가 한눈에 보인다. 도로를 건너 반대편으로 가면 작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곱고 주변 풍광이 아름다운 모래미 해수욕장도 눈에 들어온다.

1,600여 년 전 마라난타 스님이 헤쳐 온 물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영광에서 시작된 불교는 백제 전역으로 퍼져 나가 찬란한 문화유산을 일구었고, 이는 한국문화의 큰 축이 되고 있다.

마라난타사에 있는 간다라 양식의 불상.
영광 불갑사 전경.
불갑사 대웅전 용마루의 사리탑.
모래미해수욕장은 백사장은 작지만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내산서원 입구에 있는 강항 선생 동상.
내산서원 전경.

 주변볼거리

불갑사 불갑면 모악리에 있는 백제시대 고찰이다. 마라난타 스님이 법성포를 통해 백제에 온 뒤 처음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찰이다. 고려 후기 각진국사가 주석하며 크게 중창했는데, 당시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으며 사전(寺田)이 10리 밖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보물 제830호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전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등의 전각과 각진국사가 심었다고 전하는 수령이 700년 정도 된 참식나무(천연기념물 제112호)도 있다. 가을에는 불갑사 꽃무릇 축제를 열고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사찰이다.

내산서원(內山書院) 전남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는 사설교육기관이자 향촌자치 운영기구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돼 있다. 내산서원은 조선 인조 13년(1635) 에 수은 강항(1567~1618)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용계사(龍溪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됐고, 숙종 28년(1702) 고쳐지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광복 이후 현 위치에 복원하고 ‘내산서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93년부터 10년 간 정비사업을 벌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쟁 흐름 바꾼 격동의 해협 진도 울돌목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한다고 했다. 이는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장수들은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엄히 처단할 것이다. 내일 왜적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수적으로 열세이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전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마라. 나에게는 해전에서 승리할 전략이 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를 믿고 전투에 임하라.”

명량대첩 하루 전인 9월 15일 밤, 이순신장군은 수군을 소집해, 다음날 전투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결국 이 말은 명량대첩을 세계 해전사에서도 길이 빛나는 역사적인 해전으로 기억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은 왜에 맞서지만 참패했다. 이에 유성룡 등이 선조에게 간곡하게 건의해 이순신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토록 하고, 조선의 바다를 지키게 했다. 이순신장군이 조선 수군의 지휘자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의 전선만 보유하고 있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선조가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편입해 싸우라고 하자 이순신장군은 장계를 올리고 해전에 임한다. 이순신장군은 서해 진출의 물목인 명량(울돌목)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진도 벽파진(碧波津)으로 이동해 왜의 침략에 대비했다.

왜군의 동태를 살핀 이순신장군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으로 옮겼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장군은 출전명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했다. 당시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이었다. 이순신장군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했으나 혼전이 일어났다.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바뀌었으며, 일본 수군은 이순신장군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고 했다.

급박한 순간, 이순신장군은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 등에게 적진으로 돌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한 조류는 조선 수군에 비해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해로가 좁고, 조류가 불규칙해 전선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무너지고 있었다.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이순신장군의 전선에 동승했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자가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치자 이순신장군은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준사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았다. 이를 본 일본수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됐다.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며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조선 수군이 왜의 전선 31척을 괴멸시키자 일본 수군은 후퇴했다.

명량에서의 승리로 이순신장군이 통솔하는 조선 수군은 10배 이상 많은 왜의 수군을 격퇴, 정유재란을 조선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됐다. 명량대첩과 관련해 이순신장군이 위장전술로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했다는 것, 철쇠(鐵鎖)를 협수로에 깔아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어 명량대첩이 이순신장군의 말처럼 국운을 좌우하는 전투였음을 말해준다.

진도군은 매년 가을 이순신장군의 업적과 명량대첩의 승전을 기리는 ‘명량대첩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울돌목의 물살은 여전히 빠르고 거세다.
이충무공 승전공원에 세워져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벽파진 언덕에 세워진 이충무공 전첩비. 1956년에 건립됐다.
명랑해전에 앞서 군사들이 많아 보이도록 여성들에게 남자옷을 입혀 해안 산자락을 돌게했다는 강강술래터.

주변볼거리

벽파진 옛날부터 진도의 관문 구실을 했던 나루터로 명량해협의 길목에 있다. 벽파진은 명량해첩을 치르기 전 16일 동안 이순신장군이 머물면서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벽파진 뒷편 바위산에는 이충무공전첩비가 우뚝 서 있다. 1956년에 세워진 이 비의 높이는 11m이며, 이은상 선생이 지은 지문이 새겨져 있다.

녹진관광지(이충무공 승전공원) 울돌목 위에 세워진 진도대교 인근에는 이순신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해 조성한 녹진관광지가 있다. 이 녹진관광지 안에는 30m 높이의 이순신장군 동상이 울돌목을 굽어보고 있다. 바닷가를 빙둘러 데크를 설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울돌목을 잘 볼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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