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뿐인 올해 여름
더위 피하되 나 자신 향할 때
진정한 욜로 아닐까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삼복의 계절이 다가왔다. 초복ㆍ중복ㆍ말복에서 쓰는 ‘복(伏)’의 한자를 보면, 사람 인(人) 자 옆에 개 견(犬) 자를 써놓은 모습이다. 개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동물이니 엎드려 복종한다는 뜻을 담고자 함이다. 그럼 누가 누구에게 복종한다는 말일까? 이는 가을의 음기가 일어나려고 하다가 여름의 양기에 눌려 엎드린다는 뜻이다. 그만큼 한여름 열기가 대단하다는 말이지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미 가을의 기운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새기고 싶다.

여름 속에 가을이 와 있다는 것…. 당연한 자연의 흐름이건만, ‘오늘’ 뒤에서 똑똑 노크하는 ‘내일’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가 등장하는 삶은 천천히 움직이는 거대한 무대여서 한순간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씨앗을 간직한 과일처럼, 음의 기운이 깃든 여름처럼, 죽음을 품고 태어났기에 더욱 귀하고 값진 삶이다. 그런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쳇바퀴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외친다. ‘욜로!’

욜로(YOLO)는 ‘인생은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이라는 뜻이다. 현재 자신의 참된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발목 잡히지 않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보며 오늘의 희생을 감내해온 한국인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중한 가치관이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욜로의 참뜻보다는, 또 다른 함정에 빠져 있는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것,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늘 초라한 쳇바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그래서 거꾸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과연 한 번뿐인 하루하루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스스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접하는 바깥세계가 새로운 데서 ‘한 번뿐인 삶’의 가치를 매겨온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중생의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해 일찍이 당나라의 마조(馬祖) 스님은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제자 대주(大珠) 스님이 처음 마조 스님과 만났을 때였다. 마조 스님은 그에게 무엇을 찾고 있는지 물었고, 대주 스님이 ‘깨달음’이라고 답하자 다시 말했다. “그대는 자신의 보물창고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이하여 밖에서 찾으려하시오?” “제 보물창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묻고 답하는 그것이 바로 보물창고지.”

이 말을 듣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은 대주 스님은 그 뒤부터 주위사람들에게 늘 일러주었다. “자신의 보물창고를 여세요. 그리고 그 보물을 사용하세요.”

일체가 부족함 없이 이미 갖추어져 있으며 아무리 써도 바닥나지 않는 자신의 보배를 두고, 애써 바깥에서 찾아 헤맸다는 말이다. 그러니 ‘태어나서 처음 맞이한 이번 여름’의 삼복더위에 제대로 된 피서를 해보고 싶다. 피서는 피할 피(避), 더울 서(署), 더위를 피한다는 뜻이다. 피한다는 말에는 ‘어디로’라는 방향이 있게 마련이다. 특별한 장소이든 마음자리이든, 피해서 가는 그곳이 단지 ‘더위가 없는 곳’이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더위를 피해가되 ‘나 자신’을 향해 가는, 제대로 된 피서를 한 번 해보아야겠다.

진정한 욜로는 분주하게 바깥으로 향한 눈을 거두어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이라면 오늘의 소소한 일상도 더없이 소중하고 빛날 것 같다. 거대한 무대는 끊임없이 서쪽을 향해 이동하며, 삼복의 더위 속에 가을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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