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를 일구는 사람들 (266호)

한국전통등연구원에서 소형으로 제작한 달마등.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거리마다 연등이 달리고, 크고 밝은 갖가지 모양의 등이 사찰을 장엄해 절을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등은 어둠을 밝히는 동시에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을 담고 있어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지난 4월 3일,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에 있는 한국전통등연구원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등 제작이 한창이었다. 진주 남강유등축제, 서울 빛초롱축제, 수원 등불축제처럼 등을 주제로 한 축제들이 생겨나고 일반 행사에서도 등을 주문하는 곳이 있어 이제는 초파일뿐 아니라 일 년 내내 등을 제작한다.

한국문화와 불교문화를 환히 밝히는 등불을 한마음으로 지켜온 한국전통등연구원 사람들을 만나봤다.

전통등에는 밝히는 사람의 소망이 깃들어 있어, 그 모양을 보면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전통등연구원 백창호 원장이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배등'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동국대 서양화 전공 백창호 원장
전통등 복원사업 참여가 계기

한국전통등연구원을 이끌고 있는 백창호 원장은 동국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불교종립대학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했고, 우연한 기회에 조계사에서 주최한 전통등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에는 전통등이라고 해봤자 ‘연꽃등’, ‘팔각등’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통등’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역사적 고증을 통해 어렵사리 복원한 전통등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절 마당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전통등을 바라보면서, 잠시 복원한 것으로 만족하고 지나쳐버리면 앞으로는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생소한 작업을 시작했을 때 모두가 만류했습니다. 그렇지만 손을 놓는 순간 사라질 것을 알았기에 당시에는 전통등을 계승해야한다는 생각뿐이었지요.”

백창호 원장이 전통등 복원과 전승에 청춘을 바친 이유다. 1996년 여름, 군대를 갓 제대한 백 원장은 동국대 미대 재학생·졸업생 동문들과 함께 전통등 제작에 뛰어든다. 이들은 1996년 10월 ‘전통등연구회’를 결성하고, 전통등 고증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서울 불교중앙회관에서 전통등시연회를 열고, 서울 봉은사에 공방을 개설해 다양한 전시회에 참여했다. 1998년에는 봉은사 법왕루에서 ‘전통등 재현전’을 개최해 전통재료인 대나무·아교·찹쌀풀 등을 사용해 전통등을 재현하는데 성공한다.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모습의 '봉산탈춤등'(왼쪽)과 '사자춤등'(오른쪽).

IMF 위기 홀로 고군분투
각종 축제·영화에 전통등 선봬

1998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봉은사에서 열린 전통등 재현전이 성황리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IMF)가 닥쳐와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전통등연구회는 큰 위기를 맞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연구회를 지속시키고자 했던 백 원장은 홀로 남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전통등 제작 강습회를 열고, 꾸준히 전시회에 참가하는 등 고군분투하며 전통등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노력한 결과 전통등연구회는 2002년 FIFA월드컵 성공적 개최를 위한 지구촌등축제 행사를 주관하게 됐고, 이를 기점으로 영화 ‘웰컴투 동막골’의 풍등 제작과 MBC 대하사극 ‘신돈’과 ‘이산’ 등에서 팔관회·연등회를 재현하고, 연등놀이 고증을 위한 전통등을 협찬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후 동국대 100주년 기념전시회, 청계천 복원기념 전통등 전시, 원불교 법등축제, 강릉단오제, 영월 단종문화제, 고성 공룡엑스포, 부산연등축제, 세계불교도우의회, 에버랜드 포시즌가든 등 크고 작은 행사에 아름답고 튼튼한 등을 전시하며 전통등의 연구·계승 단체로서 입지를 굳혀왔다.

또 전통등의 학술적 고증과 보급을 위해 연구원 창립년도를 기점으로 10년마다 세미나와 전시회도 열고 있다. 2006년에는 창립 10주년을 맞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국제학술세미나와 전시회를 개최했고, ‘전통등연구회’를 ‘한국전통등연구원’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창립 20주년을 맞아 ‘나만의 빛, 모두의 빛’이라는 주제로 전시회 및 학술발표회를 열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봤다.

서울 청계천 등축제에서 선보인 '조선의 풍속' 인물등이 줄지어 있다.

매년 세계 등축제에도 참여
집안 밝히는 등 만들고파

조상들이 만들어온 연등의 명맥을 이어가고, ‘불교’에 국한됐던 연등을 한국문화로 자리잡도록 기여한 한국전통등연구원은 이제 새로운 꿈을 꾼다. 야외에서 주로 전시됐던 대형등을 작게 만들어 집 안으로 들여오는 것.

“큰 등이나 작은 등이나 만드는데 들어가는 공은 비슷합니다. 가정 내에서 전통등이 조명의 역할을 해내는 동시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해봅니다. 개인이 소장하며 곁에 두고 사용할 수 있는 등을 실험적으로 만들어보고 있습니다.”

한국전통등연구원에서는 등을 제작할 때 일반 한지보다 튼튼하고 두꺼운 이합지를 사용하고, 불을 켰을 때나 켜지 않았을 때나 깊고 맑은 색을 띠는 전통물감으로 채색한다. 채색이 다 되면 오염을 방지하고, 방수가 되도록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코팅 작업을 거친다. 오래전부터 만들어온 모양부터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까지 다양하게 제작되는 등은, 전통방식을 고수하되 질(質)적 고급화를 추구해 더디지만 아름답고 튼튼하게 완성된다.

2017년 4월, 직접 제작한 '로보카 폴리' 캐릭터등 앞에서.

한국전통등연구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직원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작업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등을 만들며 매일매일 새로운 창작활동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들은 한국 전통등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한편, 다른 나라에서 만든 등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해 매년 싱가포르·중국·일본 등 해외 등축제에 참가해 전통등을 전시하고 있다. 올 초에는 ‘대만등불축제[臺灣燈會, Taiwan Lantern Festival]’에 다녀왔다.

한국전통등연구원은 어느 누구도 선뜻 시작하지 못했던 전통등 연구와 복원을 해내며 전통등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벽창우(碧昌牛) 같은 우직함을 안고 우리 전통등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걸어온 백창호 원장과 직원들의 지난 스무 해를 그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인고(忍苦)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시간을 보낸 그들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며 세운 대원(大願)이 더 큰 원력으로 세상의 무명을 밝히는 등불이 되길 기원한다.

한국전통등연구원이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 온 등은 그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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