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에 깃든 불심 (266호)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윤열수 문화재청 전문위원(71)은 한 평생을 민화와 함께 했으며, 민화학회 회장과 가천박물관 부관장, 동국대 교수를 지냈다. 윤 관장은 40여 년간 민화연구와 함께 방방곡곡의 사찰에 담긴 불당 단청과 불화를 촬영하고 연구하는 일을 해 왔다.

목각 선악동자(善惡童子)와 호랑이, 개인소장·19세기(42x31cm). 원래는 어느 명부전이나 응진전의 협시 시자상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청정세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던 조각상이다. 앳된 동자상 얼굴로 종종머리인 쌍계를 하였고, 당당한 자세로 서서 호랑이 두 앞발을 두 손으로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고개를 뒤로 돌려 앞을 보려는 호랑이의 한 발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동자의 다리부분을 휘감아 잡았고 한 발은 겨우 발목에 닿아 몸을 유지하였다. 무서운 호랑이를 강아지처럼 데리고 노는 지장신앙에 속한 존재로 불가의 큰 원력을 실감나게 한다.

단청(丹靑)은 사찰 건물을 오래 보존하고 목재의 거친 면을 은폐하면서 건축물의 특수성, 위계성을 장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무늬와 그림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그 문양은 신성한 불교 교리나 교훈적인 내용 또는 불법수호를 상징하는 내용으로 아름답게 장식하여 불당을 신성한 공간으로 조성한다.

그리하여 건물의 표벽, 창방, 연목(椽木), 도리(道里), 대들보 등에 단청 벽화로 용, 기린, 천마, 사자, 학, 호랑이 등의 상서로운 동물이나 사군자, 또는 불경에 나오는 교리적 내용들이 그려졌다. 초를 놓고 중간 공백에다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그림을 별지화(別枝畵) 또는 사찰장식화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한국 사찰의 벽화에는 불교의 교리와 관련이 없는 내용의 그림들이 가끔 눈에 띈다.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사찰단청문양과는 관련이 없는 중국의 고사도(古事圖)나 수복(壽福), 강녕(康寧), 다산(多産), 입신출세(立身出世), 길상(吉相), 벽사(?邪) 등의 상징을 띤 그림들이나 유교, 도교의 덕목을 다룬 내용까지 그려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그림들은 영·정조 이후 억불숭유 정책에서 벗어난 조선 후기에 불교가 재부흥하는 과정에서 그려진 것이다. 서민들의 현실적 요구가 전통불교문화에 습합되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서민들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던 다산, 다복, 장수와 같은 길상문화가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꽃 피우던 민중·전통 문화가 있었으니, 바로 민화였다. 민화는 서민들의 기복신앙과 길상문화를 가장 탁월하게 이미지화했던 분야였다. 당시 대내외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던 불교는 대승적 차원에서 서민대중문화를 다양한 방법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방편 중 하나로 단청 벽화 불화 속에 민화 도상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민화 속에서도 호랑이 그림은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자 많은 이야기, 설화, 신화 속에 등장하는 친근한 동물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담배 피우는 호랑이를 비롯, 우스꽝스러운 까치 호랑이 그림 등은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화적 소산이다.

수원 팔달사 명부전 외벽 벽화, 20세기. 호랑이가 담배피우는 그림은 대부분 사찰의 주불을 모시는 대웅전을 제외한 부속전각의 벽화 속에 등장한다. 산에서 가장 힘이 약한 토끼가 굽실거리며 바치는 긴 담뱃대와 가장 힘이 센 호랑이가 눈을 부라리고 으르렁거리며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양반과 양민들의 모습이다.

일찍이 불교문화 속에 호랑이가 등장하기는 하였으나, 그 의미가 불법수호 역할 정도로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찰 벽화, 단청불화 속에 민화와 구전설화, 신화 등에 등장하던 다양한 호랑이들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국내 상당 부분 사찰 벽화에서 까치 호랑이, 담배 피우는 호랑이, 나무에 매달려 벌 받는 호랑이, 황호랑이, 흙호랑이, 청호랑이, 표범, 줄범 등 서민들에게 친숙하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나한도나 산신도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애완동물처럼 온순하게 그려진 호랑이 역시 흥미롭다. 사찰에 그려지는 호랑이가 민화 속 호랑이와 꼭 같이 다양하게 그려지는 현상은 19~20세기 접어들면서 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다.

백호는 실존하지 않는 동물로 단어 그대로 털이 흰 호랑이를 뜻하지만 한국과 중국 등 동양권에서는 신화나 설화에 등장하며 영험한 상상의 존재로서 종교적 성격을 띤 대부분의 곳에서 보인다.

해남 은적사 약사전 백호도 벽화, 19세기. 은적사 불단 우측 벽에는 가사장삼을 걸친 수염 난 스님이 덩치 큰 흰 호랑이 두 다리를 잡아 거꾸로 내동댕이 치면서 야릇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백호는 당황스럽고 괴로운 표정이다. 불법 수호차원의 경계를 넘어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18~19세기 민중문화가 불교에 습합되어 만들어진 기상천외의 상상력이다.

〈산해경〉에 따르면 백호는 오백살이 되면 털빛이 하얗게 변하고 천수를 누리는 동물이라고 한다. 민속신앙에서는 호랑이에 바탕을 둔 상상의 동물로 청룡(靑龍), 주작(朱雀), 현무(玄武)와 함께 사신으로 신격화 되었다. 사람이 태어나 집터나 생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떠나서도 청룡, 백호 명당자리를 찾게 되는데 여기에서 백호는 용처럼 신격화되어 있어 낯설지 않은 생활 문화 속 한 부분이다.

수원 보적사 대웅전 외벽 벽화, 20세기. 조선시대 후기 권력의 상징인 양반과 힘없는 민중의 모습을 호랑이와 토끼를 통해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백회벽 바탕에 거칠고 빠른 필력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제작자는 단청 불사는 물론 민화 속 전통 호랑이 소묘에도 능통한 것으로 보인다. 폐사에 가까운 화성군 오산읍 독산성 내 보적사(일명 세마사)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작품으로, 1974년 6월 2일 평화봉사단 미국인 칼 스트롬 씨가 3km의 산길을 걸어 올라 촬영하였다.

백호는 서쪽 방위를 맡은 신으로, 금(金)의 기운을 담당하는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한다. 풍수지리설에는 서쪽의 산이나 기운을 뜻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출입문이나 벽장문 중문 위에 삼재소멸(三災消滅)을 뜻하는 호랑이부적을 붙이고, 대문에는 용과 호랑이 그림이나 글씨를 붙여 복을 빌고 액을 막고자 했다.

이와 같이 호, 특히 백호는 사악한 것으로부터 지켜주는 벽사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백호의 영험함과 신성함은 수준 높은 종교적 차원에서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을 수 있었으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의미를 부여하는 요인이 되었다.

예천 용문사 응진전, 19세기(1975년 촬영). 담배 피우는 호랑이 이미지는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미지이다. 호담국의 위엄에 걸맞는 뛰어난 상상력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덩치 큰 황호랑이와 작은 곰방대를 굽신거리며 바치는 흰토끼와의 관계를 해학적으로 묘사했다. 조선 후기 약화된 신분제도 속에서 등장한 한국적 풍자의 전형이다.

불교 속에 자리 잡은 호랑이는 회화 뿐 아니라 다양한 목조각이나 석조각품 속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호랑이 목조각으로는 무량의 공덕과 신통력을 지닌 불제자로 중생의 복록을 관장한다는 나한상이나 동자상들과 함께 조각하는 경우가 많다. 서민들과 친숙한 관계 때문에 사찰 전각 가운데 응진전, 명부전, 산신각 등에서 많은 호랑이가 무섭기보다는 친숙한 얼굴로 불당을 지키며 기원자의 염원이 성취되도록 돌봐 주려는 것 같다.

해남 대흥사 응진당 나한상, 20세기. 응진당의 마지막 불사는 1901년이다. 천정반자에는 외뿔달린 용그림과 목조16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목제 나한상 가운데는 귀여운 흰 호랑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정답게 쓰다듬고 있다. 나한상의 좌대인 괴석 천공 사이로 호랑이 두 마리가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어 응진당 전체 분위기는 불상의 위엄과 함께 평화롭고, 신비감이 감돈다.

민중 속에서 호랑이는 착한 선행을 하거나 지극한 효심을 보면 꼭 보은을 베풀기도 하지만, 우리 문화 속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이면서도 친숙한 양면성이 있다. 깨달음을 얻어 신통력이 높은 나한은 인간이 가장 무서워하는 호랑이지만 감로수를 먹여 정화시킨 후 길들여진 애완동물로 때론 호된 벌을 내려 중생의 고된 삶을 깨우치게 한다. 벌 받는 괴로운 호랑이 표정을 보는 중생들은 무한한 불법의 위대함을 배웠고, 힘센 강자를 혼내주는 모습에 고소한 웃음을 지었을 것 같다.

양산 통도사 응진전 내목도리(內目道里) 벽화, 20세기. 조선시대 후기 중생들은 현세구복, 사후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던 풍조 때문에 무량의 공덕과 신통력을 지닌 나한도량은 불전각에 비해 호랑이가 많이 등장한다. 편안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들어줄 것만 같아서다. 네 발을 쩍 벌리고 휘어진 꼬리를 들어올린 백호의 표정은 도량에 어떤 삿된 기운도 얼씬거릴 수 없다고 위협을 주고 있다.

조선 후기 사찰에 그려진 벽화들은 서민에게 다가가기 위한 한 걸음이자 불교예술의 영역을 넓히는 한 걸음이기도 했다. 사찰 벽화와 민화 모두 유교사상과 신분제 속에서 소외받고 억압받았던 서민들의 숨통을 틔워준 환풍구이자 안식처였으며, 당시 조선사회가 담아내지 못한 일반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들어있기에 지속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대구 파계사 원통전 불단조각 호랑이, 18세기. 대구 팔공산 주변계통 불사 가운데 불단 장엄 불사는 특이한 조각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불을 모시는 수미단에는 무한량 세계를 상징하는 상상의 세계가 묘사되는데 호랑이가 등장하는 경우는 전례가 없다. 사각의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구름 위에 그려진 호랑이는 중앙 불상을 향해 자세를 낮추고 앞발을 모아 합장을 하고 있다. 우리 주변 문화 속 가장 무서운 존재이지만 웃는 얼굴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호랑이 등에는 이름 석자를 적어놓은 낙서가 보이는데 이는 명성을 얻고자 자기 이름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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