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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한 바람, 은은한 법향 가득한 강릉신심 나는 국토순례 (266호)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에 위치한 안반데기 마을. 고랭지 배추로 유명한 이 마을은 해발 1,100m의 고원에 있어 구름 위의 땅으로 불린다.

신라 말과 고려 초, 중국 유학을 다녀온 선승들이 한반도에 선종의 씨앗을 뿌릴 때였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범일(梵日, 810~889)국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을 명주(溟州), 즉 오늘의 강릉 땅 굴산사(崛山寺)에 개창하여 선풍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범일국사는 입적 후에도 영동지역의 정신적 지주로서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 국사성황(大關嶺 國師城隍)’이 되고, 불교에서 시작된 강릉의 신앙은 민속, 유교와 조화를 이루며 지역문화의 기반을 이루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결합해 민족고유의 전통을 만들어내고 있는 고장, 강릉이다.

 

예맥족(濊貊族)이 강릉에 터를 잡고 산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강릉만의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이어왔다. 남한에서 가장 전형적인 해안단구(海岸段丘) 지형인 태백산맥의 동쪽은 기원전 129년 위만조선에 속해 창해군(滄海郡)이라 불리었는데, 서기 30년에 해방되어 동예(東濊)라는 새로운 자치국이 되었다.

고구려 미천왕 14년(313)에 고구려에 복속돼 ‘하서랑(河西良)’·‘하슬라(何瑟羅)’로 불리다가 신라의 영토가 된 후에는 ‘하서주(河西州)’·‘명주(溟州)’ 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는 강릉부로,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을 통합해 강릉시로 변경했다.

영동의 수호신 범일국사
단오제의 주신이 되다

강릉은 불교사찰 이외에도 조선 효령대군의 후손이 건립한 선교장과 신사임당·율곡 이이 모자의 얼이 서린 오죽헌을 비롯한 유교 사당, 그리고 대관령 국사성황당 등의 민속이 조화롭게 공존하며 제각기 발전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고장이다.

강릉의 문화는 불교를 기반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신라 말 범일 스님은 15살에 출가, 20살에 구족계를 받고 831년 왕자 김의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법을 구한 뒤 847년 귀국했다. 귀국 후 명주도독의 요청으로 40여 년간 굴산사에 주석하며 선종을 알리는 한편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889년에 입적했다. 강릉을 대표하는 불교 유적 중 한 곳인 굴산사지(사적 제448호) 인근에는 통효대사 범일국사의 탄생과 관련된 유적이 몇 곳 있다.

범일국사를 모신 것으로 전하는 굴산사지 승탑. 뒤에 보이는 넓은 땅이 굴산사지다.

굴산사지 승탑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는 석천(石泉)이, 승탑 입구 왼쪽 산에는 학바위가 남아있다.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범일국사의 탄생설화는 다음과 같다.

학산리(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자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 일이 있은 뒤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아이는 나중에 국사(國師)가 되었는데,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국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관령 성황사(城隍祠). 대관령 국사서낭(성황)인 범일국사를 모신 신당이다.

범일국사가 입적한 후 강릉사람들은 국사를 자신들의 삶을 보살피고, 자연재해로부터 보호해주는 대관령 국사성황으로 모신다. 범일국사를 모신 곳이 바로 횡계 대관령면에 위치한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 강원도 시도기념물 제54호)이다.

성황사에서 약 50m 떨어진 지점에는 강릉의 수호신이자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산신각이 있다. 매년 음력 4월 15일 이곳에서 국사성황제를 올리는데, 불교가 무속에 녹아들어 형성된 독특한 지역문화의 한 사례다.

대관령 산신각(山神閣). 성황사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을 모셨다.

범일국사가 머물렀던 굴산사지는 몇 해 전 홍수로 인해 유적 일부가 드러나 발굴조사를 진행, 사역을 확인했다. 현재는 매립한 뒤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 굴산사지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와 석조여래좌상, 승탑 1기가 남아 있다.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8호 굴산사지 석불좌상.

보물 제86호인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됐으며, 높이가 5.4m에 달한다. 당간지주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는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8호로 지정된 석불좌상이 있다. 이 석불좌상은 전신에 균열이 있고 상호(相好)와 수인(手印), 하반신이 심하게 파손돼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듯 보인다. 발견 당시에는 석불입상으로 알려졌으나, 1992년 해체보수 때 석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밝혀졌다. 국보 제124호 한송사지 보살좌상, 보물 제84호 신복사지 석불좌상과 함께 고려시대에 조성된 강릉 지역의 중요한 불교조각으로 꼽힌다.

당간지주에서 오른쪽 대각선 방향으로 보물 제85호인 승탑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가 3.5m인 승탑은 8각 원당형(圓堂形)인데, 구조와 조각수법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승탑은 889년에 입적한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보물 제86호 굴산사지 당간지주.

굴산사에서 시작된 선불교
강릉 땅에 깊게 뿌리내려

굴산사와 더불어 강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불교유적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성산면 보광리 소재 보현사(普賢寺)다. 이 사찰은 범일국사의 심인(心印)을 받은 낭원대사(朗圓大師) 개청(開淸) 스님이 창건했다.

낭원대사는 8세에 공부를 시작해 유학(儒學)을 익혔다. 이후 화엄사(華嚴寺) 정행(正行) 스님에게서 수학하고,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범일국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심인(心印)을 받았다. 범일국사가 입적한 뒤 보현사를 창건하고 포교에 힘썼다. 세납 96세, 법랍 72세로 보현사에서 입적했다. 신라 경애왕이 스님의 덕이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국사의 예를 표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이 낭원대사(朗圓大師)라 시호하고, 탑 이름을 ‘오진(悟眞)’이라 했다.

보현사 입구의 낭원대사탑비.
보광리 보현사 뒷산에 있는 낭원대사탑.

현재 보현사 입구에는 보물 제192호인 낭원대사탑비가, 뒷산에는 보물 제191호인 낭원대사탑이 남아 있다. 낭원대사탑비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건립됐는데, 낭원대사탑도 이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 구족달(仇足達)이 썼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보광리 석조여래좌상.

보광리에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석조여래좌상이 좌대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려전기에 조성된 이 불상이 어느 사찰에 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눈·코·입의 윤곽은 비바람에 깎여 희미해졌지만, 산기슭에 고요히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부모가 아이를 보는 것처럼 온화하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관음리 오층석탑.

보광리 인근의 관음리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2호 오층석탑 1기가 무상한 세월을 견디며 우뚝 서 있다. 석탑이 위치한 지역은 안곡(安谷)이라는 곳인데, 문헌에는 안곡사(安谷寺) 또는 안국사지(安國寺址)로 기록돼 있다. 탑 주변에서는 ‘안국사(安國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됐고, 석불좌대로 추정되는 석재와 기와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축대도 남아 있다. 절은 사라졌어도 그 흔적은 남아 불법(佛法)의 향기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5월 초 강릉 성산면 보광리와 관음리에 발생한 산불로 당시 보았던 수많은 산림이 잿더미로 변해버려 마음 한편이 무겁다.

이외에도 강릉 지역에는 보물 제82호 대창리 당간지주와 수문리 당간지주, 방내리 삼층석탑 등 불교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불교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불교와 관련된 지명도 여럿 있다. 보광리의 ‘보광(普光)’은 보현사에서 따온 ‘보’와 ‘마을이 빛을 내는 곳〔光〕’을 합친 말이다. 관음리는 1916년 안곡(안국동), 개자리(가좌리), 괴일(고곡동)을 통합한 지역명이다. 본동 입구 북쪽 골에 관음사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연곡면 삼산2리에는 ‘절터골’이 있는데, 옛날에 이 골짜기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저울대’는 암자골에서 흘러나온 물이 절골에 있는 봉에서 합수되는데, 이때 물이 마을 방향으로 흐르면 마을이 흥하고 사찰 쪽으로 흐르면 절이 흥한다고 했다. 병자년에 물길이 마을 방향으로 뚫려 마을이 흥하고, 사찰이 망했다고 한다. ‘마을과 사찰 쪽을 저울질하는 저울대 노릇을 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산3리에는 ‘불공막(佛供幕)골’이 있는데, 옛날 이 골짜기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불공을 올렸다고 한다. 이 많은 불교유적들은 강릉에 불교문화가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조선 유학 주도한 율곡 이이와
불교 믿다 파직된 허균의 고향

강릉은 불교와 함께 유교문화가 꽃을 피운 고장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어머니상인 신사임당(1504∼1551)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오죽헌(烏竹軒, 보물 제165호), 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1569~1618)과 그의 누나 허난설헌(1563~1589)의 생가, 관동 제일의 사대부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선교장(船橋莊), 국보 제51호 객사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9호 강릉향교 등이 대표적이다.

오죽헌은 집 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아 율곡의 이종사촌인 권처균이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은 데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인 율곡은 기호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조선에 성리학을 토착화시켰다. 그리고 율곡을 낳은 신사임당은 시·그림·글씨에 능한 여류 예술가이자 한국 어머니의 표상으로 손꼽힌다. 오죽헌 곳곳에는 신사임당과 율곡의 자취가 남아 후손들에게 묵묵히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오죽헌 내의 강릉시립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강릉 옥천동 소재 통일신라시대 무진사터에서 출토된 석탑부재와 석불입상이 말없이 관람객을 반긴다.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서인지 쓸쓸한 느낌도 들었다.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한다는 말이 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도 그런 인물이다. 홍길동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자, 조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최초의 사회 소설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홍길동전〉을 탄생시킨 이가 바로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허균이다. 허균과 그의 누나이자 27세의 짧은 생을 살았던 조선 중기의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이 강릉이다.

허균은 젊었을 때부터 경전을 읽고, 서산·사명대사와 친분이 두터웠다. 불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고 사림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 허균은 파직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래의 시를 읊었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과 그의 누나 허난설헌의 생가. 남매의 아버지 초당 허엽이 살던 곳이다.

문파관작(聞罷官作)

예교녕구방(禮敎寧拘放)
부침지임정(浮沈只任情)
군수용군법(君須用君法)
오자달오생(吾自達吾生)

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식을 듣고
예교에 어찌 묶이고 놓임을 당하겠는가
부침을 다만 정에 맡길 뿐이라네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네

허균은 사명대사가 입적하자 사명대사의 문집인 〈사명집〉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 양명학, 서학 등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다양한 학문을 익혔고, 통념적 도덕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실천적인 삶을 살았다.

허균 남매의 생가는 그들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이 살았던 초당이다. 강릉의 명물인 ‘초당 순두부’의 ‘초당’도 허엽의 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들 남매의 생가 앞쪽에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두 남매의 사상과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한 영상자료, 그리고 〈난설헌집〉, 허균의 형인 허봉(許, 1551∼1588)의 연행일기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 허균이 가려 뽑은 방대한 조선시대 한문시 모음집인 〈국조시산(國朝詩刪)〉 등이 전시돼 있다. 생가와 기념관을 둘러봤다면, 생가 뒤쪽의 아담한 솔숲을 거닐어 보는 것도 좋다. 불어대는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가지의 울음과 바람에 떠밀려오는 솔향기가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게 한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출가 사문(설잠 스님)이 되기도 했던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

강릉에는 허균과 더불어 한국불교사와 한국문학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한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곳, 불교 철학과 유교의 이상을 결합하려고 노력했던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이다. 김시습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어 속세를 떠난다. 그리고 그는 스님이 된다. 법호는 설잠(雪岑).

매월당은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썼다.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 5편이 실려 있는 조선 초기 한문 소설이다.

매월당은 15세 때 강릉에서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다. 49세에 낙향해 강릉·양양 등지를 여행했고, 57세에 설악산에 입산했다. 59세 때인 1493년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기념관에는 매월당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실, 매월당문집 영상자료 등 3개의 영상시설과 한국인물찾기 등 체험 시설 2곳이 있으며, 〈매월당집〉 등 50여 점의 유물을 볼 수 있다. 매월당의 영정과 위패는 기념관 뒤편의 창덕사(彰德祠), 그리고 성산면 보광리의 청간사(淸簡祠)에 봉안돼 있다.

조선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충주에서 강릉으로 옮긴 후 약 100년 간 건립한 99칸 짜리 사대부가 선교장.

오죽헌과 함께 강릉에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명문 사대부가의 가옥인 중요민속문화재 제5호로 지정돼 있는 선교장이 있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집 앞이 경포호수였으므로, 배로 다리를 만들어 호수를 건너다녔다고 해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李乃蕃)이 충주에서 강릉으로 이주, 족제비 무리의 안내로 길지(吉地)인 현재의 집터에 살기 시작해 대를 이어 거주하는 99칸짜리 집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 꾸준히 건물을 증축했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을 비롯해 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活來亭) 등이 있다.

경포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경포대.

가장 오래된 안채인 주옥(住屋, 초가집)은 1703년 이곳에 터를 잡을 때의 지어진 건물이다. 선교장을 둘러싸고 있는 솔숲에서 뿜어내는 그윽한 솔향과 그늘이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9호 강릉향교. 이곳에 제향공간인 대성전(보물 제214호)이 있다.

이외에도 나주향교, 장수향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향교로 손꼽히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99호 강릉향교(江陵鄕校)는 완벽한 규모와 기능을 갖춘 유교식 건축물로 손꼽힌다. 제향공간인 대성전(보물 제214호)과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남아 있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건립된 강릉부 객사가 있던 터의 대문인 객사문(국보 제51호)과 강릉대도호부관아, 칠사당, 해운정(보물 제183호) 등 오래된 건물들에 강릉의 유구한 역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불교 건축의 영향을 받은 국보 제51호 객사문.

진표율사는 강릉에 미륵신앙을 전했고, 미륵불을 자처한 궁예(?~918)는 강릉을 거점으로 군대를 일으켜 천하통일을 꿈꾸었다. 고려·조선시대를 이끌어간 수많은 학자와 문인, 예술가를 배출해낸 곳도 강릉이다.

정동진의 해돋이도, 코를 자극하는 솔향과 커피향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걸으며 보고 들어야 내 것이 되고, 몸과 마음이 정화된다. 구불구불 정겨운 대관령 옛길과 해발 1,100m에 위치한 고랭지 채소 재배지로 이름난 안반데기 마을 등 비경(秘境)과 문화유산이 즐비한 힐링의 땅, 솔향 가득한 고장, 강릉으로 떠나자.

정동진 해변.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면 망중한을 느낀다.

이강식 기자  lks9710@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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