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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 살피며 신심 다지는 성지순례의 즐거움해탈문 (266호)

적멸당전다승경 寂滅堂前多勝景
길상봉상절섬애 吉祥峯上絶纖埃
방황진일사전사 彷徨盡日思前事
박모비풍기효대 薄暮悲風起孝臺

적멸당 앞 빼어난 경치가 많고
길상봉 위에는 한 점 티끌도 없어라.
온종일 서성이며 지난 일 생각하니
저물녘 효대에 슬픈 바람이 일어나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성지순례(聖地巡禮) 문화가 활발하다. 글로벌 시대, 해외여행이 일반화되면서 종교 성지를 찾는 성지순례가 보편화 된 지 오래다.

성지란 종교의 발상지나 중요한 유적지다. 그러한 성지를 찾아가 자신의 신앙심을 고취하며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하는 것이 성지순례의 목적이다. 때문에 성지순례는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도 매우 엄숙한 종교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몇 달 동안 오체투지를 하며 라싸의 포탈라 궁을 향해 가는 티베트 사람들은 초인적이기까지 하다.

일본 진언종의 오헨로 순례길은 88개의 사찰을 차례로 순례하는 코스로 유명하고, 칠레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세계인의 걷기명소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경우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중요 성지여서 끝없는 분쟁의 현장이다. 이 지역에서 200여 년간 여덟 차례에 걸쳐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종교에서 성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대변해 준다.

신라의 화랑들도 전국의 명산대천을 다니며 심신을 수양했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신앙적 이상이나 역사적 중요성을 간직한 곳이었다. 금강산이나 울주의 천전리 각석, 제천 점말동굴 등에 화랑들이 남긴 흔적은 그들이 성지순례를 중요한 수행과정으로 여겼음을 알게 한다.

굳이 종교적인 성지순례가 아니더라도 성직자나 지식인들이 특정한 자연이나 유적지 등을 찾아가 거기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인격을 함양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풍습이다. 고려와 조선의 스님과 선비들이 남긴 문집에는 상상외로 여행기록이 많다. 시와 산문 혹은 일기 등 다양한 형식으로 명승(名勝)이나 사찰 등을 탐방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조선의 지식인들(승려와 선비)은 지적 탐구심을 가슴 가득 담고 중국 대륙으로 떠났다. 승려들에게는 구법순례였고, 선비들은 유학(留學)이나 공무를 겸한 유행(遊行)이었다. 그러한 기록들이 우리의 인문학적 자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앞에 든 시는 한국천태종의 개립조 의천(義天) 대각국사(大覺國師)의 작품이다. 〈대각국사문집〉 제17권에 전하는 이 시의 제목은 ‘지리산 화엄사에서 짓다[留題智異山華嚴寺]’이다. 대각국사의 문집에는 사찰에서 지은 시가 많다. 지역도 전국적이다. 출가 이후 송나라 구법순례를 계기로 고려천태종의 개립과 속장경의 간행, 수많은 강의와 설법 등으로 이어진 대각국사의 생애는 위대한 수행자의 삶이 보여주는 경외감으로 점철된다. 그런 삶의 빛나는 모서리들이 여러 시편에 스미어 있다.

특히 그 가운데 사찰을 배경으로 하는 시들은 사찰이라는 성지에서 수행자가 가지는 감회와 감상들을 명징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화엄사에서 지은 이 절구는 시상이 담백하고 의취가 고즈넉하다. 시의 전반부에서는 지리산이라는 명승에 안긴 명찰의 풍경을 빌어 수행자의 마음을 그려내고 있다. 적멸당 앞에 빼어난 경치가 많다는 것이 평범한 서술 같지만, 그 속에는 화엄종의 대찰인 화엄사의 위용을 품고 있다. 화엄사 뒤를 병풍처럼 외호하고 있는 노고단 길상봉 위의 맑은 하늘 또한 대각국사 자신이나 화엄사 수행자들의 청정한 가풍을 은유한다.

시의 후반부는 서사적 감상을 통해 순례자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온종일 서성이며 생각하는 ‘지나간 일’이란 화자 자신의 지내 온 시간들을 반추하는 것이기 보다는 화엄사의 창건주 연기조사에 대한 일로 읽을 수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구절에 연기조사의 일화가 생생하게 담긴 효대(孝臺)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효대는 오늘날 각황전 뒤편의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이 있는 언덕이다. 그곳에서 대각국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무상의 도리를 새삼 일깨운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장구한 불교사에는 성지로 꼽을 만한 유적지가 많다. 전국의 고찰과 사지 혹은 불교유적지가 다 성지라 할 수 있다. 가까운 불교 성지를 찾아다니며 내면을 살피고 신심도 다지는 기회를 자주 갖길 바란다.

임연태 편집주간  mian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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