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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의 세계는 깊은 인연이자 운명나는 걷는다 무소의 뿔처럼 (266호)

불화작가 김명희
법명은 운여화(雲如華).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을 수료했다. 헤럴드전통공예대전 불화부문 최우수상, 대한민국 전통공예대전 특별상 등 다수의 수상경력이 있다. 네 차례 개인전, 10여 차례 초대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현재 대한민국 전통공예협회 불화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금니 약사부처님도(일명 먹탱화 약사부처님도).

중학교 1학년 때 꾼 꿈은 지금도 생생하다. 부산 앞바다가 보이고 벼랑 위에 세워져 있던 사찰의 위엄, 법당에서 온화한 미소로 나를 맞아 주시던 부처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바닷가 벼랑을 떠올려보니 구포쯤이라고 생각이 됐다. 어머니께 500원을 받아 무작정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인근을 찾았다. 길에서 만난 할머니께 꿈에 본 형태의 절을 설명하고, 비슷한 형세의 절을 참배했다. 이후 몇 번 더 찾아가 사찰청년회 회원에게 불교의 기초교리를 배우기도 했다. 이때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것은 근엄한 모습의 부처님이 아니라 불상 뒤에 모셔진 탱화였다. ‘저 그림은 분명 신이 그렸을 것이야’라고 막연히 생각하던 그날 그 순간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으리라곤 당시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교와 불화 입문

2013년 조계사 강의실에서 불화그리기를 지도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될 때까지 이 사건은 기억 한 편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옛 기억을 끄집어내게 된 계기는 갑자기 찾아왔다.

1991년쯤으로 기억한다. 밖은 영하 15℃에 달했지만, 집안은 보일러를 켜놓아 따뜻했다. 6살이 된 큰딸은 동화책을 보고 있었고, 3살 된 아들은 곤히 잠을 자 집안은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김명희! 추운날씨에 밖에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단 말인가?’하는 목소리와 함께 주장자로 한 대 내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벌떡 일어났다. 나는 서둘러 두 아이를 등에 업고,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인근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자치센터)에 가서 5만원어치의 재활용휴지를 사서 택시를 타고 임시아동보호소를 찾아갔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행한 나눔의 첫 시작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가사 일을 책임져야 했기에 물질적인 나눔을 자주 실천할 수는 없었지만 몸으로 할 수 있는 봉사는 꾸준히 하고자 노력했다. 이 활동은 내가 향후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확실하게 설계하는데 모티브가 되었다.

세상에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려진다. 그 중에는 장애아가 적지 않다. 이들이 거주하는 임시 아동보호소에는 혀가 없어 분유 50㎖를 먹는데 두 시간이 걸리는 아이도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들은 방바닥에 펼쳐진 포대기가 자기 영역인 듯 그곳만 벗어나면 놀라서 울며 안아달라고 한다. 나는 손발이 없는 아기들을 돌봐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후에도 이 눈물의 의미를 잊지 않겠다고, 더욱 나누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주말부부라 나의 나눔과 봉사를 남편은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일 년에 몇 차례씩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기도 하고, 문구류를 가득 사서 보육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남편은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하던 초기, 관련 업무 차 제주도로 출장을 갔다가 과로로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건강회복을 위해 잠시 병가를 낸 남편은 종교가 없었지만 불교교양대학에 입학하고, 입적하신 무진장 스님으로부터 경전도 배웠다. 나 역시 함께 불교를 공부했는데, 이즈음 조계사 문화강좌에서 불화그리기를 개강한다고 해 남편에게 수강을 권유받았다.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두 아이를 키워야했고, 집안일을 하면서 아픈 남편의 건강을 챙기는 등 바쁜 나날을 이어갔다. 하지만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배우는 불화는 힘든 일상을 이겨내는데 큰 힘이 되었다. 남편도 불교공부에 전념했다. 내가 부처님을 그릴 때면, 남편은 사경을 하며 새벽을 맞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불화를 배우고 있었지만 불화에 대한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불화를 본격적으로 배워보고자 직장을 그만두고 지도 선생님의 노원구 상계동 화실을 다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해서 어렵사리 허락을 받았다. 나에겐 그 어떤 즐거운 일도 불화를 그리는 순간보다 즐겁지는 않았다. 내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그 순간의 희열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나는 불화를 그리면서 혹여 이익을 남기게 된다면 그 이익은 반드시 남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다짐했다. 부처님을 그리면서 그 수익을 내 것인 냥 취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됐다. 불화에 입문한 지 24년. 나는 지금도 소외된 이웃이나 자비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이 초심을 잃지 않고자 불화를 그릴 때마다 새삼 다짐하곤 한다.

그리스 전시회에 출품한 해수관세음보살도.

스스로 지은 호 ‘무득’

오솔길을 따라 법당에 들어오니 스님께서 법문을 하고 계셨다. 그 오른편에 계시는 관세음보살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이 가리킨 곳을 보니 한자로 가득 차 있는 흑판에 ‘무득일심(無得一心)’ 네 글자가 눈에 띄었다.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의 그 일은 생생했고, 감동적이었다. 잊어버릴까봐 네 글자를 메모했다.

불화 작품에 낙관을 찍어 전시할 일이 처음으로 생겼다. 호(號)를 지어야 하는 상황인데 꿈속에서 본 ‘무득’이 떠올랐다. 나는 ‘무득’의 뜻을 나름 ‘무소유’로 받아들였다. 즉 비우는 공부를 계속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같았고, 그 실천법이 나눔이라고 생각돼 따르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나보다 더 많이 나눔을 실천하는 불자들도 많다. 다만 내 경우는 부처님을 그리면서 체험하는 신심이 나눔을 이어가는 힘의 원천이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명희 불화작가가 수강생들에게 완성된 오존불도와 현왕탱화를 설명하고 있다.

문화강좌로 시작한 불화는 조계사청년회 불화반에서 8년 간 강의를 하는 인연으로 이어졌다. 내가 어렵게 습득한 불화 관련 지식을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이로 인해 일부 직장인들이 일주일에 하루를 투자해 불화를 배우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하며 변화하는 모습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현왕탱화.

부처님의 가피를 떠올리면 두 가지 기이한 사건이 생각난다. 믿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험을 가감 없이 적는다. 큰 아이가 돌이 되기 전 밤에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한 스님이 ‘빨리 일어나라’고 외쳤다. 눈을 떠보니 장롱 앞에 도둑이 서 있었다. 눈을 마주친 도둑은 다행히 우리 가족을 해치지 않고 도망치듯 나갔다. 또 둘째 아이 출산 후 몸이 좋지 않아 수술 때문에 마취를 해야 했는데, 나는 하루 종일 깨어나지 못했다. 그 사이 염라대왕을 만나는 꿈을 꿨다. 저승사자가 연상되는 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을 따라 흰 연기가 자욱한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 염라대왕 앞에 섰더니 잘못 데리고 왔다고 다시 바래다주라는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댕기머리를 한 동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인도해주었다. 아스라이 친정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 안 죽었는데 왜 그렇게 우세요?’하고 말하려는데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존불도(157x241cm | 162x108cm). 왼쪽부터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약사불.

동자가 숲을 지나 나를 바래다주던 그 순간에 나는 깨어났다. 이 일로 나의 불교와의 인연은 무량하고, 그 인연이 불화를 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꿈속에서 본 선재동자·업경대·염라대왕 등은 훗날 내가 그리는 시왕도의 한 장면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다시 주어진 삶이란 생각은 불화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 덕분이다. 동반자와 함께 부처님 말씀을 공부할 수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현재 조계사 성역화사업으로 인해 청년회 동아리활동이 중단돼 강의를 쉬고 있지만, 조만간 다른 사찰에서 강의가 예정돼 있다.

2014년 5월 한전아트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뒷면 왼쪽은 귀녀도, 오른쪽은 대세지보살도다.

돌이켜보면 내게 불화는 깊은 인연이자 운명이었다. 불화가 있었기에 내 삶 속에 일어났던 모든 일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24년 간 불화를 그리며 사찰 법당에 봉안도 했고, 개인전·단체전을 열었으며, 불교박람회에도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늘 갈망한다. 전통불화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대상을 담아내고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다. 불자로 살아가며 부처님의 형상을 그림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자 크나큰 가피가 아닐 수 없다.

불화작가 김명희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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