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보훈의 달 특집 (266호)

지금 쓰려는 내용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고 경험이다. 그러므로 많은 다른 법사들의 또 다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군포교 초기 법사로서 주(駐)월남사령부, 육군본부 등 기획부대에서 근무한 관계로 국내 군포교의 경험은 부족했다.

1968년 최초로 군법사 5명이 임관했다. 제일 왼쪽이 필자.

군법사 제도의 동상이몽

1968년 11월 30일 한국불교 최초로 군법사 5명이 임관되었다. 나도 그중 하나로 군법사 군복을 입고 임관하였으니, 군법사제도가 시행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대한민국의 국군창설은 미국군 편제(編制)를 참고하였고, 따라서 미국군대의 군종제도가 한국군에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군목과 천주교의 군신부는 있었지만 불교법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불교계에서는 군종법사의 파견을 노력해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상 해방 이후의 한국불교종단은 전반적인 시스템이 조직된 행정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이후 비구·대처승의 치열한 분쟁을 거친 후에 다소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고, 군 또한 월남파병이라는 큰 사건이 있어 불교군종장교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월남은 대다수 국민이 불교신앙을 갖고 있으므로 한국군이 월남인들과의 친선과 교류를 위해서는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고, 이에 군법사 제도는 급속한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월남 사이공의 국사. 불교기가 게양돼 있다.

군법사 제도의 실현은 불교의 오랜 숙원이었다. 대한민국의 남성은 모두가 군대를 가고, 그곳에서 포교할 수 있다는 것은 불교종단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군의 입장과 불교의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았다.

불교교단은 마치 군에 포교사를 보낸다는 생각을 하지만 군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군의 입장은 여러 종교가 와서 포교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통해 군의 전력을 강화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종장교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군의 제도와 규정을 지켜야 하고, 근무 이외의 시간에 한해서 각기 종교에 의한 신앙 지도를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법사도 일단은 군인이 되는 것이고, 군의 규칙과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교종단이 군법사를 파견하는 의도와 군 당국이 군법사를 받아들이는 입장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최초의 군법사 5명이 광주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의 모습. 뒷줄 가운데에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 청담 스님, 베트남 불교지도자 틱 탐 짜우 스님, 앞 줄에는 권기종, 권오현, 김봉식, 장만수, 이지행 법사가 앉아 있다. 왼쪽에 당시 전국신도회 박완일 사무국장이 함께 했다.

각종 제도의 정착

솔직히 말해서 1968년도 제1기 군법사가 파견될 때에는 오늘과 같은 종단 내에 군종교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총무원 교무부에서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이때 군법사가 제일 먼저 확정 지어야 할 것은 호칭 문제였다. 제1기 다섯 명 중에는 결혼한 사람이 두 명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군인사법에 정해진 불교대학을 졸업한 대덕법계 이상의 승려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 불교대학 졸업자 중에서 선발하여 파견하게 되었고, 포교사의 자격으로 파견되는 것이니, 굳이 비구를 고집하지 않았다.

이때 1기생은 스스로 법사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고, 당시 종립 중·고등학교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선생을 교법사라 하였고, 군포교를 위한 군종장교를 군법사라고 한 것이다.

법사(法師, dharma-bh??aka)라는 어휘는 여러 초기 대승경전에 나타나는 호칭으로 불법을 설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금도 중국에서는 스님의 호칭이 ‘법사’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현장법사, 원측법사, 또 원광법사의 ‘법사’는 스님이라는 뜻이고 지금도 중국에서는 “화시(法師)”로 호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군법사’라고 호칭한 것은 대단히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군에서는 성을 붙여, 김법사, 이법사라고 부르게 되니 조금도 어색함이 없었다.

월남 국사(國寺)에서 필자.

언제부터인가 이것을 고쳐서 군승이라고 하면서 스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김스님, 이스님, 이렇게 부르는 대단히 어색한 호칭이 되었다. 그리고 군법사가 삭발을 하는 것은 군 규정에 어긋난 것이다(현행규정은 개정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군법사는 수행도량에 수행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군대라는 특수집단에서 포교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엄격한 지계생활보다는 활동할 수 있는 융통성이 중요하다.

호칭에 이어 법복의 문제도 중요하다.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고, 가사를 걸치는 것은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것처럼 너무 어색하다. 초기 법사들은 소위 법복을 고안하여 입었다. 후에 마치 목사가운과 구별이 안 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군복에 맞는 법복의 고안이 필요했다. 각종 군에서만 있는 법회의식에서부터 부대장 이·취임 법회나, 결혼식·영결식 등의 의식도 제정하였고, 국방부를 통해서 의식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장교들의 신행단체인 육군불교장교회, 사병의 법우회 등을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이러한 일련의 제도들은 종단과는 관계없이 초기 법사들의 노력에 의해서 정착하였다.

월남에서 있었던 일

법사의 파월(派越)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우리 장병들의 신앙지도와 사기진작과 여러 가지 고충상담 등의 내적 업무가 있고, 둘째는 대민업무이다. 아무리 전투를 잘한다 하더라도 월남 주민과의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투가 될 수 있다.

한국군이 월남에서 대민사업으로 추진한 것으로는 태권도와 불교활동이다. 대민사업에는 대민지원도 있지만 합동법회를 실시하여 월남인들과 동질감을 갖게 하는 것이 주된 행사였다.

한번은 월남군 틱탐쟉(釋心覺) 군종감이 법당이 하나 있는 넓은 땅이 있는데, 그곳에 학교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한국군에서 정지(整地)를 좀 해줬으면 하는 지원요청이 있었다.

우리가 주월사령부 민사처에 이야기를 했더니, 현장을 한번 가보고 정지할 지형이나 규모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기에 틱탐쟉 군종감과 한 차를 타고 현장으로 갔다. 말대로 그곳에는 조그만 법당이 있었기에 참배를 하기 위해 함께 법당으로 들어가는데, 틱탐쟉 군종감은 차에서 피우던 담배를 들고 그대로 법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랐지만 뭐라고 하지는 못했다.

틱탐쟉 군종감은 월남에서 존경받는 스님으로 사이공(현 호치민) 시내에서 규모가 큰 ‘광명사’라는 절의 주지었으며, 현역 대령이었다. 월남 불교는 유일하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대승불교권인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등의 한자경전에 음을 달아 읽고 있다.

모든 스님들의 법명 앞에 ‘틱(중국의 釋)’ 자를 쓰고 있는 것도 중국불교의 영향이다. 당시 월남불교의 지도자인 틱탐짜우(釋心珠)나 월남의 불교대학인 반한(萬行) 대학 총장 틱민짜우(釋明珠)의 ‘틱’은 모두 중국불교의 ‘석(釋)’자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불교지도자 틱낫한도 한자는 ‘釋一行’이고 월맹의 정치적 지도자 호치민도 ‘胡志明’이 불러진 발음이다.

인도차이나의 불교국가인 미얀마·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은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월남의 스님들은 가끔 흡연을 하는 경우가 있으나 법당 안에서 피우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마사에서 월남의 고승이신 틱한하이 스님(나트랑 보리사 조실. 흰 가사)을 모시고.
스님의 오른쪽이 이규환 사단장, 왼쪽이 이지행, 권오현 법사.

걸식한 음식으로 대접을 받다

내가 주월사령부에 근무하던 1969년의 일이다. 월남에서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사이공의 국사(國寺, 나라의 대표사찰)에서 부처님오신날 기념법회가 거행되고, 한국군도 참석해달라는 초청이 있었다. 지휘부와 상의한 결과 버스 두 대, 100여 명의 병력을 참석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행사 하루 전날 참모장이 법사인 나를 보자고 하여 참모장실로 갔다. 참모장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우리 군이 참석하는데 ‘총을 가지고 가야하나?’ 아니면 ‘총 없이 가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물었다.

그렇다, 이미 수년 전에 구정공세라 하여 설날을 기해 베트콩의 대대적인 습격이 있어 많은 피해를 끼친 일이 있었다. 그러니 100여 명의 병력이 피아가 구별되지 않는 군중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다가 그럼 총을 버스에 실어두고, 행사장에는 맨몸으로 참석하기로 했다. 유사시에는 각자 버스까지 달려온다는 작전이었다.

당시 참모장은 윤성민 장군으로 후일 국방부장관이 되셨고, 국방부장관 시절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중앙학연구원)의 국가지도자 연찬에 참석하였는데 나는 당시 정신문화연구원 원장비서실장을 맡고 있어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행사에는 종교가 다르지만 주월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이 전투복에 권총을 차고 참석하였으며, 성황리에 무사히 종료되었다.

나는 주월사령부(사이공)에 근무했고, 백마부대(9사단)에는 권오현 법사가 있었고, 군종사병으로 법타 스님(전 동국대 정각원장)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 백마부대를 방문했을 때 권오현 법사께서 오늘 점심은 월남 스님들의 초청이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였다.

우리를 초청한 스님들은 월남에서는 흔하지 않은 스님들로 월남어로 꺽시(즉 ‘걸사(乞士)’라는 의미)라고 하는 걸식으로 수행하는 스님들이다. 걸식을 하는 스님들이 걸식한 음식을 차려 놓고 우리를 초청한 것이다.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비록 얻어서 차린 음식이지만, 성찬이었다. 지금도 월남에서 꺽시의 공양초청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고 있다.

1969년 최초로 건립된 군법당 6군단 불이사.

WFB 총회참석

1969년 세계불교도우의회, 즉 WFB총회가 월남에서 개최되었다. 그때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한국에서는 대표를 파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월남에서 근무하고 있는 네 명의 법사가 한국대표로 참석한 일이 있었다.

회의 장소는 사이공에서 당시 제일 큰 마자스틱 호텔이었다. 호텔의 제일 위층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이 있었는데, 식장에 들어서니 가운데를 갈라놓고, 한쪽은 육식(meat)을 하는 장소, 다른 한 쪽은 채식(vegetables)을 하는 장소로 양분하여 영어로 표시를 하였다. 대개의 (월남)스님들은 육식 쪽으로 가고 채식 쪽에는 대만·홍콩·말레이시아뿐이었다. 당시 중국불교는 없는 시대였다. 이 또한 처음으로 경험하는 충격이었고, 이런 경험을 통해 세계불교의 경향, 특히 남방 테라바다 불교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주월 사령부는 대규모의 부대가 아니라, 이름 그대로 사령부의 기능만을 갖고 있고, 사령부의 행정 및 경비를 위한 본부중대만이 있는 소규모의 부대다. 얼마간의 법회 홍보를 한 후, 법회를 열었더니, 최초의 나의 법회는 참석 인원이 총 여섯 명이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일은 나만의 경험이 아니고 초창기의 법사들 모두가 겪은 애로였다.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불교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법회라는 성격의 집회가 있다는 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오직 불교에는 불공이라는 의식만이 있다고 알고 있고, 심지어는 무속신앙과의 구별조차도 되지 않던 시대의 법사활동은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나는 여섯 명의 최초 법회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권기종
동국대 명예교수.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초대 군법사를 지냈으며, 교법사와 동국역경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연구원,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 한국불교학회장, 천태종 원각불교사상연구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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