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266호)

6월의 녹음은 거침이 없다. 산과 들을 짙푸르게 물들이는 저 신록의 성장은 우주만물이 지닐 수 있는 생동감의 극치라 할 만하다. 자고 나면 산이 한 뼘씩 자라고, 나무와 나무가 서로 어깨를 어우르고 있다. 논과 밭에서는 부지런한 사람들의 농사가 하루하루 진척되면서 가을날의 풍요를 기약한다.

이즈음 들판을 지나면 항상 ‘부처님의 농사’가 생각난다. 〈잡아함〉의 ‘경전경(耕田經)’ 이야기다.

어느 날 부처님이 탁발을 위해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농부가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 우리는 손수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거두어 그것을 먹고 삽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수확해야 옳은 것이 아닙니까?”

농부의 항의에 부처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믿는 마음을 종자로 삼고, 괴로이 행하는 것을 비(雨)로 삼으며, 지혜를 보습의 자루로 삼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멍에로 삼아 바른 생각으로 스스로 보호하면 그는 좋은 농사꾼이라 하나니, 몸과 입의 업을 잘 단속하고, 음식 종류를 알아 알맞게 먹고, 진실을 진정한 수레로 삼고, 즐거이 머무르되 게으르지 않으며, 꾸준히 나아가 거칠음이 없게 하며, 안온하면서 빨리 나아가, 한 곳으로 바로 달려들지 않아서 근심이 없는 곳에 이르게 되네. 이러한 농부는 감로 열매 빨리 얻게 되고 이러한 농부는 모든 존재[有]를 받지 않네.”

구인사의 특별한 전통 가운데 하나가 농사를 짓는 것이다. 구인사 일원의 많은 농토를 스님들과 불자들이 함께 농사지어 그 수확물로 하루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대중들의 먹거리를 돕는다. 물론 스님들과 불자들은 농장에서 일을 하는 것을 노동이라 여기지 않고 수행이라 생각한다.

수행에 대한 열정, 구도심이 구인사의 농사를 즐거운 도행(道行)으로 만들어주고, 그것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전통이 되었다. 그래서 천태종의 수행풍토를 ‘주경야선(晝耕夜禪)’이라 하고, 이에 대한 종도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6월은 본격적인 농사의 계절이다. 산새들의 맑은 노랫소리와 높이 떠 흐르는 흰 구름 조각을 배경으로 일을 하는 스님과 불자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 담긴 구도심과 자연에 순종하고 자연을 닮아가는 미덕은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구인사의 농사 풍경은 천태불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아직도 외부에서는 주경야선의 의미와 그 참맛을 모른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 ).”

이는 중국 선불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한마디다. 인류의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내포한 선언일 수도 있다. 달마대사 이래로 뿌리를 내린 중국의 선불교가 독자적인 수행의 전통을 유지하며 독립적인 사원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한 선언이 바로 이 한마디다. 이 캐치프레이즈를 내 건 것은 백장(百丈, 720~814) 선사인데, 그는 선수행자들이 스스로 생활의 기반을 조달하고, 수도 생활의 질서를 엄격히 하는 등 오직 정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사원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시스템의 규칙들이 바로 ‘백장청규(百丈淸規)’이다.

수행자의 첫 번째 덕목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끊음으로써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를 초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배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연은 정직하다’는 점이다. 뿌린 만큼 거두고 정성들인 만큼 거두는 것이 농사다. 잠시 마음을 딴 곳으로 보내면 구도의 밭에는 잡초가 자라게 된다. 그래서 수행이라는 농사의 근본은 항상 자신을 응시하고 인과의 질서를 직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자는 국가적 화두 앞에 서 있다. 이 공업(共業)의 농사를 풍년이 되게 하려면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 정신도 필요하고, 인과의 분명한 질서를 잊지 않는 마음도 필요하다.

“게으른 자여, 성불을 원하는가!”

상월원각대조사님의 말씀이 더욱 새로운 6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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