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도량에 핀 연꽃 (266호)

겨레가 모두 웃는 단오에
억조창생 구제코자 山門〈구인사〉을 열었네

 

수릿날, 중오절(重午節), 천중절(天中節)로 불리는 단오(端午)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의 초여름이지만, 연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다.

지금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조선 중종 때만해도
단오는 설날, 추석과 함께 3대 명절로 꼽혔다.

세간(世間)에서는 주로 창포로 머리를 감고 그네를 탔다.
씨름이나 활쏘기 등의 민속놀이도 즐겼다. 수리취를 뜯어 떡도 해 먹었다.
광복을 두 달여 앞둔, 이 따뜻하고 화창한 오월 단오에 구인사 산문(山門)은 열렸다.

1945년 단옷날 낙성한 초암은 한국전쟁 때 불타 전란 후 새로 지었다.
현 광도실 위치에 자리한 1960년대 중반 보타전과 주변 모습.

초암에 깃든 구제중생 원력

한국 천태종의 중창조로 불리는 상월원각대조사(1911~1974)는 1945년 정월대보름, 소백산 구봉팔문(九峰八門) 중 연화봉 아랫마을인 여의생에 이르렀고, 음력 2월 연화지에 불사를 시작했다. 몇 안 되는 대중이 힘을 모아 땅을 고르고, 돌을 캐내며 법당 터를 닦았다. 3월에 기둥을 세우고 초가지붕을 이어 상량을 했고, 두 달 뒤 마침내 작은 법당과 8칸짜리 초암(草庵) 두 동을 완공했다.

이날이 음력 5월 5일 단오다. 훗날 천태종의 총본산이 되는 구인사는 조국 광복의 여명이 밝아오던 초여름에 산문을 열었다. 대조사께서는 초암 법당을 완공한 뒤 ‘억조창생(億兆蒼生) 구제중생(救濟衆生) 구인사(救仁寺)’라고 명명(命名)했다. ‘어질 인(仁)’자는 ‘어질다’는 뜻 외에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로, ‘구인’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구인사’란 절 이름에는 이렇게 구제중생의 자비행을 실천하는 도량이란 뜻이 깃들어 있다.

“십승지지(十勝之地)라는 것을 알고 여기 오셨거든. 오실 때 기차에서 탁 내리니까 단양 중에서도 구인사에서 큰 빛이 보이더라잖아. 소백산에 환한 서기가 나더래. 그래서 여기 찾아오신 거야. 여기까지 걸어서 찾아오셨지. 백자리에 들어와 길 안내를 받았는데, 후에 2대 큰스님이 되는 대충대종사가 모셨어. 조사스님께서는 ‘내가 불법을 펴면 억조창생을 구제하되, 한없이 불법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어. ‘끝이 없고 맺음이 없다’ 하셨지. ‘영원불멸하다’ 이러셨어.”

원로 비구니 문성 스님의 회고다. 스님은 또 “대조사께서 초암을 낙성하신 후 ‘훗날 초암이 헐리고 이 자리에 큰 법당이 들어서게 된다’고 예언하셨다.”고 들려줬다. 초암이 있던 자리 주변에 설법보전을 비롯해 여러 전각이 세워졌으니 대조사의 예언은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들어맞은 셈이다.

1970년대 초암이 철거되기 전 구인사 전경.

구인사 대중들은 수행과 자급자족을 위해 1년 365일 주경야선(晝耕夜禪)에 매진하지만, 단 하루 단오만큼은 일을 하지 않고 쉰다. 명절이자 구인사 창건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주로 나무에 그네를 매달아 탔고, 취나물로 떡을 만들어 대중이 나눠 먹었다. 당시를 기억하는 스님들은 단옷날에는 여러 가지 과일을 먹었는데, 때 이른 수박이 인기를 끌었다고 추억한다. 그네를 타던 곳은 초암에서 가파른 언덕을 세 개 넘어야 했는데, 지게 10개에 필요한 물건과 수박을 나눠지고 옮겼다. 자칫 수박이 굴러 떨어지면 낭떠러지 경사가 심해 다시 주워올 수 없었다고.

그네는 양지바른 골짜기, 튼튼한 소나무에 매달았다.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곳이어서 그네를 잘 타는 스님들이 그네를 타고 발을 구르면 장삼이 바람에 휘날렸는데, 그 모습에 구경꾼들은 탄성을 자아내곤 했다.

그네는 두 개를 매달았는데, 종정 스님이 타고 내려오면 어른 스님 순으로 그네를 탔다. 그네를 타기 싫은 사람들은 타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네를 타면서 “모기야, 물러가라.”하고 외치면 그해 여름 모기에 물리지 않고, 더위도 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 대중들이 그네를 줄지어 탔다.

옛 그네터에서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외국인이 그네를 타고 있다.

한국불교 제2 종단의 총본산

지난 5월 30일은 구인사 개산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연화지에 초암 한 채 덩그러니 세워져 있던 70년 전과 달리 오늘날 구인사는 소백산 골짜기에 50여 동의 전각이 들어선 대가람으로 변신했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불자들의 수행과 기도의 공덕이 함께했다. 보발재 고갯길을 닦는데 큰 역할을 했던 전 3군사령관 김종수 장군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이런 힘이 모였기에 구인사는 70년이란 짧다면 짧은 기간에 전국에 150여 직할사찰을 거느리고, 방방곡곡에 250만 종도가 종지종풍을 따르는 한국불교를 대표 종단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개산 70주년 법회에서 총무원장 춘광 스님은 “대조사님께서 지으신 초암은 단순한 수행처가 아니라 일체중생의 귀의처이자 만생명이 해탈 성불하는 도량이다. 구인사는 소백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주법계에 중중무진의 도량으로 시현되고 있다.”면서 “천태종은 구인사 개산 70주년을 맞아 더욱 큰 원력으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행로를 개척해 나갈 것이다. 인류의 평화와 법계의 안녕을 위한 천태불자들의 노력이 만인의 행복으로 회향되도록 지혜와 정성을 모으겠다.”고 다짐하셨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맡고 있던 문재인 대통령도 기념법회에 참석 “지난 70년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새롭게 도약할 천태종이 앞으로도 종교적 사명과 국가발전의 동력을 조화시키며 국민대통합과 한반도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해주실 것을 믿는다. 아울러 더 많은 국민들에게 공덕의 길을 열어 용기와 희망을 베풀어주시길 기대한다.”고 축하한 바 있다.

지난해 단옷날을 맞아 대중스님들이 백자리 단오행사장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청아한 香花, 세계만방에

구인사 개산 70주년을 맞은 2015년 단오부터 그네를 타는 장소는 백자리 주차장으로 옮겨왔다. 구인사 개산 기념법요식을 마친 후 구인사 사부대중은 불교천태중앙박물관 앞 단오행사장으로 모여든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신도들도 운집해 높다란 철제 기둥에 매달린 그네를 타며 오월의 충만한 햇살과 함께 소백산 연화지의 포근한 기운을 만끽한다.

초암 두 동이 세워진 지 일흔두 해. 연화봉 아래 깊은 골짜기에는 동시에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법당인 광명전(2010년)이 들어섰다. 그 아래 자연과 어우러진 50여 동의 전각은 국내 최대 도량의 위용을 뽐낸다. 그리고 매년 여름과 겨울, 이 전각에는 수천 명의 불자들이 몰려와 한 달간 ‘관세음보살’을 칭명하며 안거에 든다.

의천 대각국사(1055~1101)가 개창한 이후 조선 500년간 은몰(隱沒)했던 천태종은 이제 한국불교 제2 종단으로 우뚝 섰다. 기운 충만한 단옷날 쏘아올린 현대적 불법의 축포가 구인사에서 피어나는 청아한 향화(香花)로 화해 소백산을 넘고, 한반도를 건너 세계만방으로 전해질 그날이 기다려진다.

백자리에서 다도를 즐기는 총무원장 춘광 스님과 김종규 신도회장.
백자리에서 다도를 즐기는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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