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해요, 천태수행 (265호)

불교수행의 핵심은 마음을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공부를 하든 10여 년을 하면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다고 하는데 불교에 입문하여 10여 년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마음공부이다.

불교에서 마음공부하는 방법은 참으로 많다. 아나파나 수행, 위빠사나 수행, 참선, 염불, 주(呪), 실상을 관하는 등 사람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의 수행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마음공부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마음 다스리기가 워낙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은 아닐까.

천태대사의 스승인 혜사(慧思, 515~577)대사가 말년에 개창하여 머물렀던 남악의 복엄사(福嚴寺) 근처에 마경대(磨鏡臺)가 있었다. 이 복엄사에는 훗날 남악 회양(懷讓, 677~744)이 머물게 되는데, 마경대는 이른 바 ‘기왓장’ 사건으로 후대에 널리 회자된 곳이다. 어느 날 마조 도일이 좌선하는 옆에서 스승인 회양선사가 기왓장을 갈고 있었다.

“스님, 기왓장을 갈아서 뭐 하시려구요?”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왜?”

“기왓장을 간다고 누가 거울 된다고 하던가요?”

“그러는 그대는 좌선한다고 누가 부처된다고 하던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되는 데요?”

“그대라면 짐을 실은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 수레를 때릴까 소를 때릴까?”

마조 도일은 이를 계기로 수행방법을 스스로 터득하여 남악의 심인을 받게 된다. 이후 도일의 문하에는 걸출한 수많은 선지식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가 기왓장을 같았던 바위에는 “祖源(조원)”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다소 엉뚱한 생각 같지만, 과연 마음 다스리는 수행법을 제대로 깨우친 원조가 아닐까.

천태대사의 지관(止觀) 수행의 첫 걸음으로 ‘세 가지 마음을 다스리는 법[三止]’이 있다. 마음 닦는 법을 친절히 가르쳐준 법문이다.

그는 〈차제선문〉에서 마음을 닦으려면 선정을 얻어야 하는데 어떤 선정을 닦든 공통되는 관문이 바로 ‘마음을 그치는 법(止)’이라고 하였다. 사실 우리가 수행에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은, 이 수행법이 나의 바라는 바와 근기에 맞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천태대사는 이 법을 먼저 닦고 나서 다른 선정에 들어가면 공통적으로 얻는 이익이 있지만, 만일 다른 수행문을 의지한다면 자신의 근기나 숙연(宿緣)과 어긋나게 된다고 하였다. 곧 나의 능력에 맞고 숙세에 인연 있는 수행법이 가장 나에게 유용할 것이라는 것은 능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바른 스승이라면 제자에게 그에게 알맞은 수행법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스승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한다.

도를 얻은 스승은 제자의 근기를 보고 그가 전생에서 본래 익힌 법에 따라 알맞은 수행방법을 가르친다. 부처님 당시 사리불에게 두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근기를 알 수 없어서 제련사의 아들에게는 부정관을 주었고, 세탁사의 아들에게는 수식관을 닦도록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진전이 없었다. 이 방법은 숙세에 닦던 것이 아니어서 선정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견이 생기게 되었다. 이를 아신 부처님께서는 수행방법을 서로 바꾸어 주었더니 얼마 안 되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두 번째 스승은 도를 얻지 못하는 경우이다. 곧 제자가 본래 닦던 방법을 알지 못하고 근기도 알지 못한다. 이런 스승이라면 응당 ‘마음을 그치는 법’인 지(止)의 수행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이 고요히 선정에 들면 숙세의 선악의 근성이 발현하는데, 스승은 발현한 선정을 도와서 닦도록 안내해 준다. 선정이 일어나지 않고 연하는 대상에 따라 마음이 함부로 뛰어나가서 탐내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치성하면 그 중에서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따라서 지문(止門)을 통해 대치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에 앞서 ‘세 가지 마음 다스리는 법[三止]’을 가장 앞에 두어 닦도록 하였다.

그 첫째 방법은 대상을 정하여 한 곳에 마음을 매어두는 계연지(繫緣止)이다. 둘째는 마음을 제지하는 제심지(制心止)이다. 셋째는 제법의 실체를 알아 마음을 그치게 하는 체진지(體眞止)이다.

신라시대 성승(聖僧)으로 통하는 원효(元曉)가 득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는 적어도 마음 다스리는 법을 터득한 듯하다. 〈송고승전〉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원효가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항구로 가는 도중에 비가 몹시 내려서 인가를 찾아 헤매다가 땅막(土龕)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은 피곤하여 땅막 곧 무덤인줄 모르고 편안하게 잠을 잘 잘 수 있었다. 이튿날 깨어보니 오래된 무덤이었다. 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하룻밤을 다시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잠을 이루려고 해도 무덤 속 귀신들이 떠올라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원효는 여기서 크게 마음을 깨달았다.

“전날은 땅막이어서 편히 잘 수 있었으나, 오늘은 무덤이기 때문에 귀신의 장난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마음이 일어나므로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니구나.”

지(止)란 그친다, 제지한다는 뜻이 있다. 우리가 수행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데,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는 등 대상에 인연하여 탐내고 화내고 어리석음이 일어난다. 이때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매어두어 제멋대로 마음이 뛰놀지 않게 해야만 한다. 어떤 것에 인연하여 일어나는 온갖 어지러운 생각 때문에 일념을 대상에 매어두고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 계연지이다.

〈소지관〉에서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어 함부로 움직이지 않게 하되 마치 원숭이를 사슬로 묶어 놓은 것처럼 하라.”고 당부한다. 주의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어 지키는 것이라 하고 있다. 이렇게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어 마음을 모으기 좋은 곳으로 우리 신체의 다섯 군데가 있다. 첫째 정수리는 수행 중에 자주 졸거나 혼침에 빠지는 사람에게 유용하다. 둘째 머리카락과 살 사이이다. 이곳은 마음을 모아 주하기가 좋고, 숙세에 닦았던 백골관이 일어날 수도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셋째 콧마루이다. 코는 숨 쉬는 바람이 오가는 곳으로 숨이 잠시도 머물지 않음을 느끼면 무상감을 쉽게 깨달을 수 있고, 또한 전세에 익힌 수식관을 도와 고요한 선정에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하단전이다. 이곳은 기(氣)가 모이는 바다로 여기에 마음을 집중하면 여러 병이 사라지고 부정관 등의 관이 잘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발바닥이다. 이곳은 신체의 가장 아래 부분으로 기가 마음을 따라 내려가서 사대의 조화를 이루기가 쉽다. 또한 부정관이 밑에서부터 일어나므로 전생에 익힌 부정관을 도와 일으키기가 쉽다고 한다.

세 가지 마음 다스리는 법 중에서 두 번째 제심지는 만나는 대상들에 대해 허망하게 일어나는 생각들을 제지하는 수행이다. 마음을 닦을 때 어떤 경계나 현상이 나타나면 “너는 내가 찾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제지하여 물리쳐 나아가는 방법이다. 선정을 증득하려면 정법(定法)으로 마음을 유지하여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그치게 해야 한다. 마음을 닦아 나아갈 때 각(覺)과 관(觀)이 끊임없이 일어나면 이를 제지하여 마음이 고요하게 입정(入定)에 들도록 하는 것이다. 〈소지관〉에는 우리의 오근(五根)이 우리 의식의 주인이므로 오경(五境)을 따라 일어나는 망상을 제지하여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세 가지 마음을 다스리는 법 중에서 세 번째는 체진지이다. 우리의 심성의 이치는 원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므로 지(止)라고 하는데, 인연 따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 일체제법(오온·십이처·십팔계·삼독 등)을 관하여 그 진실한 모습을 알면 모두 자성이 없고 공하여 취할 것도 집착할 것도 없으므로, 망상이 스스로 멈추고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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