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 무소의 뿔처럼 (265호)

30여 년간 3천번
聖山을 오른 ‘남산사나이’
부서진 불상으로 佛法을 전하다

열띤 해설을 하고 있는 김구석 소장.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
경주생, 울산과 경주에서 공무원을 하다 인연 따라 명퇴하고,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다녔다. 경주남산연구소(www.kjnamsan.org)를 설립 운영하면서 경주에서 문화유산해설 강의와 답사 지도, 남산 유적답사 안내해설 등을 하고 있다. 2015년 경주시 문화상을 받았다.

늠비봉 오층석탑 인근에서 쓰레기를 줍는 김 소장.

경주에는 남산이 있다. 천년 도읍 서라벌의 월성 남쪽에 우뚝 솟아 있다.

남산에는 절터 150여 곳, 불상 130여 구, 100여 기의 탑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어느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서라벌 백성들의 남산에 대한 신앙은 깊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 이러한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시멘트 코를 붙인 부처님

김구석 소장이 경주 남산 탑골 마애불 앞에서 해설을 하고 있다.

1969년 5월 셋째 일요일이었다. 경주불교학생회 야외법회로 남산에 올랐다. 1시간이나 가파른 산길을 올라서자 눈앞에 거대한 바위 절벽이 나타났다. 남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칠불암마애불상군이다. 일곱 불보살상은 모두 시멘트로 된 코를 달고 있었다. 시멘트 삭은 짙은 물감이 검붉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산 돌부처와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 후 몇 년 동안은 수시로 남산을 올랐다. 외롭거나, 힘들거나, 할 일 없을 때도 올랐다. 남산의 돌부처는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남산을 다시 찾은 것은 1980년 봄이었다. 당시 울산에서 공무원을 시작한 나는 타향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매 주말마다 경주의 산과 들을 헤맸다. 그러던 중 1984년 경주에서 시작한 ‘무주상 보시’운동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학생 불교운동을 함께하던 선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몇몇 도반들과 함께 ‘부처님마을’이라는 단체를 창립하게 되었다. 정신적인 사상은 〈금강경〉의 ‘무주상 보시’에 두고, 실천적 행동으로 경주남산 불교유적의 보존과 전승,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남산의 참다운 가치를 홍보하기로 하였다.

이후 우리 도반들은 삼삼오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매 주말마다 남산의 불교유적을 여기저기 답사하고 꼼꼼히 공부하였다. 그런데 불상과 탑들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절들은 무너지고, 탑은 부서져 계곡에 뒹굴고 있었다. 불상은 파괴되어 마애불 이외에는 온전한 상(像)이 없었다. 이렇게 찬란한 불국토를 조성한 이는 누구이며, 이렇게 처절하게 파괴한 이는 또 누구인가? 특히 이 땅의 불자는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분심(憤心)이 끓어올랐다. 이때부터 빌린 카메라로 남산의 불상과 탑들을 사진으로 찍어 모았다.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요량으로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었고, 작은 환등기를 하나 구해 누구든지 남산을 보겠다면 달려가서 상영해 보여주었다. 또 남산을 순례하겠다는 불자들이 있으면 즐겨 안내하고 해설하였다. 신심이 솟아올랐다.

빛깔있는 책 〈경주 남산〉 출간

용장사지 삼층 석탑 앞에 운집한 문화유적답사단.

그렇게 찍은 사진이 1988년 〈빛깔 있는 책. 경주남산〉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남산 사나이’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게 불리니 남산을 더 자주 갈 수 밖에 없었다. 1993년 우리 도반들의 스승이시며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린 고청 윤경렬 선생님의 〈겨레의 땅 부처님 땅. 경주남산〉이 출간될 때 그동안 찍은 사진을 모두 드렸다. 이 책은 재판을 거듭했고, 이어서 해외 독자들을 위해 영어판·일어판도 함께 출간되었다.

이후 도반들과 남산의 홍보와 보존활동에 매진하여 ‘경주남산 사진전’, ‘경주남산 성역화결사대회’도 개최하였고, ‘남산사랑모임’ 등을 창립하여 남산의 답사·순례와 보존·홍보활동을 하였다. 그간 남산을 답사하고 안내 해설하며 오르내린 것이 족히 3,000번은 넘었으리라. 슬라이드 필름을 이용한 강의 또한 300회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우리 집 보살을 불광법회에서 만났는데, 나를 따라 경주와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워서 문화관광해설을 봉사하고 있다. 누구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해설하고 봉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2005년에는 남산의 외진 골짜기에서 파괴된 부처님 머리를 발견하였다. 이 불상은 2009년에 복원됐는데, 해방 후 1975년 박물관에서 남산 불상이 한 번 복원된 후 30년 만에 파괴되었던 남산의 불상이 복원되는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그 복원 과정에서 2007년에 이르러 남산에서 세 번째로 큰 5.6m 높이의 마애불상이 땅속에서 발견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 모두가 남산 부처님의 은혜라 생각한다.

남산의 불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인도를 비롯하여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불상과 탑을 순례하였다. 1996년에는 ‘인도의 불교유적 사진전’도 열었다. 그 후 남산의 탑과 불상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동국대학교에서 고고미술사와 불교미술사를 배웠고, 또 오랫동안 경주문화유산 해설 강의를 맡고 있다.

매년 남산 무료 해설 300여 회

경주남산연구소는 매년 300여 회 이상 문화유적답사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은 ‘경주남산연구소’를 운영하며 남산에 대한 보존과 홍보 답사를 하고 있다. 남산유적답사 정기강좌도 2000년부터 진행, 지금까지 30기 900여 명이 남산을 체계적으로 답사하고 공부하였다. 현재 이 분들은 남산지킴이이자 홍보활동가가 되어 있다. 지금도 학기별로 이 문화유산 강의를 듣는 이가 200명에 이른다.

경주남산 문화유적답사 안내 해설도 무료로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만도 317회에 5,600여 명이 다녀갔다. 올해도 313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물론 혼자 할 수는 없다. 그간 길러 낸 남산 전문해설사 중 ‘경주남산 지킴이’ 70여 명이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남산에 대한 홍보·답사자료도 많이 만들어냈다. ‘지도쪽지 남산’은 2003년부터 매년 수정하여 발간하고 있으며, 세부적인 남산약도 6종, 남산 가이드북 6권, 남산 사진엽서 90종, 기타 남산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경주남산연구소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 모습.

남산의 절들은 서라벌에 있는 큰 절들과는 다르다. 서라벌의 큰 절이 귀족적이고, 호국적이라면, 남산의 절들과 탑상(塔像)은 서민적이다. 또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산 능선에서, 봉우리에서 탑이 솟아오른다. 바위 속에는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다. 현신(現身)하신다. 산 전체가 바로 불국토이다.

옛말에 ‘등 굽은 소나무가 고향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젊은 시절 남보다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덕으로 고향에 남아, 고향의 문화유산을 지키며 조상들의 찬란했던 정신문화와 불법 홍포를 담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스런 남산부처님의 은덕이다. 내 이제 또 무슨 욕심이 있겠는가, 그냥 하던 일 계속하며 남산 밑에서 살란다.

용장계 여래좌상은 일명 '목없는 부처님'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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