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500년 전인 1517년 마틴 루터는 95개조에 달하는 개혁 명제를 발표하면서 교회에서 공개적인 토론을 요구하였다. 카톨릭 사제였던 루터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카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종교개혁을 추구하였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결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부패한 중세 종교계에 소금이 되었고 새로운 빛이 되어 개신교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루터가 개혁하고자 하였던 핵심적인 과제는 교회에서 면죄부를 파는 문제였다. 면죄부 판매는 죄를 지은 사람이 교회에 가서 면죄부를 사면 지은 죄가 모두 사면된다는 주장에 따라 행해진 것이다. 루터는 이에 대해서 “죄를 용서하는 교회법은 오직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사망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부과되어서는 안 된다. 사제가 사망한 자에게 있어서 연옥에서의 교회법적인 회개를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지적했다.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사상의 핵심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나 죽은 자를 위해서 면죄부를 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보다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작용하고 있었다. 결국 루터는 파문당했지만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토대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종교의 자유와 평등의 실현에 기여하고, 기독교의 세계화와 보편화에 일조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500년이 지난 작금의 현실을 보면 과연 종교가 개혁되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종교계는 혼란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불교계의 현실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불교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기의 카톨릭이 직면했던 유사한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다.
한국의 불교계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또한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고 있는가? 그리고 이 땅의 구성원들로부터 향후 생존에 필요한 충분한 지지기반을 갖추고 있는가?
종단과 사찰, 그리고 출재가의 불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장담하기 어렵다. 불교계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는 신행활동을 하는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부처님께 의지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 이 땅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이 불교계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한 면이 많다. 여러 종단과 사찰에서 세속에 매몰되거나 고립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삶을 열반의 행복으로 이끌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노력보다는 자기 살림살이에 연연하며 근시안적 안목으로 살아가는 경향도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스스로 타파하지 못한다면 불교계는 사회적 지지기반을 잃게 되고 지속가능한 발전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후오백세가 지났다. 지금부터라도 지계수복자들이 많아져서 금강과 같은 지혜로 불교계가 처한 현실을 타파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불교계가 될 수 있도록 불교개혁이 시작되기를 바란다. 불교계의 구성원들은 복덕과 지혜를 갖추어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보여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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