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문 (265호)
간절한 그 마음에
대숲 흔드는 맑은 바람 불어 온다
계수관세음 稽首觀世音
대비노파심 大悲老婆心
수제무문인 手提無文印
인아비공심 印我鼻孔深
기유인무문 豈惟印無文
신역무처심 身亦無處尋
이상불리차 而常不離此
청풍산죽림 淸風散竹林
관세음보살께 머리 조아려
간절한 마음으로 절 하나이다.
손에는 글자 없는 도장을 들어
내 콧구멍 깊이 그 도장 찍으시네.
어찌 그 도장에만 글자가 없으리
그 몸 또한 찾을 길 없네.
그러나 언제나 여기를 떠나지 않아
맑은 바람이 대숲을 흔드네.
기도는 간절함이다. 간절함이 없으면 기도가 아니고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막연한 바람으로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 또한 막연하다. 기도를 성취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가 간절하고 절실하기 그지없는 바람을 품고 초인적인 기도를 통해 그 성취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도 뿐 아니라 수행도 간절함이 없으면 성취되지 않는다. 나를 위해서든 누구를 위해서든 혹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을 위해서든 기도와 수행의 동기는 간절해야 하고 그 간절함이 성취에 이르는 원동력이 된다.
앞의 시는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 선사의 작품이다. 제목은 ‘몽견대비보살(夢見大悲菩薩)’이다. 꿈에서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는 의미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절실하여 꿈에서 보았을 것이다. 참선하는 수행자들은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이야기한다. 꿈에서조차 화두수행을 놓지 않고 밀어붙이는 공부의 치열함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실제로 수행에 몰입하려면 수마(睡魔)를 극복해야 한다. 잠을 극복하는 과정이 몽중일여다. 아무튼 이 시의 창작 배경은 몽중일여의 지극한 기도 혹은 수행의 장면이다.
진각혜심 선사는 조계산 송광사 16국사 가운데 제2대 조사로 보조지눌(普照知訥)의 대를 이어 수선사를 통해 간화선 부흥을 일으킨 고승이다. 유명한 <선문염송집>을 편찬했다. 진각혜심은 선교융합을 거부하고 오로지 간화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수선사를 부흥시켰다. 그런 이력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읽으면 시의 전반을 관통하는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시는 관세음보살님을 향한 지극한 귀의심을 보여주면서 시작하여 관세음보살을 선적 혜안 속에서 ‘공적(空的) 대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관세음보살의 무궁한 대자대비를 유한의 차원이 아닌 무한의 차원에서 감지하도록 하는 묘한 힘을 보인다.
대상으로써의 관세음보살께 머리 조아려 기도하는 그 간절함이 무르익으면 존재성을 초월한 곳에서 관세음보살을 감응[친견]할 수 있다. 그것을 함련(?聯 ,3~4구)에서 글자 없는 도장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글자 없는 도장이란 선불교에서 말하는 ‘심인(心印)’으로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 진리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관세음보살의 끝없는 자비라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이 그렇듯 간절한 귀의와 깊은 믿음 그리고 목숨을 던지는 뜨거운 구도심의 충만이 불가사의한 감응의 바탕이다.
관세음보살의 깊고 넓은 자비를 자신이 오롯이 받아들인 경지를 진각혜심은 ‘내 콧구멍 깊이 그 도장을 찍으셨네’라는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관세음보살의 친견은 본래 목적이 아니다. 친견을 통해 ‘그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 무엇’은 무엇인가? 바로 ‘그 무엇’에 이 시의 결론과 기도 수행자의 궁극이 있다. 진각혜심은 ‘그 무엇’을 찾을 길 없다고 했다. 관세음보살은 형상의 몸으로 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 없는 도장’으로 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초월에서 초월을 만나는 것이다.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그 무엇’은 항상 자신을 떠나지 않는다. 자신의 심중에 내재된 대자대비의 마음 그것이 바로 ‘그 무엇’이다. 진각혜심의 시는 마지막에 ‘대숲을 흔드는 맑은 바람’을 등장시켜 바로 그 일상의 모습이 ‘그 무엇’임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