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읽는 부처님 말씀 (265호)

아름다움이 한가득 넘치는, 그래서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불리는 오월은 음력으로 사월입니다. 우리의 고귀한 스승이신 부처님께서는 바로 사월 초파일에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물론 부처님은 인도(현 네팔)에서 탄생하셨고, 인도의 계절이 우리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부처님께서 온갖 생명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계절에 오셨다는 것은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계절에 오신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한겨울 혹한과도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 봄의 아름다움으로, 봄의 축복으로, 봄의 새로움으로 우리 곁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생은 어떤 형태로 한겨울 혹한을 겪고 있는 것일까요.

불교는 그 고통을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으로 분별합니다. 육체적으로 중생은 생로병사, 즉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받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마음에 맞는 상황을 잃어버리는 고통, 싫은 상황에 맞닥뜨리는 고통, 바라지만 충족되지 못하는 고통, 종합하여 몸과 마음에 집착하는 고통을 받습니다.

태어남이 고통이요, 늙음이 고통이며,
병듦이 고통이요, 죽음이 고통이다.

- 〈아함경〉 에서

중생은 생로병사를 비롯한 팔고(八苦)를 받습니다. 그런데 고(苦)로 번역된 팔리어 ‘둑카(dukkha)’는 우리말 ‘괴로움’과는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둑카는 ‘고통’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넓게는 ‘불만족’을 의미하는 말인 것입니다. 딱히 고통스럽지는 않은 상태, 예를 들어 마음이 무덤덤한 상태나 우울하고 처지고 힘들고 지쳐 있는 상태 또한 둑카에 포함됩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병들게 되고, 지금 젊다고 해도 언젠가는 늙어야 하며, 지금 살아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더라도 그 사랑은 식게 마련이고, 지금 갖고 있어도 언젠가는 그것을 잃게 마련인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그 삶은 둑카이며, 물질 · 느낌 · 생각 · 인식 · 의지[五蘊]의 집합체로서의 몸과 마음이 그 둑카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둑카를 받는 몸과 마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그것은 태어났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모든 괴로움의 근원을 태어남에서 찾습니다. 불교가 몸의 고통을 ‘노병사’라고 하지 않고 그 앞에 ‘생’이라는 말을 붙여 ‘생로병사’라고 한 것은 노병사를 비롯한 삶의 모든 고통이 생이라는 것 위에 얹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은 노병사를 비롯한 삶의 모든 고통의 출발점이자 기초입니다. 태어남이 없다면 노병사 또한 없습니다. 태어남이 없다면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또한 없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태어남이 없는 경지를 지향합니다. 불교인이 바라 마지않는 열반의 경지는 윤회를 초월하는 경지이며, 윤회를 초월한다는 것은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윤회는 무엇일까요. 윤회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주제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윤회에 대한 믿음의 문제이고, 둘째는 윤회의 초월 문제입니다.

먼저 윤회에 대한 믿음의 문제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인간과 세계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자연과학지식은 현대인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고, 그에 따라 윤회에 대한 믿음은 현저하게 약화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윤회는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주장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윤회는 ‘고대 인도사회’라는 특정한 환경에서 방편적으로 인정되었던 교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윤회를 이렇게 생각할 경우 불교의 기초가 허약해진다는 데 있습니다. 불교가 제시하는 거의 모든 교리가 윤회를 바탕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윤회가 부정되면 많은 불교 교리가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과학과 윤회를 양립시킬 수 있을까요?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과학의 영역이 제한적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자연과학)은 사물의 ‘현상’을 분석하여 엄정한 법칙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의미’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를 묻는 존재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과학이 다루지 않는 분야로서의 ‘의미’를 ‘왜’의 관점에서 탐구하고 답하기 위해 철학을 하고, 종교를 믿게 됩니다.

철학과 종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철학과 종교는 인간과 세계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중점을 두는 지점이 다릅니다. 철학은 탐구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두고, 종교는 탐구의 결과, 즉 답에 중점을 둡니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을 제시하지만, 그중 어느 학설이 ‘정답’인지를 확정하지는 않습니다. 그에 비해 종교는 하나의 설을 ‘정답’으로 믿으며, 그 믿음에 의해 설은 종교의 진리로 승격됩니다.

그렇다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는다는 것은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는다고 할 때 그는 그렇게 믿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믿기로 결심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그렇게 믿기로 결심함으로써만이 세계와 인간의 의미를 구축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서 종교적 믿음은 삶의 의미를 구축하기 위해 감행하는 실존적인 결단(결심)입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과 윤회를 믿는 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불제자가 윤회를 믿는 것은 자연과학적으로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즉 생로병사와 우비고뇌로 가득 찬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윤회를 믿기로 결심합니다. 바꿔 말해서 우리 불제자의 입장에서, 윤회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삶의 의미는 구축될 수 없습니다.

나쁜 행위를 하고도 호의호식하는 사람이 있고, 선한 행위를 하고도 보상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정의롭지 못한 면을 우리 불제자는 바로잡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금생만으로 한정된 현실에서 그 바로잡음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의 실현을 내생까지로 연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생을 인정한다는 것은 또한 전생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전생과 내생이 실제로 있는지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윤회를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럼으로써만이 선했지만 불행만을 겪다가 죽어간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남이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상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악의 보상과 징벌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불가지론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신에 의한 징벌과 포상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윤회를 통한 보상과 징벌을 선택하여 믿습니다.

윤회와 관련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윤회의 초월입니다. 우리가 윤회를 믿는 것은 선악과 관련된 정의의 완성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우리는 윤회가 중생에게만 적용된다는 것, 깨달음을 성취하면 윤회를 초월하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부처님께서 윤회를 멀리 벗어나셨다는 것을 믿으며, 그것이 부처님의 본성이 그러하였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 또한 부처님과 본성 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믿습니다.

윤회를 초월한 경지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 밖에 있습니다. 윤회는 시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태어나느니 마느니 하는, 공간이라는 범주 안에서 어느 특정한 지점을 점유하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불교인이 지향하는 최종적인 경지인 열반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생의 알음알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경지입니다.

열반의 경지는 허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중생은 시공간 속에서 살고 허공 또한 공간의 일부이지만, 허공이라는 공간은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합니다. 허공은 금으로 그어 나눌 수 없고, 불로 태우거나 망치로 쳐서 훼손할 수 없으며, 붙잡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고, 더럽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물들일 수 없습니다. 마치 그와도 같이 열반의 경지 또한 그 어떤 고통과 기쁨에 의해 흔들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이 한 길을 따르라.
그러면 모든 둑카의 끝을 보리라.

- 〈법구경〉 게송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맨 처음 성취하셨고, 그를 성취하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제시해 주신 법을 믿으며, 그분이 제시해 주신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그 여정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생로병사를 비롯한 팔고의 겨울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꽃피는 봄을, 그에 뒤이어 생생하게 피어나는 신록의 오월을 살고 있습니다. 고귀한 스승 부처님께서 오신 날, 사월 초파일이 지금 우리 앞에 눈부시게 다가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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